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6화
‘이런 무례한 사람들 같으니·’
아무리 연락할 방법이 없다지만 왜 알시클을 괴롭힌단 말인가?
“그래서 뭘 했는데?”
알시클은 이미 스테달 나고의 이름으로 뭔가 했다는 건 확정하고 있었다·
“제가 안 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냐·”
확고한 믿음·
물론 시간을 따져보면 최근 이한이 무언가 할 여유가 없긴 했다·
방학 동안 차원 바깥의 공허에서 온 괴수를 사냥하거나 다른 마법학교를 방문해서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사악한 용에게 납치당하거나 악신숭배자들을 토벌하거나 했던 것이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이 자식 왜 방학인데 이러고 있지?’
알시클은 갑자기 근본적인 의문에 빠져들었다·
학생이라면 조금 더 산뜻하고 쾌청한 방학을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에인로가드 학생인 이상 한계는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워다나즈의 방학은 너무 교수 밀도가 높았다·
“사실 한 게 있습니다·”
이한은 포기하고 실토했다·
“언제 뭘 했는데?”
“어제 밤에 스테달 나고 신분으로 돌아다녔습니다·”
“···뭐!? 언제!?”
알시클은 경악했다·
최근에 뭔가 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어제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2층에서 소형 범선 개조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테스트 때문에 잠깐 띄웠습니다만··· 그런데 버두스 교수님은 저희가 다 사라졌는데 위화감 안 느끼셨습니까?”
“느꼈겠냐?”
‘하긴 그렇군·’
이한과 일행이 2층에서 작업하고서 공중 비행까지 하는 동안 버두스 교수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자신의 작업에 푹 빠져있었다·
두 마법사가 갔다는 말을 듣고서도 ‘그래? 그럼 이것만 끝내고 돌아가야겠다’라고 말할 만큼·
물론 기사들은 냉정했다· 바로 버두스 교수의 뒷덜미를 잡은 뒤 마차에 처넣고 에인로가드로 출발했다·
“그보다 버두스 교수가 돌아가서 아쉽게 됐단 말이지·”
“예!?”
설명하던 이한은 알시클의 말에 깜짝 놀랐다·
혹시 마법 오염 현상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그래도 버두스 교수가 여기 있어야지 볼라디 배그렉이 나 대신 버두스 교수부터 공격할 거 아니야·”
“과연·”
이한은 감탄했다·
역시 천재 마법사의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저런 계산을?
“그래서 비행선을 몰다가 사람들이 몰려와서 스테달 나고라고 했단 거지?”
“네· 사람들이 조금 과하지 않습니까?”
“나도 버두스 교수 물건 뺏은 마법사 있다고 하면 궁금해서 찾아가볼 것 같은데···”
“···”
알시클은 진지했다·
영구동토(永久凍土)의 마법을 완성한 마법사와 버두스 교수의 물건을 강탈한 마법사가 있다면 후자부터 만나보고 싶을 정도였다·
“다 답장해주는 건 무리겠지만 전부 무시할 수도 없을 거야· 이 중 괜찮은 초대 한두군데만 응하는 건 어떠냐?”
“저는 전부 무시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이한의 대답에 알시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설명해줬다·
“앞으로도 이 성의 없는 가명을 계속 쓸 생각 같은데 그런 거라면 초대를 다 무시해서 좋을 게 없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테니까·”
“성의 없는 가명이라뇨·”
항의는 가볍게 무시하고 알시클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뛰어난 위업을 세운 마법사를 초대할 때는 그에 맞는 제안과 선물을 준비하기 마련이다· 제안은 거절하더라도 선물은 너도 탐날 텐데?”
교수의 보물을 훔친 걸 위업이라고 하니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알시클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자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선물을 받을 수 있다니·
‘확실히 내 성향과 맞긴 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뭡니까?”
“가서 나하고 그렇게 친하지 않다고 말 좀 해줘라···”
하룻밤 사이에 편지로 뒤덮여 죽을 뻔한 알시클의 목소리는 애절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디레트· 그런데 괜찮냐?”
코홀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있는 에인로가드 흑마법 학파 학생들과 달리 코홀티는 졸업생의 신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학년 친구가 괜히 더 걱정되는 게 있었다·
“뭐가?”
“그 친구하고 안 만나고 여기 후배들만 계속 챙겨줘도 되나 싶어서·”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흑마법 학파 후배들에게서 반발이 튀어나왔다·
“우리들이 뭐가 어때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생각해보니 이제 선배도 아니잖아? 코홀티 씨· 당신 여기 왜 있어? 일하던 곳이나 가지!”
