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3화
“아마 재능을 기대해서 맡긴 거겠지·”
아발카이겐은 이름 높은 부여 마법사답게 라게사의 생각을 정확히 짐작했다·
당장 유크벨티레 황녀와 작업한 마법만 봐도 이 소년이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발카이겐의 제자보다 뛰어날 정도였다· 라게사가 그 많은 황금을 투자한 버두스의 공중 돛단배를 맡긴 것도 이해가 갔다·
-오···!
-나도 불쌍해서 맡긴 줄 알았는데 확실히 저 말이 맞는 것 같군· 역시 아발카이겐 님이셔!
죽음의 기사들은 예리한 식견에 감탄했다·
생각해보니 이상하긴 했다·
불쌍하다고 주기에는 너무 비싼 물건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후계자 님이 불쌍해서 받은 거라고 했던 말에 속아넘어간 것 같았다·
‘날 놀리는 건가?’
기사들의 어이없는 반응에 아발카이겐은 살짝 황당해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어쨌든 그 돛단배를 자네가 갖고 있다는 건가?”
“예·”
“흠· 그럼 상관없겠군· 원한다면 갖고 온 마법을 그 돛단배에 걸어주도록 하지·”
“나도 그렇게 하겠네·”
두 마법사가 동의를 표했지만 이한은 아니었다·
사실 지금 상황 파악도 덜 된 것이다·
“잠깐만요· 여러분· 이래도 됩니까? 교수님 일 때문에 같이 오신 거잖아요?”
-저희 임무는 호위지 버두스 교수 작업 돕는 게 아닙니다만·
죽음의 기사들은 삶을 두 번 사는 자들답게 유연함을 발휘했다·
버두스 교수 모가지 붙여놓는 게 임무였지 작업 완수시키는 게 임무가 아닌 것이다·
이한은 물어볼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후회했다· 아마 ‘버두스 교수를 노예로 팔아도 됩니까?’라고 물었어도 데스 나이트들은 ‘뭐 그것도 목숨은 붙어있으니 괜찮겠죠’라고 대답했을 것 같았다·
대신 이한은 상식과 경험을 겸비한 두 마법사에게 물었다·
“정말 이래도 됩니까? 두 분 모두 버두스 교수님한테 받을 도움이 있으셔서 이 개같··· 아니 이 자리에 나오신 거잖습니까·”
‘방금 개같은 자리라고 하려고 하지 않았나?’
아발카이겐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게 분명했다· 워다나즈 가문의 마법사가 그런 천박한 말을 할 리 없었다·
“물론 그렇긴 하지·”
“안 받으셔도 됩니까?”
두 마법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작자의 억지를 들어주느니 안 받고 말지·”
“나도 동감일세· 협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준비해온 마법을 처음부터 다시 맞춰 줄 정도는 아니야·”
“···”
두 마법사의 결연한 의지에 이한은 압도되었다·
그들에게서는 오직 하나의 감정만이 느껴졌다·
버두스 교수의 억지에 맞춰줄 바에는 마법을 땅에 버리겠다!
“준비해 온 마법은 어차피 버두스 교수의 돛단배 말고는 쓸 곳도 없다·”
“맞네· 갖고 온 김에 받아주게나·”
“그런데 지금 돛단배는 에인로가드에 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갖고 오라고 연락했습니다·
“···”
교수가 억지를 부릴 때부터 기사들은 에인로가드에 있는 동료들에게 연락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다니·
실로 비범한 전략가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감 감사합니다·”
-저희가 감사할 일이죠· 대신 나중에 이 일을 버두스 교수에게 말하신다면 저희도 꼭 불러주십시오!
* * *
두 마법사가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버두스 교수는 쫓아가서 사과하거나 설득하는 대신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바로 자기 작업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축소 마법이 걸린 돛단배를 세심하게 조정하는 그 모습에 알시클이 괜히 조바심이 나서 물었다·
“저 밖에 안 나가보셔도 되겠습니까?”
“왜?”
“···협력을 위해 모였으니까?”
“내가 따라서 나가면 협력이 돼?”
