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8화
‘제국에 이런 마법사도 있구나·’
에인로가드 출신 학생들은 이런 착각에 빠지기 쉬웠다·
-그래도 우리 학교 놈들만 이런 거지 졸업하고 만나는 마법사들은 좀 덜 짐승 같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이 졸업하게 되면 현실을 알게 됐다·
제국의 마법사들도 대체로 다 인성이 썩 좋지 않은 것이다·
최근 밖에서 만난 마법사들에게 당하기만 한 코홀티에게 스테달의 친절은 깊은 감동을 안겨줬다·
무시무시한 전투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스테달은 코홀티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코홀티는 더더욱 감격했다·
‘···이 사람· 눈치가 없나?’
스테달 아니 이한은 속으로 황당해했다·
기껏 도와주려고 이렇게 와서 말하고 있는데 그걸 이용해먹지 못하고 저렇게 헤벌쭉하고 있다니·
만약 이한이었다면 백작과 조카한테서 지원금은 물론이고 앞으로 침입해도 되는 귀족 명단 목록까지 받아냈을 것이다·
차라리 디레트 선배한테 설명할 때 같이 설명했어야 했나 싶었다·
‘아니다· 이 사람 알려줬으면 절대 표정 유지 못했겠지·’
이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만든 가짜 신분이었지만 점점 이 가짜 신분이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까 저택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추종자 비슷한 무리들이 발견하고 다가와 환호성을 터뜨린 건 정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이었다·
-나고 님! 나고 님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이쪽을 봐주십시오! 나고 님! 다음 항해에 저희도 꼭 데려가주십···
아무리 생각해도 인기가 너무 올라갔다 싶어 이한은 거칠게 대응했다·
초대를 받은 다른 귀족의 저택에서 무례하게 굴면 평판은 바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으니까·
-흥· 길을 막지 말고 비켜라·
-예 예! 비켜드리겠습니다! 너희 비키지 못해!
그러나 그런 무례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더욱 열광할 뿐이었다·
몇몇 깨어 있는 똑똑한 사람들이 그 무례를 지적하려고 했지만 집단광기에 휘말려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건 아무리 그래도 무례하ㅈ···
-지금 백작께서 손수 초대하신 현 제국 남부의 가장 유명인사인 나고 가문의 스테달 님을 모욕하려는 것인가!!
-아··· 아닙니다·
‘···망했군·’
아무에게나 주먹을 날려도 칭찬해줄 것 같은 광신적인 분위기에 이한은 사람들의 열기가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이한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들키지 않는 것!
‘들키면 워다나즈 가문으로 습격 오는 거 아니야 이거?’
“저를 깨우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우 백작의 젊은 조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파티의 다른 장소에서는 그렇게 어깨에 힘 주고 거들먹거리던 놈이 저러자 이한은 더더욱 심란해졌다·
그냥 여기서도 거들먹거리면 안 될까?
“···흥· 별 것도 아니지·”
“저도 꼭 나고 님처럼 버두스 교수를 붙잡을 겁니다·”
조카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훌륭한 조카를 두셨습니다· 백작님·”
“암· 백작이 받은 모욕은 가문 사람이 갚아줘야지!”
“···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코홀티는 당황해서 물었다·
백작의 조카가 드러내는 버두스 교수를 향한 적대심은 거의 에인로가드 학생들에 버금갔다·
옆에서 오렌지 펀치를 홀짝이던 드워프 손님이 대신 설명해줬다·
“마법사 비블레 버두스가 자우 백작을 속인 적이 있었지· 그것도 세 번이나·”
너그럽다는 평가에 걸맞게 자우 백작은 마법사들에게도 관대함을 보여주었다·
그 덕을 톡톡히 본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버두스 교수였다·
-내가 마법 연구를 하려고 하는데 제국 금화 만 개가 필요합니다·
-알겠소· 가져가시오·
-아니· 백작님! 저 마법사를 아십니까?
