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7화
정령이 뭐라고 외치는 게 들렸지만 집중한 젊은 왕자의 귓가에는 닿지 않았다·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자에게 마법을 전수하는 일·
그 일과 비교하면 사악한 정령이 뭐라고 지껄이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운이 좋으면 개과천선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천성을 이기지 못할 터· 왕자는 사악한 존재들에게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알겠습니다! 더 버텨보겠습니다!
‘이런 상황이 자주 찾아오지는 않을 텐데···’
정령의 말은 다시 한 번 무시하고 왕자는 생각했다·
적절한 긴장감이 마법사의 학습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건 고대 시절부터 이미 증명된 이론이었고 눈앞의 제자는 그 기질이 특히 뛰어났다·
그렇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최대한 여러 마법들을 배워놔야 했다·
이렇게 좋은 상황이 그렇게 자주 찾아오지는 않을 것 아닌가·
만약 해골 교장이었다면 ‘위기가 필요하다면 내가 위기를 직접 조성하면 되겠군!’이라고 했겠지만 아직 젊은 왕자는 경험이 적고 어리숙해서 그런 사악한 발상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저 제자한테 우연히 이런 기회가 찾아왔을 때 어떻게든 뭐라도 더 가르쳐 줄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더 방법이 없을까?’
가아아아아악!
이한의 자원과 왕자의 응원으로 각성한 사라탄은 근성으로 버텼다·
육신이야 계속 붕괴되고 회복된다지만 사라탄처럼 강력한 고위 정령은 고통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정령이 이렇게 끈질기게 버티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스 스승님! 혹시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만약 상황이 정말 위험해진다면 왕자가 어련히 알아서 나설 거라고 믿고 있던 이한도 살짝 당황해서 외쳤다·
사라탄이 고래고래 비명 지르는 소리가 아까와는 차원이 달랐단 것이다·
-알겠어요· 제자님· 자· 방금 공간이동을 하면서 뭘 느끼셨나요?
“네? 아니··· 그··· 여기 사라탄···”
아고고고고고고!
젊은 왕자는 손짓했다· 그러자 무슨 마법을 시전했는지 사라탄의 비명소리가 음소거됐다·
-됐네요·
“소리를 줄인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습···?”
-자· 제자님· 방금 공간이동을 하면서 뭘 느끼셨나요?
“···아무래도 시전 속도도 그렇고 정확한 좌표도 그렇고 꽤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맞아요· 공간이동 마법은 한 번 시전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숙련의 경지에 오르기는 쉽지 않지요·
가장 난이도가 높은 축에 드는 만큼 공간이동 마법은 한 번 시전했다 하더라도 손에 익기까지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추가로 익혀야 하는 심화 속성들도 다양했다·
일반 공간이동 대(對) 마력을 갖고 있는 대상을 상대로 하는 관통형 공간이동 기존 위치의 물체를 교환하는 치환형 공간이동···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상관인 거지?’
정령에게 마력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각종 강화 마법으로 지원해주고 있던 이한은 초조함을 느꼈다·
스승의 설명이 뭔가 지금 상황에 당장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공간이동 마법에 대한 가르침이 확실히 대단하긴 했지만 이게 굴절 마법으로 인한 압력을 막아내는 데에 필요한 건가?
“스승님! 알겠습니다· 어디에 공간이동을 시전해야 하죠?”
이한은 왕자의 말을 끊고 외쳤다·
아직 수준이 미숙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라탄의 육신이 말 그대로 배배 꼬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유크벨티레가 마법을 완성하기 전에 사라탄의 의지가 먼저 붕괴될 것 같았다·
-지금은 아직 아니에요· 제자님·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왕자는 교묘하게 시간을 끌었다·
이렇게 된 이상 공간이동 마법이나 몇 개 더 가르쳐 볼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마법사 본인의 공간이동도 익히게 하고 싶은데···
콰직!
“!?”
