920화
‘아차· 방금 결심해놓고·’
이한은 빠르게 반성했다·
젊은 해골 교장의 선행을 보고 결심했는데 바로 이렇게 짜증을 내다니·
“음· 미안합니다· 요즘 여러 일이 많아서 괜히 화를 냈군요· 자· 여기 포도 넣어드리겠습니다·”
-꺼져!
“······”
화난 햄스터의 욕설에 이한은 포도를 연속으로 우리 안에 집어던졌다·
그러자 햄스터는 비명을 지르며 구석으로 도망쳤다·
‘아차· 또 이러다니!’
이한은 다시 한 번 반성했다· 동시에 살짝 자괴감이 들었다·
결심해놓고 바로 이러다니·
‘큭· 역시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인가? 젊은 교장 선생님처럼 행동하는 건···’
“이한 학생· 괜찮아요?”
셉터의 빛을 갈무리하고 조심스럽게 보관함 안에 다시 집어넣은 가르시아 교수는 제자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셉터로 인한 경험은 짧은 시간 동안 압축된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하더라도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울 터·
“괜찮습니다· 교수님· 그리고 많이 배웠습니다·”
“정말요? 어떤?”
“진짜 교장 선생님, 아니, 젊은 교장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방금 진짜 교장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저도 좀 더 선행을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굳이?’
가르시아 교수는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교수가 보기에 그녀의 제자는 이미 충분히 선행을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에인로가드 학생 기준으로 저 정도면 충분히 착한 편인데···
‘아니야· 저런 생각을 말릴 필요까지는 없지·’
의아해하던 가르시아 교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선한 일은 더 행한다고 해서 나쁠 게 없었다· 제자가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면 스승으로서 응원해주면 그만이었다·
“이한 학생· 나는 이한 학생이 자랑스러워요· 그런 생각도 하고·”
“후· 하지만 오자마자 여기 햄스터한테 화풀이를 해버려서···”
“···그, 그 정도는 괜찮아요· 저기 햄스터도 이해해줄 거예요·”
사악한 마법범죄자한테 포도 몇 개 던지는 건 젊은 해골 교장도 ‘음 뭐 그 정도는···’이라고 반응해줄 게 틀림없었다·
그런 일 때문에 시무룩해질 필요가 없었다·
“영락은?”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볼라디 교수가 조용히 질문했다·
사실 영락은 이번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도 했다·
미친 분신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면 해결책을 처음부터 다시 궁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럴 경우 정말 에인로가드 밖까지 사태가 커질 수도 있었다·
“실마리는 잡았습니다·”
이한은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직 완전한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젊은 해골 교장에게 들은 말 덕분에 짚이는 부분들이 있었다·
-제자님이 저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내려온 것처럼,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걱정해주십시오· 그러면 곧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미친 분신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이 마법에 익숙해지도록 해라· 천것 네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음· 생각해보니 전혀 비슷한 말이 아니군·’
전자는 친절했는데 후자는 그냥 자기만 아는 소리였다·
이한은 새삼 해골 교장이 나이를 먹고 얼마나 배배 꼬인 대마법사가 되었는지 실감했다·
후자를 어떻게 알아듣는단 말인가?
‘결국 마법도 일정 수준을 넘어가려면 담긴 뜻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하위 서클 마법들은 이런 일이 드물었다· 마력의 움직임과 주문의 영창 정도만 파악하면 마법사가 무슨 뜻으로 이 마법을 만들었는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고위 서클 마법들은 단순히 공정을 따라하는 것만으로는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했다·
소세계가 좋은 예시였다· 같은 마법이지만 그 마법사가 이 마법에 담은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시전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한은 고위 마법들이 구성 형태는 다르지만 소세계처럼 작은 세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추측했다·
작은 세계에 담긴 의념을 터득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완전히 힘을 끌어낼 수 없는 구조·
···사실 지금 이한 학년에서는 전혀 배울 필요 없는 부분이었지만 이한은 혼자서 독학으로 깨우친 셈이었다·
‘영락도 그렇다· 진심으로 시전했어야 하는 거였어·’
젊은 해골 교장의 말과 행동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이한은 그 다짐을 담아 영락을 다시 시전해 볼 생각이었다·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한 번 시도해보고 싶···”
“됐네요!”
