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4화
“괴 괴물···!”
“아니· 이건 제가 한 거 아닙니다· 스승님께서 해주신 겁니다·”
이한은 상대가 오해하는 거 같아 해명에 나섰다·
원래 마법사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서로 소통할 수단을 여럿 갖고 있었다·
젊은 왕자의 정체를 밝힐 순 없더라도 저 안에서 스승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면 아발카른도 바로 이해하리라·
“통신 아티팩트 말씀이십니까?”
“비슷하긴 한데 조금 다릅니다· 여하튼 스승님께서 해주신 거라는 걸 알아주십시오·”
아발카른은 이한이 정체를 밝히지 않은 스승이 해골 교장이라고 추측했다·
상대가 해골 교장의 제자로 소문이 퍼지기도 했고 이런 짧은 시간 사이에 저만한 마법을 보여줄 수 있는 마법사가 흔치 않은 것이다·
틀리긴 했지만 나름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맞는 부분도 있었고···
‘그런데 스승이 가르침을 줬다고 하더라도 통신 아티팩트라면 본인이 꽤 많은 걸 맡아야 하지 않나?’
공간 미궁과 지하실에 대해 모르는 아발카른은 속으로 생각했다·
원거리로 가르침을 받는다 하더라도 직접 행차하는 게 아닌 이상 꽤 많은 부분을 제자가 수행해야 했다·
···그러면 충분히 대단한 게 맞는데??
다시 놀라려는 아발카른의 귓가에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됐다! 아발카른· 이리로 오거라!”
작업을 마무리한 아발카이겐이 제자를 불렀다·
고대 유물을 사용해 새로이 개선된 이 단정을 제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스승님· <비블레의 비통> 말입니다···”
“아발카른· 병에 두 가지 물약을 같이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 하는 마법에 집중해야지·”
아발카이겐은 엄한 얼굴로 제자를 훈계했다·
아무리 버두스 교수 때문에 기회가 날아간 게 아쉬워도 그렇지 다른 작업을 하는데 계속 그걸 신경 쓰고 있다니·
이 공중을 나는 돛단배를 구성하는 마법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완성된 마법들을 결합시키는 일이라 하더라도 방심해서는 안 됐다·
“그게 아니라···”
“어허!”
“죄 죄송합니다· 집중하겠습니다·”
오크 마법사는 찔끔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발카이겐은 마법에 관해서는 엄한 스승이었다· 저 모습을 보니 나중에 다 끝나고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몰아보겠나? 잠깐· 몰 수 있나?”
두 마법사는 물어놓고서도 멈칫했다·
이 공중 돛단배는 마법을 익히지 않은 사람도 몰 수 있게 하려는 버두스 교수의 걸작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마법을 익히지 않은 사람을 태워선 안 됐다·
시험작인 만큼 위에서 문제가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 단정 안에 설치된 마법진들을 수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마법사가 몰아야 하는 것이다·
“예· 저번에도 제가 몰았습니다·”
“···그렇군!”
두 마법사는 <비블레의 출항 부여>나 <비블레의 비행 부여> 등의 마법들이 최소 4서클부터 시작한다는 걸 떠올렸지만 굳이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오니 하나하나 놀랄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럼 지붕을 잘라내고 출발시키도록 하지·”
“잠깐· 제국 수도인데 허가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에인로가드 영지 안에서는 탈출만 하지 않으면 하늘을 날던 땅을 파던 교장실에 불을 지르던 상관없었지만 밖에는 제국의 법이 있었다·
수도에서 허가 받지 않고 멋대로 날아올랐다가는 사방에서 기사들이 달려올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연락을 구해서 허가를 받아놨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오기 전부터 계획하신 건 아니죠?”
-무슨 말씀을! 절대 아닙니다!
오해를 받은 기사들은 펄쩍 뛰었다·
버두스 교수 호위를 맡아서 온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어떻게 그런 오해를?
기사들은 정말 버두스 교수에 대한 순수한 미움으로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감사히 몰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한은 가볍게 뛰어서 돛단배 위에 올라탔다· 아발카이겐과 푸요 유크벨티레도 같이 착석했다·
파직!
“?!”
마법진에서 마력이 튀는 현상이 일어나자 아발카이겐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괜찮은 건가?”