‘이런 나쁜 자식들·’
코홀티는 속으로 울컥했다·
물론 재학 도중에도 코홀티가 든든한 선배는 아니긴 했다·
그래도 나름 디레트가 시키는 대로 후배들 도와주고 그랬는데 은혜를 이렇게 갚다니·
“친구 누구?”
디레트는 의아해했다·
코홀티가 누굴 말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황녀님 말하는 거 아닙니까?”
“유크벨티레 선배님이겠죠·”
후배들한테 바로 답이 튀어나오고 코홀티도 고개를 끄덕이자 디레트는 경악해서 대답했다·
“걔가 여기서 왜 나오는데?!”
“어 어? 둘이 엄청 친하잖··· 아 아닌가?”
흑마법 학파 학생들은 머뭇거렸다·
“엄청 친하진 않··· 끄응··· 친하지도··· 그래· 친하긴 한데 내가 방학 때까지 걔를 만나고 싶어 하고 그런 건 절대 아니거든? 오히려 안 만나서 속이 시원하거든?”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잘 챙겨주시지 않나?”
“원래 선배님이 좀 정이 많으시긴 해· 저번에 그 못생긴 언데드도 불쌍하다고 계약해주시더라·”
후배들이 수군거리자 디레트는 발끈했다·
“안 못생겼어· 조용히 해·”
“죄송합니다·”
“그리고 유크벨티레도 자기 할 일 때문에 바쁠 거야· 알겠어? 모처럼 안 만나서 편한데 불길한 소리 좀 하지 마· 난 후배들하고 같이 움직이는 거에 어떤 불만도 없으니까·”
디레트의 말에 후배들은 일제히 코홀티를 공격했다·
“맞습니다· 선ㅂ··· 아니 코홀티 씨는 왜 그런 말을 하셔가지고!”
“디레트 선배님은 저희를 위해 시간을 내주신 것에 어떤 불만도 없으십니다· 이간질 좀 하지 마십시오·”
매몰찬 후배들의 태도에 코홀티는 결심했다·
나중에 후배들이 일하는 곳으로 찾아와도 절대 아는 척 하지 않겠다고·
‘이 자식들· 두고 보자·’
그래도 친구라고 코홀티가 너무 공격받자 디레트는 손수 화제를 돌려줬다·
“코홀티· 네가 일하는 곳 이야기나 해봐· 후배들이 듣고 참고할 수 있게·”
“흥· 5학년이나 가라고 해·”
“···”
“···”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코홀티는 아차 싶었다·
후배들은 물론이고 디레트까지 분노하게 만드는 최악의 발언이었던 것이다·
“···내가 실수했다· 사과할게·”
결국 코홀티는 복숭아와 자두를 듬뿍 섞어 넣은 아이스크림을 흑마법 학파 학생들에게 돌려야 했다·
와플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할짝이는 동안에도 학생들은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내가 미안하다니까···”
“흥·”
“요즘 일이 힘들어서 그랬어·”
코홀티는 최근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아무리 흑마법 학파가 인기 없다고 하더라도 에인로가드를 졸업할 정도의 학생한테 제안이 없지는 않았다· 당연히 코홀티한테도 여러 제안이 찾아왔었다·
북부 오염 지역의 제국군 소속 마법사 흑마법 마탑의 연구 마법사 마법범죄자를 추적하기 위해 결성된 기사단의 객원 마법사 지역에 속한 묘지기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흑마법사···
그리고 코홀티가 그 중에서 고른 건 서부의 <황무지 별잡이> 소속 감시자였다·
뛰어난 사냥꾼이자 순찰자인 황무지 별잡이들은 악마나 마법 범죄 또한 감시하곤 했는데 이를 위해 실력 좋은 흑마법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코홀티 선배님은 왜 황무지 별잡이에 가입하신 겁니까?”
“응? 보수가 제일 좋아서·”
‘괜히 물어봤다·’
후배들은 일제히 후회했다·
디레트 선배와 같은 학년인데도 저렇게 존경심이 안 드는 것도 참 대단한 재주였다·
그냥 선배를 빼버리고 다시 ‘씨’라고 부를까?