“!”
버두스 교수는 의외로 날카로운 면모가 있었다·
확실히 그랬다· 버두스 교수가 따라 나간다고 저 둘이 마음을 바꿀 리 없는 것이다·
‘이 사람··· 혹시 천재인가?’
경악해하던 알시클은 창문 밖에서 기괴망측한 광경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뭐지?
‘뭐야? 저 돛단배는··· 저거··· 어···?’
공중에 뜬 죽음의 기사들이 위층 겉벽을 잘라내고는 소형 돛단배를 밀어 넣고 있었다·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이렇게 초현실적인 광경은 보기 드물었다·
멍하니 쳐다보던 알시클은 이한과 눈이 마주쳤다· 이한은 조용히 해달라고 손짓을 보낸 뒤 눈빛으로 부탁했다·
-버두스 교수님 좀 잡아주십시오·
“···그 그걸 내가 어떻게 하냐!”
“좀 조용히 하면 안 돼?”
버두스 교수는 위화감이라고는 조금도 느끼지 않고 신경질을 냈다·
지금 축소 마법을 건 상태에서 안의 마력 구조를 재배열하느라 매우 까다로웠던 것이다·
“미 미안합니다· 그··· 열심히 하십시오·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도와드릴 거라도 있습니까?”
알시클은 일단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버두스 교수와 친분이 없는 만큼 잘 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다른 사람이라면 펭귄 수인의 귀여움으로 유혹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비버 수인이었다)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 했다·
“도와줄 거? 있어·”
“오· 뭡니까?”
“얼음 좀 만들어줄래?”
다양한 종류의 얼음은 그 모양과 성질에 따라 시약으로도 쓰였다·
알시클 정도 되는 냉기 마법사는 자연적으로는 채집 불가능한 시약도 여러 개 만들 수 있었다·
“어떤 얼음이 필요하십니까? 모양과 속성을···”
버두스 교수가 머그잔을 내밀었다·
“여기 물 위에 얹어줘·”
“···”
얼음물 때문에 자신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걸 깨달은 알시클은 극대노했다·
나름 듣는 사람들 많다고 존대하던 태도를 갖다 버리고 알시클은 소리쳤다·
“지금 뭐하는 거냐!”
“어? 왜?”
“내가 마법에 필요한 걸 도와준다고 했지 네 얼음물 만들어주는 잡일 도와준다고 했냐!”
“그게 그거 아니야?”
버두스 교수는 당황했다·
자신이 더워서 목이 마르면 마법의 효율이 내려가는데?
“어떤 마법사가 이딴 걸 마법으로 해주겠냐고!”
“워다나즈는 해주는데·”
“···”
분노하던 와중에도 알시클은 너무 어이없어서 정신이 확 들었다·
‘워다나즈 너 이 녀석···!’
저렇게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가 이렇게 불쌍할 수 있다니·
정말 신비한 일이었다·
알시클은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화난다고 퍼부을 때가 아니었다·
위에서 작업하는 동안(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에서 제일 불쌍한 마법사를 위해 버두스 교수를 막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여기 쳐드십시오·”
알시클은 증오를 담아 얼음을 꽉꽉 채워줬다· 버두스 교수는 우물거리며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감시하던 알시클은 속으로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의외로 계속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처음에는 설득할 자신이 없었는데 잘 생각해보니 버두스 교수는 애초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얼음만 던져주면 좋다고 계속 앉아 있는 것이다·
“아·”
“!”
그러나 그 생각은 버두스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거품처럼 사라졌다· 알시클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잠깐 2층 갔다 와야겠어·”
“왜??”
알시클은 드디어 버두스 교수가 위화감을 알아차렸나 싶었다·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깨달은 것일까?
“시약으로 쓸 벨가룽 안료가 필요해·”
여기 2층에는 원래 집주인이 걸어놓은 그림들이 여럿 걸려 있었다·
그림에서 긁어내면 대충 지금 쓸 시약 정도는 확보가 가능하리라·
물론 원래 집주인인 익명의 해골 대마법사에게는 불쾌한 일이겠지만 버두스 교수가 알 바 아니었다·
“잠깐! 잠깐!”
