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4화
그럼에도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혹시라도 깎였을지 모르는 점수에 대한 책임 추궁은 가히 언령 마법과도 같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작작하지 못하겠느냐, 이 미치광이야!
“아니· 지금 그쪽이 실수하셔놓고 오히려 화를 내시는 겁니까?”
이한은 경악했다·
역시 누가 마법범죄자 아니랄까봐 보통 뻔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잘못 알려줘놓고 저런 대응을 하다니?
-그럴 시간이 있으면 폭군을 상대할 고민이나 더 하란 말이다·
“고민하고 있습니다· 마법사 님도 그런 말을 하실 거면 좋은 대책이라도 내놓고 그런 말을 하셔야죠·”
-안 그래도 떠올렸다·
“!”
이한은 놀란 눈으로 햄스터를 쳐다보았다(사실 톱밥 속에 파묻혀 있어서 잘 보이진 않았다)·
역시 나름 대마법사라고 좋은 의견을 떠올리다니·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어떤 방법입니까?”
햄스터는 욕이 나왔지만 참고 말했다·
-분하지만 폭군이 갖고 있는 비의는 심오하고 유구하다· 우리 같은 현 시대의 필멸자들은 쉬이 예측하기 어렵지· 결국 놈을 원래 상태로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놈의 비의를 얻어내야 해·
지금 폭군은 다른 차원에서 온 야차왕에게 봉인된 상태였다·
원래 상태였다면 햄스터가 직접 폭군에게서 비의와 지식을 읽어내려고 시도했겠지만, 지금은 햄스터가 되어서 모든 능력을 잃은 상태인 만큼 이한에게 방법을 가르쳐주고 맡길 생각이었다·
-이 마법은 <므네모시네의 거울>이다· 삼왕국 시절 만들어진 강력한 마법이지·
<므네모시네의 거울>은 상대방과 연결된 마법 청동 거울을 허공에서 소환하는 마법이었다·
고작 거울 하나 소환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 있었지만, 소환자는 질문과 대답으로 거울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게 가능했다·
누군가를 심문할 때 마법적인 방어 수단을 갖고 있다면 정보를 알아내는 게 쉽지 않은데 이 마법은 그런 방어를 관통해버리는 것이다·
-짧은 질문과 대답으로 알아내야 하니 요령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옆에서 내가 지시를 내리겠다·
“놀랍습니다· 이런 마법이 있을 줄이야·”
이한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 순수한 감탄이 햄스터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는지, 햄스터는 한결 화가 줄어든 목소리로 찍찍댔다·
-마법의 지평선은 언제나 그 예상보다 광활하지· 우리 마법사는 그 앞에서 하찮은 벌레일 뿐· 조금이라도 더 커다란 벌레가 되기 위해서는 비의를 긁어모아야 한다·
‘기분 나쁜 비유를 하시는군·’
그래도 상대가 좋은 방법을 떠올려준 만큼 이한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잠깐· 만약 스승님한테서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면 아예 스승님의 과거를 직접 엿보고 경험하면 안 됩니까?”
-최근 들은 소리 중 가장 같잖은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왜· 소원을 비는 김에 대륙의 유일한 신이 되어서 그 힘으로 폭군을 역소환시키지 그러느냐?
햄스터는 한심함을 가득 담아 찍찍댔다·
물론 방금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말한 게 불가능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은 마법사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는 편리한 도구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 말한 걸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마법과 비의가 들어갈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혹시 그런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여쭤본 겁니다·”
-마법의 지평선이 광활하다고 해서 아무 헛소리나 지껄여도 되는 건 아니다·
햄스터는 오랜만에 대마법사다운 품격을 담아 찍찍, 아니 훈계했다·
* * *
“이한 학생· 이건 <카이로스의 셉터>라는 옛 유물이에요· 이걸 사용해서 교장 선생님의 과거를 직접 경험하려고요·”
“······”
-······
이한은 햄스터를 빤히 쳐다보았다· 햄스터는 어이가 없어서 말도 하지 못했다·
저런 사기적인 유물을 갖고 있을지 누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저건 마법이 아니라 삼왕국 시절의 고대 유물···!