크게 부러지는 소리에 이한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사라탄의 허리라도 부러졌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사라탄은 아직 버티고 있었다·
부러진 건 다른 쪽이었다· 이한은 유크벨티레의 얼굴이 이제까지 본 적 없을 만큼 창백하게 질린 걸 알아차렸다·
아다만타이트로 된 얇은 판에 금이 간 것이다·
이 모든 마법을 고정하고 새겨 넣어야 하는 핵심에 금이 가다니· 이한은 경악했다·
“어··· 어떻게?! 아니· 분명 부하 계산은 제대로 다 했을 텐데?!”
이한과 사라탄이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는 것도 마법 시전에서 펼쳐지는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아다만타이트란 재질이 믿음직스럽더라도 마법의 부하를 온전히 혼자서 받아낼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저렇게 금이 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다만타이트 순도가 생각보다 높지 않네요· 다른 불순물들이 섞여있었군요·
“예? 당연히 합금을 쓰죠!”
스승의 대답에 이한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유크벨티레가 무슨 대륙의 황제도 아니고 순수한 아다만타이트 판을 쓰겠는가·
해골 교장도 그런 낭비는 하지 못···
···할 수는 있겠지만 차마 학생들 앞에서는 못할 것이다·
“에인로가드 학생이 순도 높은 아다만타이트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과연· 제자님· 안타까운 착오네요· 서로 같다고 생각했던 물질의 정량이 달랐을 줄이야···
“···스승님 혹시 지금 웃으시는 거 아니죠?”
이한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물론 젊은 왕자는 언제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미소 짓는 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이 상황을 환영하는 듯한···
‘기분 탓이겠지?’
-제자님· 들어주세요· 지금 이렇게 된 이상 제자님이 새로운 마법을 또 배우는 수밖에 없겠어요·
하나 더 가르칠 수 있겠다는 계산에 젊은 왕자의 목소리에는 행복함이 가득했다·
“중지하겠어· 밖으로 물러나!”
유크벨티레가 뒤에서 냉정하게 외쳤다·
아쉬워서 버두스 교수의 목이라도 비틀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런다고 실패한 마법이 다시 돌아오진 않았다·
지금은 억지 부리지 말고 물러날 때였다·
-조용히 하세요·
“빨리 물러나야 합···”
-자· 제자님· 들어보세요·
유크벨티레의 목소리에도 음소거가 걸렸다· 실로 놀라운 환상 마법이었다·
‘아니· 어떻게 하신 거지?’
이한도 나름 마법을 배운 학생인데 전혀 원리가 짐작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한한테 직접 건 것도 아니고 유크벨티레한테 걸지도 않았는데···
“스 스승님· 저기 선배님은 물러나자고 하시는데요? 무리하지 말고 물러나도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과연 저 마법사가 제자님을 내버려둘까요? 다시 와서 부탁하지 않을까요?
말하던 왕자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보니 그게 더 좋나?
‘아니지· 다시 부탁 못할 수도 있으니까·’
왕자가 고민하는 사이 이한은 바로 설득이 끝났다· 확실히 저 선배는 자신을 계속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할 사람이었다·
···버두스 교수도 무릎 꿇려야 했고!
“맞는 말씀이십니다· 제가 뭘 해야 합니까?”
-저번 탑에서 보여주셨던 음률 주문 혹시 기억하시나요?
“음률 주문이라면···”
이한은 위대한 예술가를 만나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음률 주문은 음악 마법의 이치를 담아 마법의 힘을 강화시키는 주문·
반복 주문처럼 주문을 가다듬어 마법의 위력을 올리는 수법은 몇 개 있었지만 음률 주문처럼 그 고점이 높은 수단은 드물었다·
실제로 이한은 복합 부여 마법인 <비블레의 날아다니는 검>을 음률 주문의 힘을 빌려 완성시키지 않았던가·
원래라면 워낙 복잡하고 까다로워 시전하지 못했을 마법이었다·
-그걸 사용해서 제가 말하는 마법을 시전해주세요·
왕가의 정금(正金)·
이 마법은 젊은 왕자의 가문 그러니까 왕가에 내려오는 변환 마법이었다·
이제까지 이한이 배워 온 여러 변환 마법들은 전부 다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
<자룬의 비탄성 고무>는 늪 같은 고무를 만들어내는 마법이었고 <암석 모래 변환>은 결국 모래를 만들어내는 마법이었다·
변환 마법에서 이런 결과의 고정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안 그러면 마법의 난이도가 너무 치솟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젊은 왕자가 꺼낸 이 마법은 이름에만 황금이 들어갔지 실제로는 금과 관련된 마법이 아니었다·
“이런!”
