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화
“가만히 있어!”
외침과 함께 이한은 사라탄을 돕기 위해 나섰다·
지팡이에 마력을 불어넣자 진신(眞身)이 지팡이 안에 있는 사라탄에게 마력이 전달됐다· 생명처럼 차오르는 힘에 사라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 고맙···
“야 이 멍청한 자식아! 아까 무리냐고 물었을 때 왜 거짓말을 해가지고!”
···
이한은 거세게 비난을 퍼부었다·
어쩐지 아까 반응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 정령이 허세를 부린 거였다·
한 번 해도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지는 비난에 사라탄은 방금 차올랐던 감사한 마음이 싹 사라지는 걸 느꼈다·
‘대체 저 새끼가 뭐가 선하다는 거야?’
울컥한 마음에 속으로 투덜거리던 사라탄은 순간 비틀거렸다·
놀랍게도 아직 1차 충격도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마법진 안에 남은 힘이 또다시 몰려들고 있었다·
컥! ···이 거울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은데···!
“!”
유크벨티레는 눈을 크게 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저 정령에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지금 마법에 집중하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석경이 도움이 안 된다니· 그건 정령이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 분명해· 애초에 저렇게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아니라 비스듬하게···’
“선배님· 이쪽 신경 쓰지 말고 마법에 집중하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한은 유크벨티레에게 경고했다·
유크벨티레가 당장이라도 주문을 멈추고 반박할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던 것이다·
“사라탄 어떠냐?”
고 고맙습니다· 힘이 좀 돌아오는···
이한이 연신 마력을 퍼붓자 사라탄은 간신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음 것도 막을 수 있겠나?”
뭐?
사라탄은 마법사의 말을 듣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1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2차 시련인 <바콴탈라나의 차원 막대>를 고정하는 과정이 준비되고 있었다·
온갖 뒤틀리고 섞인 차원에서도 형태를 유지한 막대 형태의 불변성·
이 불변성을 현실의 물건에 어떻게든 고정시키는 게 부여 마법의 정수였다·
유크벨티레는 아다만타이트로 된 얇은 판을 꺼내 마법을 고정시키려 시도했다· 그 모습은 마치 미쳐 날뛰는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저 저건 좀···
‘스승님은 대체 뭘 믿고 저 자식을 쓰라고 한 거지?’
이한은 속으로 사라탄을 욕하며 움직였다·
아무래도 지팡이에 있는 사라탄의 본질에 마력을 전달하는 방식은 효율이 썩 좋지 않았다· 직접 붙어서 마력을 전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자세 잡아라! 혹시라도 무너지면 다시는 지팡이 안에서 못 나오게 해주마!”
알겠다! 알겠습니다!
사라탄 뒤에 자리를 잡은 이한은 거대한 나무 정령을 마치 목책이나 방패처럼 다뤘다·
이 나무 정령이 제대로 버티기만 하면 이한이 위험할 일은 없었다·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쪼개진 돌덩어리 몇 개가 이한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원 막대 마법은 차원을 무자비하게 뒤섞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불변성을 추출하는 원리의 마법·
마치 강철이 제련되기 위해서는 대장장이가 불과 압력을 퍼부어야 하는 것처럼 이 마법 또한 그랬다·
당연히 주변에는 그 여파가 날아왔다·
사라탄이 대부분의 충격을 받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휘어지고 쪼개진 공간을 탄 파편이 이한에게도 튀었다·
···으·· 으윽··· 으그그극···
‘아직 괜찮겠지?’
지팡이 안에서 고문당할 때보다 더 괴로워 보이는 정령의 모습에 이한은 그 상태를 가늠해보았다·
과연 나무 정령답게 육신의 단단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폭풍처럼 힘이 몰려오는데도 아직 멀쩡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이한의 기준에서였다· 사라탄 본인은 부상과 재생을 반복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뒤에서 마력이 즉시 보충되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금세 쓰러졌으리라·
“스승님! 이대로 가면 되는 겁니까?”
