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3화
이한은 정말로 제출하기 위해 떠났다·
사악한 마법범죄자의 힘을 빌려서 간신히 얻어낸 결과물인 만큼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던 것이다·
물론 옆에 있는 마법범죄자 햄스터에게는 그 모습이 매우 광기 넘치게 느껴졌다·
-···지금 저 폭군이 공방에 갇혀 있는데 이걸 제출할 생각이 든다고??
“이거 제출 안 한다고 스승님이 제정신으로 돌아오지는 않잖습니까·”
-······
우리 안에 갇힌 햄스터는 더 이상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 새 마법범죄자 놈들이 광기를 자랑하면 거꾸로 묻어버려야겠군···’
새로이 이름을 알린 마법범죄자들은 기존 선배들 앞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자신의 광기를 자랑하곤 했다·
하지만 햄스터가 보기에 그건 그냥 같잖은 허세일 뿐이었다·
진짜 광기는 저렇게 은은하고 깊숙이 뿜어져 나와야 했다·
햄스터의 털이 쭈뼛 곤두설 만큼!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그보다 야차왕께서는 <고나달테스의 영락>을 추천하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냐니?
햄스터는 찍찍대며 의아해했다·
야차왕의 힘과 능력에 대해서는 햄스터 같은 마법범죄자도 딱히 이견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 <고나달테스의 영락>이라면 분명 그 말이 맞을 터·
“더 해주실 조언 같은 거 없습니까? 뭘 주의해야 한다, 뭘 중점으로 해야 한다···”
-흐음·
수염을 튕기며 고민하던 햄스터는 문득 이상함을 깨달았다·
이걸 왜 자신한테 물어본단 말인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것이냐? 설마 내가 네 스승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었다·
물어보더라도 미친 분신한테 물어봐야지 본인한테 물어보다니·
자신이 햄스터가 되어서 우리에 갇혀 있을 때 뭐 하나 도와준 적 없는 놈이?
‘포도는 주긴 했지만·’
“아· 왜 이러십니까· 서로 협력해야 이 위기를 빠르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탈출도 스승님이 제정신이어야 하지, 지금처럼 폭군 상태에서는 마법도 못 풀잖습니까·”
이한은 누가 폭군의 제자 아니랄까봐 햄스터의 상태를 날카롭게 파악하고 아픈 구석을 찔렀다·
원래 햄스터의 계획은 미친 분신을 일시적으로 추방시킨 뒤 자신을 묶은 마법이 사라지면 그 틈을 타 도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친 분신이 추방은커녕 반전된 상태로 더욱 강렬하게 날뛰고 있었으니, 묶인 마법이 풀릴 리 없었다·
더 최악인 건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결국 야차왕이 밀려서 역소환된 뒤 미친 분신이 주도권을 잡으리라는 사실이었다·
미친 분신이 주도권을 잡으면 놈의 제자는 최소한 사령관 역할이라도 하지 노예로 잡혀 있는 햄스터는 제물로 바쳐질 수도 있었다·
‘앞으로 새 마법범죄자 놈들이 사악함을 자랑하면 팔과 다리를 뒤바꿔서 붙여버려야겠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법범죄자들의 기준을 한층 더 올린 이한에게, 햄스터가 물었다·
-그걸 잘 아는 놈이 지금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설마 남은 시험들을 다 보고서 폭군을 상대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것만 제출하면 시험은 대충 다 봤습니다· 미리 봐놨거든요·”
-······
‘앞으로 새 마법범죄자 놈들이 계획성을 자랑하면 입을 꿰매버린다·’
* * *
이한이 과제를 제출하고 있는 동안 가르시아 교수와 볼라디 교수는 진지하게 마법 토론을 시작했다·
“<고나달테스의 영락> 마법은 정말 특이한 마법이네요· 찾아보니 고대에는 이걸 공격용으로 썼다고 하더라구요·”
“그렇소· 안타까운 일이지·”
“교수님께서는 이 마법에 관심 없으세요?”
