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7화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너 누구야?”
“!?”
선배의 매몰찬 태도에 이한은 깜짝 놀랐다·
혹시 유크벨티레 선배가 변장한 건가?
‘아· 아니군·’
생각해보니 지금 변장한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스테달의 신분을 모르는 디레트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 이한입니다· 선배· 흑마법 학파 후배요·”
“···”
디레트는 순간 ‘난 그런 후배 없어’라고 말할 뻔했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단 말인가?
“···뭘 하고 있는 건데?!”
“그게 이야기하자면 좀 깁니다만·”
이한은 있었던 일을 최대한 간추려서 설명했다·
그러니까 클럽 소속 학생들을 빼돌리기 위해서 가짜 신분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게 은근히 유용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은근히 유용하단 말로 넘어갈 수준이 아닌데·’
디레트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에인로가드 5학년 학생답게 정신을 집중했다·
아직 다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요점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후배가 만든 스테달 나고란 신분이 있는데 대충···
1· 제국 남부의 해적들한테 붙잡혀 있다가 탈출한 적이 있다·
2· 해적들의 보물지도를 훔쳐 크게 재산을 모았다·
3· 뼈살이꽃 투기 파동 때도 오히려 재산을 늘렸다·
4· 악신숭배자 토벌에 참가한 적이 있다·
5· 그랑덴 시의 탐욕스러운 부자들을 습격한 적도 있다·
6· 버두스 교수의 물건도 약탈한 적이···
‘혹시 후배가 나 몰래 졸업했나?’
요점을 이해해도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걸 다 언제 했나 싶었던 것이다·
“저걸 다 직접··· 한 거야?”
“예? 당연히 아니죠· 몇 개는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이 속아서 소문을 퍼뜨린 거죠·”
“아하·”
디레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멈칫했다·
몇 개는 거짓말이라면 다른 몇 개는 진짜 했다는 거잖아?!
“선배도 나중에 필요하실 때 이 가명 쓰셔도 됩니다· 자세한 인적 사항 적어드릴까요?”
“아 아니· 괜찮아· 마음만 받을게· 그보다 여긴 왜 온 거지?”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한은 최근 우연히 자우 백작한테서 초대를 받았고 그걸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어떤 일로 초대를 받은 거지?’
디레트는 초대를 받은 이유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물어봐야 할 다른 질문들이 많았다·
“후배· 네가 실제로 저지른 일들하고 그걸로 원한 가진 사람들· 그리고 만난 사람들 좀 다시 말해봐· 조심해야 할 부분들 정리해서 알려줄 테니까···”
지금 디레트가 가장 걱정하는 건 후배 정확히는 후배가 만든 가짜 신분을 미워하는 적들이었다·
최근에 저렇게 여러 일들을 저지르고 화제에 올랐으니 탐탁찮게 여기는 이들이 제국에 제법 생겨났을 터·
적이라는 게 꼭 불구대천의 원수만 적이 아니었다· 시기하고 의심하며 발목을 잡으려는 이들도 적이었다·
자우 백작은 그 인맥이 넓은 만큼 온갖 부류의 손님들이 저택에 있을 테니 미리 주의해둬야 했다·
“나고 님!”
뒤에서 도착한 귀족 한 명이 이한을 발견하고 크게 인사했다·
“초대에 응하셨군요· 정말로 기쁩니다! 오늘 비ㅂ··· 아니 버두스 교수 사냥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다면 정말로 기쁘겠습니다!”
“하· 기대해도 좋겠지·”
‘미쳤어?!’
디레트는 후배의 무례한 태도에 대경실색했다·
여기가 무슨 에인로가드도 아니고 초대 받고 온 저택 앞에서 다른 귀족에게 저런 태도를 취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으하하하! 역시 나고 님이십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러나 상대 귀족은 그런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오히려 좋아하며 웃었다·
이래야 버두스 교수를 약탈할 만큼 거칠고 사나운 마법사 아니겠는가!
“참· 이 분들은···?”
“에인로가드 흑마법 학파다·”
“과연· 적들에게 사용할 만한 지독한 맹독이나 저주를 찾고 계셨군요·”
“큭큭· 그렇지·”
“···”
디레트는 황망한 눈빛으로 ‘그렇긴 뭘 그래!’라고 말했다·
흑마법사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면 다 사악한 이야기인 줄 아나!