“아· 이거 원래 받았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선체 강화 마법 바람 저항 마법 부식 방지 마법 때문인데··· 마지막 걸 꺼놓겠습니다·”
이한은 능숙하게 마법진을 조작했다·
버두스 교수 밑에서 이것저것 실험하느라 돛단배를 다루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푸요가 유크벨티레에게 속삭였다·
“버두스 교수가 워다나즈에게 어지간히도 많이 시킨 모양일세· 부여 마법 학파 학생들은 다들 저렇게 고생하나?”
“전 잘 모르겠습니다·”
“···”
그 당당한 대답에 유크벨티레를 쳐다보는 나무 정령 혼혈 마법사의 눈빛이 살짝 차가워졌다·
* * *
“자색 횃불? 오늘 자색 횃불이 있었나?”
수도 기사단 소속 서쪽 성벽 구역의 창공을 담당하는 비행기사들은 허공에서 번쩍이는 자주색 불빛을 발견하고 의아해했다·
수도에서 비행을 허락 받은 이들은 제각기 색이 다른 마법의 횃불을 받아 위에 걸어놔야 했다· 이런 횃불이 없거나 가짜 횃불을 달고 다니는 자는 바로 체포당했다·
자주색 횃불은 황족이나 황가 관련 인물들만 내줄 수 있는 표식· 흔히 볼 수 없는 만큼 기사들이 술렁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에인로가드의 기사들이 신청했습니다·”
“마령관 각하께서?”
“아니오·”
“하긴 그 분께서는 날고 싶으시면 허가 없이 날아다니시겠지·”
기사들의 목소리에는 존경과 짜증이 같이 담겨있었다· 급하면 수도 성벽을 넘어 날아오는 마령관은 그들에게 언제나 굴욕감을 안겨줬다·
어디에 성토하거나 간언을 올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고위 관료나 대귀족 가문에서 나온 인사들이 힘을 모아 황제에게 직언해도 황제는 스스로의 탓을 하면 했지 언제나 자신의 마령관을 감쌌다·
“안녕하신가?”
“아· 자우 백작님!”
기사들은 낯익은 얼굴에 인사를 올렸다·
자우 백작은 제국 수도에서 지내는 여러 귀족들 중에서도 너그러운 인품으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황제가 있는 수도에서 행패를 부릴 만큼 간덩이가 두둑한 귀족은 많지 않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자우 백작은 정말로 관대했다·
얼마나 관대한지 자신의 마차를 실수로 불태워버린 마법학교 출신 마법사를 용서해 줄 정도였던 것이다·
“이 녀석이 자꾸 하늘을 날고 싶어해서 이렇게 나왔네· 자네들 일을 늘린 게 아닌가 걱정되는군·”
흰 머리칼을 한 늙은 백작이 사과하자 기사들은 아니라는 듯이 손짓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들도 날아다니는 녀석을 기르는 만큼 이해합니다· 페가수스들은 참 가만히 있는 걸 싫어하지요·”
기사들이 타고 있는 페가수스들이 불만스럽게 울음소리를 냈다·
“저런· 나 때문에 자네들만 곤란해졌군· 이 늙은이는 이만 가보겠네· 자! 가자!”
마법 횃불을 받은 뒤 날아오르는 백작의 뒷모습에 기사들은 존경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제국의 귀족들이 다 저런 성품이라면 얼마나 평화로울 것인가?
“···잠깐· 저 자주색 불빛 좀 이상하지 않나?”
대화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던 위화감을 뒤늦게 알아차린 기사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움직임을 따라 자색 선이 캄캄한 하늘 위로 그려졌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빠르고 현란했다·
대체 무슨 탈것을 타고 있는 거지?
“생물이 아닌 모양이군·”
“과 과연· 그러면 말이 됩니다·”
경험 많은 선배 기사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 멀리 보이는 움직임은 생물의 움직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딱딱했다· 에인로가드에서 온 기사들인 만큼 마법 탈것이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에인로가드에서 온 마법 탈것이면··· 버ㄷ···”
“설마· 버두스 교수가 태평하게 비행이나 하고 있겠나· 절대 그럴 리 없지·”
마법 탈것에 비행까지 겹치면 제국에서는 버두스 교수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버두스 교수는 절대 아니었다· 여긴 에인로가드 영지가 아닌 만큼 그랬다가는 진짜 격추당할 수도 있는데···
“엇· 백작님이 저쪽으로 가시는데?”