“괜찮습니다·”
변명하려는 햄스터에게 이한이 먼저 말했다·
“가르시아 교수님이 대단한 거지 마법사 님이 형편없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흔히 마법범죄자 하면 제국법과 도덕도 신경 쓰지 않고 마법에 몰두하는, 다른 이들보다 한 발 더 앞서서 나아가는 마법의 괴물을 연상하곤 했다·
하지만 이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마법 적통을 잇고, 제국에서 가장 대규모의 지원을 받아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학교의 마법사가 아무래도 마법범죄자보다는 마법에 뛰어나지 않겠는가·
후자는 추운 황야를 떠돌며 추적을 피하느라 연구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았다·
‘원래 무허가 연구자들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나지 않다·’
이한의 친절한 배려는 햄스터한테 별로 와닿지 않았다·
어린놈의 새끼가 자신을 같잖게 위로해주고 있다는 걸 깨달은 햄스터는 조롱보다 더 격분했다·
-$%*&$@^&!@!
‘어느 시대 언어지?’
불행히 이한은 아직 배우지 못한 과거 언어들이 많아 햄스터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한 학생· 원래 좀 더 준비할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워낙 촉박한 사안이라 재촉하게 되네요· 괜찮겠어요?”
“아· 네· 바로 시작하셔도 됩니다· 전 준비되었습니다·”
가르시아 교수의 부름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인 뒤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어, 교수님·”
“왜 그래요, 이한 학생?”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처음 보는 고풍스러운 판금 갑옷을 어느새 꺼내서 입은 가르시아 교수의 모습에 이한은 당황했다·
잘 어울린다기보다는 평생 갑옷 한 번 입지 않아본 마법사가 억지로 입은 것마냥 어색한 느낌이 풀풀 났다·
“교수님· 교수님·”
이한은 볼라디 교수를 불렀다·
아무래도 이런 건 전문가가 가장 잘 알 테니까·
“가르시아 교수님께서 긴장하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사실 질문하면서도 이한은 조금 멋쩍었다·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비록 마법 전투를 전문적으로 훈련하진 않았어도 가르시아 교수는 현존하는 제국 마법 학파를 모두 배운 천재였으며 시간 마법과 공간 마법, 그리고 주먹 마법의 달인이었다·
그런 사람을 이한이 걱정하는 건 어떻게 보면 건방진 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조금 위험해 보이는군·”
“!”
볼라디 교수의 말에 이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전문가가 보기에도 지금 가르시아 교수는 긴장한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위를 부탁한다·”
“?”
이한은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볼라디 교수의 말을 듣고서, 가르시아 교수의 호위를 맡을 다른 누군가가 주변에 있나 싶었던 것이다·
물론 주변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아, 저 말입니까??”
“?”
볼라디 교수가 살짝 의아하다는 듯이 제자를 쳐다보았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이한은 ‘그럼 너 말고 누구겠냐’라는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제가 가르시아 교수님을 감히 호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자의 겸손에 볼라디 교수는 다시 한 번 물끄러미 제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짧게 말했다·
“충분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르시아 교수님이 상대 못할 적이면 나도 같이 날아갈 것 같은데·’
약간 떨떠름했지만 이한은 일단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실 위험천만한 곳을 여행한다면 일행에 가르시아 교수가 있는 게 이한에게도 좋았다·
볼라디 교수가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려도 말려줄 사람이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가르시아 교수가 없다면···
-저기 고대의 가장 강한 마법사 열 명이 있군· 가서 목을 따오도록·
-교수님!