“그럼 안에서 뵙겠습니다!”
귀족이 멀어지자마자 이한은 즉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됐어· 누가 들을 수 있으니까 목소리나 좀 줄여·”
디레트는 살짝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흑마법 학파에 대해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둘도 아니었고 이제 와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보다 후배의 가짜 신분이 지나치게 인기가 좋은 게 더 신경 쓰였다·
“나고 님! 오셨군요!”
“나고 님· 부디 제 조카에게 축언을! 나고 님 같은 마법사가 되라고 해주십시오!”
진짜 왜 이렇게 인기가 좋지?
* * *
“소문 들으셨습니까? 저 나고 가문의 마법사는 무려 비블레 버두스를 쓰러뜨리고 보물을 약탈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한 마법사로군···! 제국에 저런 영웅이 있었다니!”
“···”
저택 안에 들어온 디레트는 바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쩐지 버두스 교수 이야기할 때 목소리가 살짝 작아지더라·’
어쨌든 그런 거라면 인기가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버두스 교수에게 원한을 가지고 벼르는 이들은 많아도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그들에게 후배는 선망의 대상처럼 보일 터였다·
“대체 어떻게 뼈살이꽃 투기 파동 때 재산을 늘릴 수 있었던 걸까요?”
“그게 바로 지혜지·”
“···”
아닌가?
디레트는 자신이 잘못 판단했나 싶었다·
어쩌면 다른 요소들이 인기의 이유일지도···
“큭· 백작님은 저런 무례한 자를 왜 초대하신 거지?”
“이보시오· 나고 가문의 스테달 님은 무례한 게 아니라 제국 남부 해적들한테 붙잡힌 적이 있어서 경계심이 강한 것뿐이오· 오히려 훌륭한 전투 마법사라는 증거지·”
“맞아 맞아! 백작께서 지금 사람을 잘못 알아보고 초대했단 소리인가!”
어쩌다가 후배의 인기를 시기하고 트집 잡으려는 사람이 나와도 사방에서 나오는 맹공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귀족 모임에 이 정도로 광신도들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정말로 흔치 않았다·
‘후배 얘 대체 뭐하고 다닌 거야···?!’
“디레트· 디레트· 나 좀 봐줘· 안 이상하지? 너희들도 봐봐·”
친구의 복잡한 속마음도 모르고 코홀티가 말을 걸어왔다·
자우 백작에게 찾아가 사죄를 해야 하는 만큼 먼지 하나도 옷에 붙어있으면 안 됐다·
“나 지금 바쁘니까 다른 후배들한테 봐달라고 해·”
“왜 바빠? 무슨 일이 있다고?”
코홀티는 친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테달 나고가 누군지 모르는 만큼 당연한 반응이었다·
“저기 마법사 보여?”
“아· 뼈살이꽃 투기 파동 때 재산 늘린 나고 가문의 마법사? 나중에 내 연구에 투자해달라고 부탁해보려고·”
코홀티는 상대의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해맑게 말했다·
그리고는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디레트를 쳐다보았다·
“너도 투자를 받으려는 거지! 어쩐지! 아까 이야기를 나누던 게 설마···?!”
“···아냐· 됐다·”
“야· 디레트 너하고 비교하면 내 연구가 구려보이잖아·”
코홀티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안 그래도 같은 흑마법 학파가 겹치는데(다른 마법 학파와 달리 흑마법 학파는 겹치면 둘 다 투자 받기가 힘들었다) 디레트와 비교하면 코홀티의 저주 전문 연구는···
“그런 거 아니라니까· 백작님 만나는 일에만 집중해·”
“아 알겠어· 뭐 이상한 거 없지?”
디레트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후배들은 냉정했다·
“망토가 좀 싸구려 같아요· 에인로가드에서나 입을 것 같습니다·”
“팔찌 바꾸는 게 어떻습니까? 누가 봐도 흑마법 학파 출신 같아서 좀···”
“너희들한테 물어본 내가 머저리지· 됐다· 갔다 올 거야!”