-?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물질을 일시적으로 만능에 가까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물질로 변환시키는 마법·
그게 바로 왕가의 정금이었다·
현자의 돌이나 용석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웠다·
물론 그 둘과 비교하면 어떤 시약도 빛이 바래겠지만···
“···과연· 아다만타이트에 간 손상을 이걸로 대체하란 겁니까?”
-마법이 끝날 때까지만 막으면 충분해요· 제자님· 굴절 마법이 모두 끝나면 더 이상 압력을 버틸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건 몇 서클 마법이죠?”
-서두르세요 제자님! 어서!
이한은 사라탄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마법까지 공간이동으로 할 수는 없었고 잠깐 사라탄을 두고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았다·
“너 괜찮···”
-괜찮다고 하네요· 자!
왕자는 사라탄의 입을 막고 대신 부담을 덜어줬다· 그리고는 빨리 가라고 손짓했다·
‘진짜 괜찮은 게 맞나?’
그런 의문을 느끼며 이한은 서둘러 움직였다· 유크벨티레가 입을 벙긋대는 게 보였다·
“선배님 뭐하십니까?”
“읍읍읍읍읍읍읍·”
평소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던 유크벨티레가 분노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이한을 가리키더니 지하실 밖을 가리켰다·
마법을 중지할 거니까 빨리 밖으로 나가라ㄱ···
-제자님!
“아 알겠습니다·”
이한은 그림의 성화에 아다만타이트 판으로 움직였다· 유크벨티레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발을 구르더니 왕자를 노려보았다·
젊은 왕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글생글 웃었다·
그 모습에 유크벨티레는 자신 안에서 젊은 왕자의 위험도를 극상으로 올렸다·
극상-젊은 왕자<-
상-해골 교장
중상-버두스 교수
그러는 사이 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긴박한 상황에 맞지 않는 소리에 유크벨티레는 당황해서 돌아섰다·
‘굴절이···!’
<아히만의 굴절> 마법이 판 위에 천천히 새겨지고 있었다·
금이 가서 새겨지기는커녕 금세라도 마법을 토해낼 것 같았던 아다만타이트 판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니·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판의 갈라진 틈새에 순수한 금이 반짝이고 있었다·
실제 금이 아닌 마법으로 형성된 현실 밖의 금이었다·
그 금은 손실된 아다만타이트를 대신해서 마법을 유지시켰다· 원리를 알아차린 유크벨티레는 다시 한 번 놀라 후배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수준 높은 변환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전하다니?
“스승님! 이거 유지가 되는 거 맞습니까?!”
-조금만 더 유지해보세요· 제자님· 잘하고 있으니까요·
“아니 유지가 안 되는···”
이한은 금세라도 힘을 잃고 원래 형태로 돌아오려는 순금을 보고 당황스러워했다·
마력을 빨아들이고 빨아들여도 멈추지 않고 계속 요구하는 게 무슨 새끼 바실리스크 같았다·
한 줌의 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런 양의 마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니·
‘내가 마법을 잘못 시전하고 있나??’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한은 스승을 믿고 계속 마법을 유지했다· 마력 걱정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모습에 젊은 왕자는 미소지었다·
원래라면 마력 확보용 마법 몇 개를 시전하고 들어갔어야 했지만 역시 제자는 그냥 해도 버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고가 한두개 정도만 더 일어났으면 싶을 정도였다·
-괜찮으세요 정령 님?
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 괜찮으세요? 혹시 쓰러지실 것 같거나 못 버티실 것 같거나 하시지는 않고요?
괜찮습니다! 놈도 버티고 있는데 저도 충분하죠!
젊은 왕자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령은 참 도움이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