“??”
“···꼭 그 안료가 필요할까요?”
“필요한데?”
‘젠장· 난 왜 이렇게 말솜씨가 부족하지!’
알시클은 반성했다·
평생 귀여운 외모만 믿고 살아오다보니 그게 통하지 않을 때 수단이 너무 부족했다·
워다나즈 녀석이었다면 말 몇 마디로 버두스 교수를 설득해서 벽난로에 뛰어들게 했을 텐데!
계단 앞에 선 버두스 교수는 멈칫했다· 가운데에 볼라디 교수가 서있었던 것이다·
“나 2층에···”
볼라디 교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위협적인 동작이나 말 한 마디 없었지만 그 뜻은 너무나도 확실했다·
버두스 교수는 얌전히 돌아서서 자리에 앉았다· 알시클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안료 필요 없으십니까?”
“으응· 대체해도 될 것 같아·”
“···”
알시클은 살짝 고민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나도 전투 마법사 훈련을 받아볼까?
* * *
2층의 두 마법사는 자기 자신들도 놀랄 만큼 집중력을 발휘했다·
버두스 교수가 아니라 그 제자의 물건을 돕는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마음이 가볍고 의욕이 샘솟을 줄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 물 좀 드시죠·”
이한은 아발카이겐의 제자인 오크 마법사에게 양철 잔을 건넸다·
아쉽게도 이번 돛단배 개조 작업에서 이한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두 마법사가 각자 준비해 온 마법은 이미 완성된 수준이었고 이걸 돛단배에 이식하는 작업 또한 외부인이 끼어들어봤자 방해만 됐다·
덕분에 이한은 오크 마법사 아발카른이 스승과 구슬땀을 흘리면서 작업하는 동안 구경만 해야 했다·
‘나도 유크벨티레 선배처럼 강한 마음을 가졌다면 좋았을 텐데·’
놀랍게도 유크벨티레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다른 마법사가 준비해 온 마법을 이식하는데 뭐하러 나서냐는 당당한 태도였다·
생각해보니 강한 마음이 아니라 뻔뻔한 마음 같기도 했다· 이한은 역시 본받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감사··· 여기 2층에 얼음 아티팩트가 있었습니까?”
차가운 얼음물에 아발카른은 의아해했다·
여기 2층에는 장식용으로 걸어놓은 그림 말고 별다른 게 없었는데 이 물은 어디서 갖고 온 거지?
“제가 마법으로 만들었는데요·”
“···?!”
믿을 수 없는 마력 낭비에 아발카른은 경악했다·
길거리를 떠도는 삼류 마법사도 아니고 자신보다 훨씬 더 대단한 에인로가드의 마법사가 무슨 낭비를?
“대체··· 왜···”
더듬거리며 이유를 물으려고 했지만 이한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두 분께서 버두스 교수님의 도움을 받으려던 마법은 뭐였습니까?”
“아 <비블레의 비통> 시전을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
아발카이겐은 뛰어난 고대 유물 전문가였지만 모든 마법을 다 자신이 시전할 순 없었다·
바콴탈라나의 비통을 새로이 재해석한 버두스 교수의 독문마법 비블레의 비통을 망가진 유물 수리에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마법은 모방이 불가능합니까?”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단순한 시전이 아니라 버두스 교수님이 소세계까지 쓰셔야 하는 걸로 알고 있어서···”
확실히 난이도가 높을 만했다·
버두스 교수가 소세계까지 펼친 상태로 시전해야 할 줄이야·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혹시 망가진 유물을 잠깐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내주면서도 아발카른은 의아해했다·
아래 내려가서 버두스 교수한테 부탁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절대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상대는 버두스 교수의 제자인 만큼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한은 아래로 내려가는 대신 잠깐 객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크 마법사의 의문이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까지 갔을 때 이한이 문을 열고 다시 나왔다·
“여기 시전해서 갖고 나왔습니다· 혹시 이 정도면 괜찮은지 봐주시겠습니까?”
털썩!
아발카른은 충격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