···충분히 이런 꼴이 날 수 있었다·
이한과 볼라디 교수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가르시아 교수는 셉터를 들고 마법 준비를 끝냈다·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셉터에서 방출되던 마력이 육십 갈래로 나눠지더니 다시 한 번 육십 갈래로, 그 다음은 스물네 개로 갈라졌다·
가르시아 교수는 어떤 잡념 하나 없는 순수한 집중 상태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고대 유물의 힘이 강력하다지만 유물에게만 모든 걸 맡겨놓을 수는 없었다·
힘이 강력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양날의 검, 즉 통제를 잃을 경우 바로 마법사 본인을 다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카이로스의 셉터>는 에인로가드에서도 특별히 관리할 만큼 귀중한 유물이자 보물이었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사흘 전 해 뜰 때를 잠깐 경험하고, 이틀 전 정오를 잠깐 경험하는 식으로 쉽게 이용할 수는 없었다·
오직 시전자가 강하게 일념하는 순간으로만·
그 순간으로 들어가 경험을 끝내고 나면 셉터도 휴식과 충전을 필요로 했다·
‘셉터여, 이 문제의 실마리가 있는 시간으로 우리를!’
우우우웅-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낮은 진동음과 함께 셉터의 빛이 마법사들을 휘감았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가르시아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순간 다른 생각을 해버렸다·
‘그런데 이한 학생이 있으면 충전이 그리 안 어려울 것 같···’
* * *
팟!
“헉, 헉, 헉, 헉·”
가르시아 교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모든 작업이 끝났다지만 유물을 사용하면서 방심하다니!
고대 유물을 연구하는 마법사로서 용납되지 않는 실수였다·
이한은 교수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크게 놀랐다·
‘보통 유물이 아니구나· 가르시아 교수님이 저렇게 힘들어하시다니·’
물론 고대의 강력한 유물을 사용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가르시아 교수가 저 정도로 지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위험한 유물까지 사용해주시다니·”
“···???”
가르시아 교수는 제자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이 셉터 정도면 그렇게 위험한 유물이 아닌데?
“무슨 소리를··· 엇· 저기!”
가르시아 교수는 뒤를 가리켰다·
현 대륙의 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건축물부터 시작해서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복색까지 어느 하나 지금과 같은 게 없었다· 이한은 자신이 확실히 머나먼 과거로 왔다는 걸 깨달았다·
복종하라, 온갖 종족들이여· 분노공의 수석 부관이자 으뜸가는 전령인 나, 에사도지콰에게!
“···헉!”
가르시아 교수는 단순히 달라진 풍경을 보고 놀란 게 아니었다·
시야 한구석에서 웬 거대한 악마가 군세를 이끌고 공격을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악마는 미노타우로스를 연상시키는 겉모습을 갖고 있었는데, 한 번 발을 구를 때마다 장벽이 무너지고 팔을 휘두를 때마다 성문이 박살났다·
평소 마법사들에게 괴롭힘 당하던 악마들만 봐왔던 이한에게 옛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악마 군세는 강렬한 충격이었다·
뒤쪽 소도시의 사람들은 장벽과 첨탑의 마법을 가동시켜서 악마들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누가 봐도 전력의 차이는 명백해보였다·
-악마여, 마르가다 왕국의 영역을 침공하다니· 건방지구나!
다행히 곧 지원이 도착했다·
수백 기가 넘는 마법 골렘들이 평원을 달리는 모습에 이한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치열하게 싸운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움직인다· 악마들이 곧 발견하겠군·”
볼라디 교수의 말에 일행은 정신을 차렸다·
악마 군세들이 후퇴하는 걸 보니 곧 이쪽도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괜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했다·
“교장 선생님의 위치를 물어봐야 하는데, 도시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렵네요· 이한 학생· 저 당시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지···”
가르시아 교수는 신중했다·
물론 가르시아 교수도 문헌으로 배운 만큼 옛 풍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바가 있었다·
여기 있는 일행은 모두 뛰어난 마법사였고, 고대에는 마법사들이 높게 대우받았으니 일이 쉽게 풀리는 것도 가능했다·
“엇!”
마침 도시에서 나온 순찰대원들이 보였다· 가르시아 교수는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복장을 보니 탈주한 노예들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