볼라디 교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투 마법사로서 많은 경험과 이론을 정립한 교수였기에 오히려 새로운 마법을 고르는 데에는 까다로웠다·
“전투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소·”
삼왕국 시절 흑마법사들은 이 마법을 개량해서 공격용으로 썼다지만, 볼라디 교수가 보기에는 비효율적이었다·
애초에 이 마법은 다른 자의 쇠락을 자신에게 가져오기 위해 시작된 만큼 이걸 공격용으로 쓰려면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긴 그렇죠· 게다가 워낙 조건이 까다로우니··· 그 분이 말한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기서 말한 ‘그 분’은 당연히 야차왕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한에게는 ‘그 놈’이나 ‘그 새끼’로 불릴 가능성이 높았지만, 가르시아 교수가 보기에 야차왕은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외차원의 존재였다·
인연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일에 이렇게 전력으로 나서는 존재는 흔치 않았다·
“아마 맞을 거요·”
“으음· 역시 그런가요·”
가르시아 교수는 가볍게 신음소리를 냈다·
지금 둘이 고민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실 야차왕은 영락을 해결책으로 권하면서 이한을 강하게 추천했었다· 가볍게 권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 * *
-흐음· 내가 보기에는 오수의 제자가 시전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군·
-이 마법이라면 저나 배그렉 교수님도 충분히 익힐 수 있는데요?
-마법을 익히는 것이라면 충분하겠지· 하지만 이 마법의 정수는 단지 익히고 시전하는 것에 있지 않다·
야차왕은 자신이 아는 만큼 마법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단순한 고통이나 상처, 저주 같은 것들은 마법을 익히고 시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옮길 수 있었다·
그런 건 일개 마법사들도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는 개념이었으니까·
하지만 옮겨야 하는 게 대마법사의 오래된 비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옮기려는 마법사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고, 혹은 이해했다 착각하더라도 피상적으로만 아는 상태라면···
-여기 오수가 순순히 내줄 리 없지 않나·
두 교수는 야차왕의 말에 담긴 뜻을 깨닫고 전율했다·
이렇게 들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까다로운 일이었다·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듣는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까’라고 분노하겠지만, 원래 마법은 이론과 숫자, 도식으로만 구성되어 있을 때 가장 쉬운 편이었다·
여기에 영혼과 혼백을 느끼고 신념과 의념을 넣는 순간부터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운이 없으면 닿지 못하는 영역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젊은 시절 해골 교장의 신념을 깊이 이해해서 시전해야 한다니·
···그게 말이 되나?
-그냥 죽이면 안 되나요?
-흐음· 내가 보기에 너는 실로 파괴적이고 전투적인 게, 이 영지의 경비대장이자 수호자 역할을 맡고 있겠군· 그러나 안 된다·
-······
괜히 말 한 마디 꺼냈다가 창피해진 가르시아 교수는 입을 다물었다·
볼라디 교수는 묵묵히 듣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교장 선생님을 이해해보겠소· 깨워주시오·
-흐음· 혹시 오수와 친한가?
-어··· 음··· 그··· 친하긴 한데···
가르시아 교수는 고민했다·
볼라디 교수가 해골 교장과 친분이 꽤 있는 편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교수들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걸 친하다고 해도 되나?
-알겠다· 잠깐 깨워보도록 하지· 모두들 조심하도록·
야차왕은 붙들린 채 눈을 감고 있던 미친 분신을 깨웠다·
정지된 의식에서 깨어난 미친 분신은 심드렁하게 물었다·
“항복 선언을 하러 왔나· 야차의 왕·”
-아니· 여기 마법사가 자네를 이해해보겠다고 하는군·
“꺼져라·”
그 말을 마치고 미친 분신은 다시 의식을 정지시켰다· 야차왕의 힘이 풀릴 때까지 기운을 비축시키기 위해서였다·
-실패했군·
볼라디 교수는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가르시아 교수는 자신이 더 민망해서 급히 위로했다·
-교, 교장 선생님이 젊은 시절이라서 그래요· 최근이었다면 들어주셨을 거예요!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지금 오수는 명예에 강하게 얽매인 상태지· 외부인의 말은 잘 듣지 않을 거다· 그냥 오수의 제자에게 맡기는 게 좋지 않겠나?