“됐군·”
“······”
두 교수가 이미 성공했다는 듯이 대화를 나누자 이한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아니 이 사람들??
“교수님· 혹시 제 말 잘못 들으신 거 아니죠? 분명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
“네네· 들었어요· 이한 학생· 휴식 취하고 기운 돌아오는 대로 바로 출발하죠· 야차왕께서도 많이 무리하고 계실 테니까요·”
“······”
이한은 갑자기 젊은 해골 교장이 그리워졌다·
젊은 해골 교장이 여기 있었다면 ‘제자의 말을 똑바로 들어주세요!’라고 혼내줬을 텐데!
‘실패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이 사람들?’
제자가 걱정하거나 말거나 일의 해결을 확신한 두 교수는 자기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눴다·
“참· 이번에 방문하면서 젊은 교장 선생님의 마법을 조금 적어왔어요· 급하게 메모했는데 돌아가서 찬찬히 정리해보려고요·”
가르시아 교수는 구깃구깃한 종이뭉치를 꺼냈다·
거기에는 젊은 해골 교장이 직접 가르쳐 준 마법도 있었고, 가르시아 교수가 직접 보고 그 구조를 역으로 분석해 적은 마법도 있었다·
그렇게 긴 여행은 아니었지만 마법사로서 깊은 영감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배그렉 교수님은 안 적으셨나요?”
“나도 적었소·”
“그러실 줄 알았어요·”
볼라디 교수는 잘 장정된 검은색 가죽 수기(手記)를 꺼냈다· 두 교수는 서로 어떤 마법을 인상 깊게 보았는지 교환했다·
‘교수들이란· 정말 지독하군·’
이한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그저 고대 시절이 지독했고 젊은 해골 교장을 어떻게 에인로가드에 초빙 못 하나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교수들은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마법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저 정도는 해야 에인로가드의 교수가 되나 싶었다·
“흐음· 그럼 여기 있는 시간 마법부터 이한 학생한테 가르쳐주면 되겠네요·”
“알겠소· 젊은 교장 선생님의 휘도르는 지금 가르치기 힘들 것 같군·”
“······”
젊은 해골 교장에게 배워 온 마법을 이한에게도 강제로 전수하려는 두 교수의 모습에 이한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대체 무슨 악의란 말인가??
‘젊은 교장 선생님이 여기 있었다면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을 텐데!’
* * *
야차왕은 이한 일행의 도착에 크게 놀랐다·
흐음· 오수의 제자· 내 예상이 빗나갔군· 설마 실패했을 줄이야·
이한의 안색이 어두운 걸 보니 준비가 실패한 게 분명했다·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야차왕은 즉시 다음 조언을 꺼냈다·
이렇게 된 이상 나와 같이 소멸시키는 수밖에 없겠군· 학생들을 대피시키고 마법사들을 불러오도록 해라· 내가 최대한 방해해보겠지만 결코 방심해서는···
“잠깐, 안 실패했어요! 전하·”
가르시아 교수는 앞서가는 야차왕을 말리며 외쳤다·
야차왕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실패하지 않았다고?
“네!”
그런데 왜 오수의 제자는 저렇게 낯빛이 어둡지?
“제 얼굴은 원래 이렇습니다·”
이한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가르시아 교수나 볼라디 교수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이한도 해골 교장의 제자인 만큼(더군다나 직전제자였다) 둘만 마법을 독점하는 건 무례하고 비열한 짓인 것이다·
아낌없이 퍼준 젊은 해골 교장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이한에게도 최대한 빨리 마법을 전수해야 했다·
···물론 여기에 이한 본인의 의사는 들어가지 않았다·
‘왜 교수들이 마법을 억지로 배워온 것 때문에 내가 배워야 할 마법량이 늘어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난제였다·
흐음· 내가 착각했군· 그렇다면 오수의 제자· 준비해온 것을 한 번 보여 봐라!