“어쨌든 이 황무지 별잡이 일이 생각보다 힘들더라고·”
“아· 확실히 이동해야 하는 구간이···”
서부의 황야 지대는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넓이를 자랑했다· 황무지 별잡이들에게 사흘 밤을 꼬박 새며 이 땅을 내달리는 건 평범한 일이었다·
“아니· 그건 별로 안 힘들었어· 에인로가드 때보다 오히려 몸은 편하더라·”
“그래요? 이상하네· 마법사들이라고 배려해준 거 아닌가?”
“···”
디레트는 속으로 침묵했다·
후배들의 감각이 왜곡된 게 참으로 안타까웠다·
별잡이들이 배려해준 게 아니라 그만큼 에인로가드 생활이 가혹한 건데···!
“그럼 뭐가 힘드셨던 겁니까? 적이 강력했나요?”
“아냐· 강력한 적은 보지도 못했어· 애초에 그런 악마나 마법범죄자가 그리 자주 나올 리가 없잖아· 힘든 건 사람들이야·”
“사람들이요? 마법범죄자는 자주 안 나왔다면서요?”
“마법범죄자 말고 평범한 사람들·”
사실 순찰자들의 일이란 건 벌어진 뒤에 쫓아서 체포하는 것보다 벌어지기 전에 먼저 찾아가 예방하는 게 우선이었다·
누군가 사악한 흑마법 유물을 손에 넣었다면 사고를 치기 전에 가서 막고 혹시라도 잘못된 물약을 만들어서 중독됐다면 가서 해독해주고···
그리고 이 과정에서 코홀티는 제국 사람들이 생각보다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 아뮬렛을 버리셔야 합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이걸 얼마 주고 산 건지 알기나 하냐?
-거울에 저주가 걸려 있습니다! 제가 들어가서 해제하게 해주십시오!
-외부인을 함부로 저택에 들여보내줄 것 같은가? 꿈도 꾸지 말게!
“···위험하다고 해도 말을 안 듣더라고·”
“저런·”
“마법에 대해 잘 모르면 어쩔 수 없죠· 에인로가드에서 배웠던 대로 설득해보세요·”
‘우리가 그런 걸 배웠나?’
누군가의 말에 다른 학생들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딱히 설득을 배운 것 같지는 않았는데···
후배들의 말을 들은 코홀티는 살짝 더 시무룩해졌다·
“에인로가드에서 배웠던 대로? 해보긴 했는데··· 그게··· 좀 역효과가 나서·”
“역효과요?”
“잠입해서 몰래 파괴하려고 했는데 들켰지 뭐야·”
흑마법 학파 학생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아깝다! 그걸 들키다니!”
“들키지만 않았어도···!”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디레트는 다시 한 번 침묵했다·
후배들한테 ‘그건 들킨 게 문제가 아니라 몰래 파괴하려고 한 게 문제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잘리셨어요? 혹시 에인로가드에 재입학하시나요?”
“농담이라도 그딴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마라·”
코홀티는 정색하고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디레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아니· 5학년이 끔찍하단 게 아니라···”
“닥치고 말이나 계속하시지·”
“그래서 수도에 온 거야· 사과하려고·”
디레트와 후배들은 방학을 틈타 몇 가지 의뢰와 연구 방문 등을 하기 위해 수도에 와있었다·
그러다가 코홀티도 수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만난 거였는데···
“부순 물건의 주인이 수도 귀족입니까?”
“정확히는 그 가문의 웃어른이지· 자우 백작이라고· 관대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야·”
백작의 저택 앞에 도착한 코홀티는 준비해 온 선물을 살짝 흔들어보였다·
찾아가서 별잡이 마법사가 하는 일을 설명하고 이 선물을 준다면 관대한 백작은 분명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주리라·
“너무··· 긍정적인 거 아니야? 백작 각하께서 무조건 해결해준다는 보장이 있어?”
“관대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라니까· 두고 봐·”
디레트는 괜히 걱정이 됐다·
물론 자우 백작이 관대하단 소문이 헛소문은 아니겠지만 관대하다고 해서 꼭 모든 걸 다 용서해주고 해결해준단 법은 없지 않은가·
비슷한 생각을 다들 하고 있었는지 후배들이 속삭였다·
“디레트 선배님· 저희 코홀티 씨는 버리고 따로 움직일까요?”
“···그래도 그러진 말자···”
속삭이는 사이 앞에서 처음 보는 가문의 마차가 멈췄다·
그리고 거칠고 험상궂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휙 뛰어내렸다· 디레트는 백작의 손님인가 싶어 비켜섰다·
···상대가 낯익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전까지는·
“디레트 선배· 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