-모른다· 하지만 저 마법사는 필시 비범한 사람이 분명하다· 원래 연구를 위해 금화를 빌리러 오는 마법사들은 교활하고 비굴한데 저 자에게는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당당함이 있지 않느냐· 또한 차고 있는 아티팩트들도 하나 같이 뛰어난 물건들이었으니 결코 범상한 마법사가 아닐 것이다·
-과연···!
이렇게 제국 금화 만 개를 가볍게 뜯어낸 버두스 교수는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두 번 더 찾아와 받아냈다·
그리고 결과로 보상하는 대신 에인로가드 영지로 틀어박혀서 은둔해버렸다·
“백작에게 은혜를 받은 사람은 물론이고 백작의 친족들은 다 이를 갈고 있지·”
‘음· 백작도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이한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그렇지 버두스 교수를 뭘 믿고···
귀여운 외모 때문에 줬나?
“나고 님!”
“?”
갑자기 누가 부르는 소리에 이한은 깜짝 놀랐다·
혹시 속마음이 들킨 것일까?
“송 송구하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나고 님께서 아까 의뢰하신 맹독과 저주를 혹시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
뭔 소린가 했더니 아까 저택 밖에서 만난 손님이었다·
디레트와 쑥덕거리는 걸 보고 ‘헉! 적들에게 사용할 맹독이나 저주를 찾고 계셨던 겁니까!’하고 오해했던 사람·
보아하니 그걸 버두스 교수한테 쓰려고 새로 의뢰한 줄 아는 것 같았다· 이한은 오해를 풀려고 했다·
“그게···”
“그 그런 의뢰를! 부디 저한테도 알려주실 수 없으십니까?”
백작의 조카는 반색하며 외쳤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이 산전수전 다 겪은 거친 전투 마법사가 한 번의 너그러움을 보여주길 기대하는 눈빛으로 간절히 쳐다보았다·
원래 사냥꾼들은 자신의 비법을 공개하지 않는다지만 이 자리를 마련하고 초대한 백작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군·”
분위기에 압도당한 이한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에인로가드 흑마법 학파 학생들을 불러오도록·”
“오오오!”
“에인로가드 흑마법 학파였나!”
* * *
홀 구석에서 테이블 격구를 즐기고 있던 흑마법 학파 학생들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당황했다·
“혹시 코홀티 선배가 사고친 거 아니야?”
“야· 코홀티 씨라고 해· 누가 오해하겠다·”
“다들 조용· 일단 가도록 하자·”
디레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후배들을 데리고 이동했다·
일단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긴 했지만 영문을 모르는 건 다름이 없었다·
‘무슨 상황이지?’
백작이 있는 곳에 도착한 디레트는 좌중의 반응에 더더욱 당황했다·
사람들이 기대와 선망이 가득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흑마법 학파 마법사는 이런 눈빛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후배들도 당황했는지 속삭였다·
“다른 학파랑 착각한 거 아니에요?”
“치유 마법 학파랑 착각한 거 같은데···”
“어서 오십시오!”
백작의 조카가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생각보다 예의 바른 모습에 학생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조카가 망나니라고 들었는데 아닌가?’
‘코홀티 씨가 뭘 알겠냐고·’
속으로 코홀티를 욕하며 학생들은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여러분들이 독과 저주의 전문가라고 들었습니다·”
“그렇··· 긴 하죠?”
독과 저주의 전문가라고 하면 보통 흑마법 학파나 치유 마법 학파였다·
“누가 아픈가요? 근데 아프면 치유 마법 학파를 부르시는 게···”
흑마법 학파 학생들도 물론 독이나 저주 제거는 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의 생명은 보장할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누가 아픈 게 아니라 독과 저주를 의뢰하고 싶은 겁니다!”