야차왕의 외침에 이한은 잡생각을 떨쳐내고 앞으로 나섰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이한을 응원했다·
“이한 학생은 할 수 있어요!”
-반드시 해내야 한다!
“······”
이한은 햄스터 우리를 발로 한 번 찼다· 햄스터는 찍찍대며 욕설을 퍼부었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냐?
“교수님을 어떻게 발로 찹니까?”
-······
묘하게 논리적인 말에 햄스터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건 그래!
‘집중한다· 증오를 잊고 그 때 느낀 깨달음을 담는 거다·’
이한은 햄스터에 대한 짜증과 교수들에 대한 원망을 던져버리고 깊게 침잠했다·
<고나달테스의 영락>은 결국 다른 이들의 고통을 자신이 짊어지겠다는 젊은 해골 교장의 다짐에서 시작된 마법·
그 다짐을 이해하고, 자신도 조금은 거들 각오를 해야 했다·
‘얼마나 거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집중하던 이한은 순간 이렇게 타협적으로 다짐해도 되나 싶었다·
최소한 마법 시전할 때는 ‘제 남은 재산과 인생을 전부 바치겠습니다’정도의 각오를 내걸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시전하는 마법 앞에서는 그런 거짓말이 불가능했다·
이제까지 했던 것보다 조금 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서·
그 순간 이한은 자신의 시야가 영적으로 넓게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마치 몰랐던 세계와 법칙을 이해했을 때와 같은 광활한 확장감이 영혼을 뒤흔들었다·
‘이건···!’
* * *
정신을 차린 미친 분신이 가장 처음으로 본 건 야차왕이 한쪽 팔로 목을 조르는 모습이었다·
“···뭐하는 짓이지?”
정신을 차렸군, 내 친우여·
“정신을 차렸다니· 무슨···”
미친 분신은 공방 안을 한 번 둘러보고, 공방 밖의 마력 흐름을 파악하고, 외곽에 설치된 마법을 가볍게 감지하는 것만으로 상황을 즉시 파악했다·
“반전했었나?”
그렇지·
“어떻게 막았지?”
여기 뛰어난 마법사들과 네 제자가 막았지·
가르시아 교수는 매우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제자와 달리 가르시아 교수는 아직도 이 차갑고 미친 분신을 대하는 게 어색했다·
“왕족으로서 예를 표하도록 하지·”
“아, 아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마법사· 왕족의 치하는 가슴을 펴고 받도록 하거라·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니·”
‘혹시 젊은 교장 선생님의 인격으로 미치게 할 수는 없나···?’
가르시아 교수는 젊은 해골 교장의 상냥함이 생각나서 살짝 시무룩해졌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리워질 줄이야·
“풀어라·”
그러도록 하지·
야차왕은 냉큼 팔을 치웠다· 미친 분신은 밖에 시전해놨던 반신 군대의 토대들을 빠르게 역소환시켰다·
눈치를 보던 가르시아 교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대륙 정복 욕심은 버리신 거죠?”
“왕족이 그런 소리를 했었나? 과연 그랬겠군·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미친 분신은 냉소하며 말했다·
미친 분신의 기준에서 대륙 정복은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저지르는 실수에 가까웠다·
정복 후의 일은 별개로 놓더라도, 그 정복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자원이 낭비되겠는가·
마법으로서 비원을 이루려는 미친 분신에게 이 방법은 지나치게 조잡하고 우악스럽게 느껴졌다·
‘휴·’
가르시아 교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는 걸 보니 정말 대륙 정복은 안 할 것 같았다·
“왕족도 하나 질문하도록 하겠다·”
“앗· 넵·”
“왕족의 제자는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지?”
“···그···”
가르시아 교수가 머뭇거리자 미친 분신은 가볍게 긴장했다·
설마 영락을 시전하면서 무슨 실수라도 있었단 말인가?
“···남은 시험이 있어서 보러 갔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