-저기· 야차왕께서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이한 학생은 아직 경험이 적은 마법사거든요·
-흐음· 분명 그 마법사는 저번에 객성과 계약할 만큼 능력을 보여줬었는데··· 지금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혹시 제자에게 과거의 자신을 투영했기 때문에 과보호하는 것인가?
-아, 아니거든요! 무슨!
-흐음· 화를 내는 걸 보니 방금 추측에 더 힘이 실리는군· 여하튼 오수의 제자한테 맡기는 걸 다시 한 번 권하겠다· 방금 대화를 말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유도하도록· 알게 되면 괜히 더 부담감을 느낄 수 있으니·
* * *
“그래도 어떻게든 제가 이해해볼 수 있을지도요?”
볼라디 교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가르시아 교수는 이한에게서 필요한 정보만을 얻은 뒤 본인이 직접 영락을 시전하고 싶어 했지만, 원래 스승과 제자 사이의 유대는 다른 외부인이 쉽게 따라하기 힘든 법이었다·
대부분의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볼라디 교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이한은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스승에 대한 신뢰 덕분이었다·
저 미친 분신도 마찬가지리라·
“끄으응···”
배그렉 교수가 동의 대신 부정적인 대답을 연신 돌려주자 가르시아 교수는 침음성을 흘렸다·
고민하고 고민하던 가르시아 교수는 결국 체념의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요· 만약 이한 학생이 해결해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해시켜야 하죠? 솔직히 교장 선생님의 분신이 하는 사고방식을 따라가는 건 쉽지 않잖아요·”
세상의 고통이 마음에 들지 않기에 자신이 직접 정복해 통치하겠다는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았다·
만약 이한이 즉시 이해했다면 가르시아 교수는 그 다음날부터 이한을 조금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것 같았다·
“계속 생각해봤소·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시간 마법 같군·”
“시간 마법이라니··· 아!”
가르시아 교수는 자신의 전공을 이야기하는 배그렉 교수의 모습에 의아해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시간 마법은 꼭 현재의 시간을 잡아당기고 뒤트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과거의 시간을 엿보는 것도 거기에 해당됐다·
경험과 체험만큼 이해를 도와주는 것도 드물었다·
게다가 마침 가르시아 교수에게는 지금 상황에 적합한 유물이 있지 않은가·
“<카이로스의 셉터>를 사용하면 과거를 직접 엿보고 체험할 수 있어요· 저와 교수님도 같이 동행해서 이한 학생을 보조해주면 되겠네요·”
“···가르시아 교수도 말이오?”
볼라디 교수는 살짝 걱정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가르시아 교수는 평소 마법 전투를 연습하지 않은 걸 후회하며 외쳤다·
“준, 준비 많이 하고 가면 괜찮아요! 미리 대비해놓으면 전투가 벌어져도 충분히 막을 수 있어요·”
볼라디 교수는 여전히 망설였다·
가르시아 교수는 심성이 선량하고 손속이 독하지 못해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사람이었다·
실존하는 과거를 엿보는 건 다른 차원을 방문하는 것과 비슷해 싸워야 할 때는 과감히 싸워야 하는데···
고민하던 볼라디 교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한테 가르시아 교수의 호위를 맡기면 될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내가 감사할 일이오·”
* * *
-만점, 만점입니다, 이한 학생! 정말 대단해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헉· 무슨 틀린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에요· 이한 학생! 그냥 왜 이렇게 고풍스럽게 글을 썼는지 궁금해서요· 정말 나이 많은 노인 같은 말투네요· 꽤 가볍게 쓴 예문이거든요· 혹시 요즘 나온 사전이 아닌 오래된 사전을 썼나요?
-······
만점을 받고 다시 두 교수에게 돌아가며, 이한은 연신 투덜댔다·
“해석을 이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
짜증이 가득 난 햄스터는 우리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톱밥 속에 몸을 파묻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