“···”
“···그 그게· 제국법 때문에 합당한 목적 없이는 구매하실 수 없습니다만·”
드워프 학생 디림파가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사실 흑마법사들이 인기 있을 때가 가끔 있긴 했는데 그건 바로 범죄를 계획하는 사람들한테서였다·
가문의 누군가를 제거하고 재산을 뺏고 싶을 때 가장 의지가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당연히 돈 된다고 멋대로 맹독이나 저주를 팔면 안 됐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합당한 이유가 있으니까· 제국에 제출해도 좋소· 나는 비블레 버두스를 제압하기 위해 독과 저주를 구매하려는 것이오·”
백작의 조카는 뜨겁게 말했다·
그리고는 여기 있는 스테달 나고가 에인로가드 흑마법 학파 학생들에게 맹독과 저주의 제조 의뢰를 맡긴다는 걸 알고 있다고 외쳤다·
“그랬습니까?!”
“디레트 선배 의뢰인가봐· 역시 선배님이셔·”
흑마법 학파 후배들은 존경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역시 학파의 제일가는 수완가였다· 언제 저런 의뢰를 받아냈단 말인가·
저 정도 명성의 마법사라면 의뢰비도 두둑하겠지?
“···”
디레트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후배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한은 변장한 와중에도 죄송해죽겠다는 감정을 눈빛만으로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비전문가도 사용할 수 있는 독이라면 일단 아흐락의 독이 어울릴 겁니다· 붉은 독이나 푸른 독은 무기에도 바르기 좋을 거고요·”
디레트는 말하면서도 회의적이었다·
독의 성능과 별개로 버두스 교수는 이런 부분에서 방비가 생각보다 철저한 편이었다·
해독이나 해주 아티팩트를 주렁주렁 갖고 다니는 사람이라 어지간한 건 다 통하지 않을 텐데···
‘이건 어떻게 생각해 후배?’
‘그건 사간 사람이 생각해야죠·’
이한은 냉정했다·
독하고 저주 알려줬으면 됐지 그걸로 버두스 교수 잡는 방법까지 가르쳐줘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 방법은 이한도 몰랐다·
“···”
야!
디레트가 황당해하는 사이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흑마법사 여러분들· 저도 의뢰를 맡겨도 되겠습니까? 저도 버두스 교수를 붙잡을 때 써보려고 합니다·”
“괜찮다면 나도 의뢰를 받아주시오! 값은 섭섭잖게 치르겠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반쯤 최면에라도 걸린 듯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독을 사지 않으면 나중에 버두스 교수를 만나더라도 붙잡지 못할 거라는 최면에!
“잠· 잠깐· 다들 진정하고 침착하게 생각해보시죠· 버두스 교수님도 독의 전문가인데 어떻게 쓸지는 생각하고 의뢰하시는 겁니까?”
디레트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이성적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근거 없는 자신감에 취해 있었다·
“나고 가문의 스테달 님이 한 번 성공했으니 분명 먹힐 거요·”
“실패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의뢰를 받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흑마법 학파 후배들은 재빨리 종이를 꺼내 사람들의 이름을 받아 적었다·
모처럼 온 이런 기회를 그냥 날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흑마법 학파의 맹독을 또 언제 이렇게 비싸게 팔겠는가?
“아니··· 야··· 다들··· 에휴·”
후배들한테 사람들을 속이지 말라고 하려던 디레트는 입을 다물었다·
다들 너무 행복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파 후배들이 언제 또 이렇게 열화와 같은 의뢰를 받겠는가·
사람들이 사간 독은 버두스 교수한테는 통하지도 않고 무효화되겠지만 그래도 후배들에게는 매우 큰 도움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이 촌극도 그냥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게 무슨 소란이요?”
“나고 님이 비블레 버두스를 제압할 때 썼던 독을 알려준다는군·”
“세상에! 그걸 왜 지금 말하는가!”
소문을 듣고 뒤늦게 찾아온 손님들까지 흑마법 학파 학생들 앞에 줄을 섰다·
이한은 그 혼란을 틈타 슬쩍 속삭였다·
“디레트 선배·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썩 괜찮지 않습니까?”
“저리 가시지· 나고 가문의 스테달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