자우 백작이 든 푸른 횃불이 자색 횃불 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아까 허가를 받고 다른 쪽을 돌고 있던 횃불들도 갑자기 자색 횃불로 몰려들었다·
그 모습에 기사들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 * *
‘빠르다!’
격렬한 움직임에 이한은 감탄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저번에 에인로가드 영지에서 조심스럽게 몰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였다·
“부족한 속도를 보충하기 위해 고대 유물을 꺼내왔지!”
아발카이겐은 쉭쉭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뚫고 자랑스럽게 외쳤다·
“돛대에 마법을 걸어서 저항을 보강했네!”
“다들 감사 합니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소형 범선을 정지시켰다·
자신도 모르게 신나서 급가속과 곡예비행을 펼치긴 했는데 아직 시험작인 돛단배로 너무 무리한 것 아닌가 걱정이 됐다·
확인해보니 마법진이나 선체에 손상은 없어보였다·
“후배·”
“예?”
“사람들이 오고 있어·”
“?!”
유크벨티레의 말에 이한은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사방에서 횃불이 날아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뭐지? 데스 나이트들이 허가 제대로 안 받았나?’
순간 이한의 머릿속으로 제국 신문의 헤드라인들이 어지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워 모 에인로가드 학생 제국 수도의 창공에서 무허가 광란의 비행··· 또 에인로가드인가?
스승인 버 모 교수는 책임을 지고 제국 법정에 자진출두··· 다른 여죄를 감안했을 때 종신형이 예상···
“허억···!”
“?”
그러나 이한보다 더 놀란 건 두 마법사들이었다· 둘은 창백해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지금 오는 분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누군지는 모르네만 이유는 짐작이 가네! 버두스 교수를 찾아온 자들이야!”
“예?”
이한은 무슨 소리인지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깨닫고 경악했다·
그러니까 이 돛단배만 보고 버두스 교수임을 짐작한다고?
“빠르게 나는 공중 마법 탈것이 있다고 해서 바로 버두스 교수를 떠올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말이 되지·”
“···이런 도움 안 되는 작자 같으니!”
이한은 쓸데없이 유명한 버두스 교수의 명성에 분노했다·
자리에 없는데도 이렇게 제자의 발목을 붙잡을 줄이야·
-비블레 버두스 맞나? 대답하게!
-버두스 교수요?
멀리서 소형 범선의 윤곽을 본 사람들이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두 마법사는 각오를 다졌다·
“이런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다니·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닐세· 나도 예상을 했어야 했는데· 마법에 몰두하느라···”
버두스 교수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드러난다면 치명적이었다·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버두스 교수 어딨냐’ ‘버두스 교수 좀 끌어내봐라’등등으로 괴롭히리라·
이한은 단호한 얼굴로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다들 고개 숙이고 계십시오·”
“뭐라고?”
“어서! 다들 고개 숙이고 계십시오· 투명 마법 걸고 안에서 나오지 마세요·”
다른 마법사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지시에 따랐다· 이한은 최대한 서둘러 준비를 마쳤다·
어느새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버두스 교수! 있으면 대답하게! 화내려고 온 게 아니야· 그저 투자받은 금화로 뭘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그래· 응? 자· 얼굴만 내밀어보게· 손에 아무것도 안 들었어!”
“흥· 그런 수작에 속겠소? 비블레 버두스 나와라! 이 개자식아· 네놈의 꼬리를 뜯어다가 수프를 끓여버리겠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외침으로 캄캄한 상공 위가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소형 범선 안에서 들려온 것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거칠게 으르렁대는 목소리였다·
“누가 비블레 버두스란 거냐? 난 나고 가문의 스테달이다!”
“나고 가문의 스테달?! 뼈살이꽃 투기 파동 때 재산을 더 불렸다는 그 스테달 말인가?!”
“···”
생각지도 못한 세세한 설정을 누군가 언급하자 이한은 당황해서 변장을 풀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