코홀티는 후배들한테 성을 낸 다음 돌아섰다· 마음 같아서는 아까 돌린 아이스크림도 돌려받고 싶었다·
‘후· 긴장하지 말자·’
제국 수도에 위치한 자우 백작의 저택은 은은하면서도 세련된 멋을 자랑했다·
파티가 열리는 홀을 장식한 아티팩트들과 가구들은 모두 다 수십 년은 되어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집 하나 없이 고색창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품위를 드러냈다·
이런 식으로 허세를 부리지 않고 품격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제국에도 급히 재산을 긁어모은 졸부들이 제법 있었지만 이들이 급히 하인을 고용하고 사람을 초대해봤자 뒷말만 나왔지 감탄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잘 아는 코홀티인 만큼 더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상대가 허세 부리는 졸부였다면 좀 더 마음이 가벼웠을 것 같았다·
“백 백작님·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시게! 황무지 별잡이 소속 마법사인가?”
“예 예· 에인로가드 출신 황무지 별잡이 마법사 코홀티라고 합니다·”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젊은 인재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영광일세·”
인자한 노백작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에인로가드 출신에 황무지 별잡이 소속으로 일하고 있다면 정말로 사명감 투철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가 그런 고생을 자처하겠는가?
진심을 느낀 코홀티는 울컥 감동했다·
“감사합니다! 저 또한 영광입니다·”
“혹시 이 늙은이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는가?”
자우 백작은 그 인성만큼이나 식견도 뛰어났다· 상대 마법사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 그게 말입니다·”
긴장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코홀티는 본론을 꺼냈다·
황무지 별잡이로서 일하다가 사명감 때문에 살짝 실수를 하나 했는데···
“백작님의 가문인 만큼 사과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하·”
노백작은 그 안에 담긴 말뜻을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말이야 사과하려고 찾아온 것이지만 사실은 중재를 부탁하려고 찾아온 게 분명했다·
“알겠네· 알겠어· 그건 분명히 조카 녀석의 잘못이지· 위험한 물건이라고 별잡이들이 경고했는데 버리지 않다니·”
“백작님···!”
“마침 조카 녀석이 여기 와있으니 부르도록 하겠네·”
백작은 작은 종을 흔들어 조카를 불러오라고 명했다· 코홀티는 감동과 안심에 젖어 태평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찾아온 조카의 반응은 예상과 정반대였다·
“싫습니다·”
“!!”
늙은 백작이 노한 얼굴로 조카를 노려보았다·
평소 방탕한 생활로 속을 썩이던 녀석이긴 했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고집을 피우며 체면을 깎아내릴 줄이야·
“뭐라고? 다시 말해보거라!”
“숙부님은 왜 언제나 다른 가문 사람들 편만 들어주시는 겁니까! 저 마법사는 제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물건을 부수려고 했다니까요!”
“···”
코홀티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에인로가드에서는 원래 그런다고 해봤자 역효과겠지?’
백작의 조카는 씩씩대며 코홀티를 노려보았다·
“내가 살 때 낸 돈의 절반이라도 보상받고 싶다고 하니까 그것도 거절했었지!”
“아 아니· 별잡이 예산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아서···”
“그 말이 맞네· 어서 사과드리거라! 스스로 희생하며 제국을 위해 일하는 분에게 무슨 무례냐!”
“흥!”
백작의 말에도 조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해주기는커녕 백작 가문 내에서 새 문제가 일어날 것 같자 코홀티는 조마조마해졌다·
“무슨 일이지?”
그 때 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홀티 같은 마법사도 최대한 단정하게 차려 입고 참석한 이 모임에서 유일하게 방랑자처럼 차려 입은 마법사 스테달 나고였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작의 조카는 동경하던 사람한테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마냥 펄쩍 뛰었다·
“저쪽으로 가시죠! 아까 해적들 이야기나 더 들려주십시오!”
“버두스 교수를 무릎 꿇릴 만큼 강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범해야 한다·”
스테달은 사나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가볍게 내뱉은 말이었음에도 홀 안을 쩌렁쩌렁 진동시키는 기분이었다·
“사악한 물건을 박살내줬다면 대범하게 감사를 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누가 너하고 같이 버두스 교수를 잡으러 가겠나?”
“···맞는 말씀이십니다···!”
백작의 조카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코홀티에게 시선을 돌려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욕심 때문에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아 아니· 아닙니다· 저도 너무 서둘러서···”
코홀티는 감동 가득한 눈빛으로 스테달을 쳐다보았다·
이 마법사 정말 멋있는 사람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