-잘하고 있어요· 제자님· 지금처럼만 하면 충분하답니다·
젊은 왕자의 목소리는 지금 난장판인 지하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도 평안했다·
사라탄은 제발 아까처럼 좀 나서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압력이 너무 거세서 그럴 여유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몇 곳은 제자님께서 관리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밀짚을 들고 있는 농부 그림 밑에 공간 안정화 마법을 시전해주겠어요?
“공간 안정화 마법··· 알겠습니다!”
다행히 아는 마법이었다· 이한은 2서클 마법을 시전해서 위험한 부분을 틀어막았다·
앞을 보니 유크벨티레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서 창백한 얼굴이 더 창백해진 상태였다· 고위 마법을 시전하는 마법사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후배와 눈이 마주친 유크벨티레는 입을 벙긋거렸다· 이한은 혹시 무슨 중요한 말이라도 하나 싶어 정신을 집중했다·
‘뭐지? 도움이 필요한가?’
-내 아티팩트 잘못이 아니···
“···한번만 더 쓸데없는 걸로 사람 정신 사납게 하면 연구고 뭐고 다 중지시키겠습니다!”
이한의 일갈에 유크벨티레는 움찔했다·
누가 디레트 후배 아니랄까봐 상당히 감정적이었다·
“스승님· 그 다음은 뭡니까?”
-다음은 저기 망령을 가둬놓은 궤짝 옆 차원 균열을 이동시켜주세요·
“···어떻게 말입니까?”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현재 사라탄을 방패 삼아 마력을 보충해주면서 마법을 시전하고 있는 상황이라 직접적으로 움직이기 힘들긴 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균열을 이동시키라는 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어떻게 하란 거지?
-공간 마법을 쓰면 되겠죠 제자님·
“어··· 알겠습니다·”
이한은 지팡이에 박힌 <공간이동의 광석>을 활용하려고 했다·
학교 내 조각상에게 얻어낸 이 광석은 하급 공간이동 마법이 걸려 있었다·
-아니죠· 제자님· 그 광석으로는 시전할 수 없어요·
젊은 왕자는 친절하게 조언했다·
<공간이동의 광석>에 걸린 마법은 어디까지나 작고 가벼운 물체를 텔레포트시키는 정도였지 저런 균열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허공에 떠있는 지푸라기처럼 보였지만 저 균열은 엄연한 차원 중첩의 현상이었고 힘의 덩어리였던 것이다·
“그러면···?”
-중급 공간이동 마법을 시전해야죠· 자· 따라해보세요·
젊은 왕자는 자상하게 지도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지도에 이한은 자신이 하급 공간이동 마법도 아직 배우지 않았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 마법을 익히면 영혼 있는 존재는 무리더라도 무거운 물건들까지는 제법 쉽게 이동이 가능할 거랍니다·
“그 그렇군요·”
제 제발· 빨리 좀···
사라탄은 고통에 신음하면서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지금 뒤에서 무슨 마법 강연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한시라도 빨리 마법을 배우고 시전해야 이 고통이 줄어들 것 같았다·
“아니· 마법이 어렵다니까?”
이한은 정령에게 항변했다·
이제 와서 생각난 건데 애초에 이한은 하급 공간이동 마법도 아직 배우지 않은 상태였다·
시공간 계열 마법들은 그 난이도가 모든 학파 마법을 통틀어도 손꼽히게 높은 수준이었고 가르시아 교수도 그걸 알았기에 이한에게 무리하게 가르치지 않았다·
기초적인 저서클 마법들부터 확실하게 다지고 가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제자가 다른 학파 마법에서 너무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한 몫 했지만···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중급부터 익히라고 하다니·
‘이거 5서클 아니었나?’
시공간 계열 마법들은 난이도를 하나 더 올려서 평가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이걸 그냥 5서클 마법이라고 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럼··· 커억··· 쉬운 걸로 바꿔달라고··· 그윽··· 해···
사라탄은 다시 존대를 갖다 던지고 살벌하게 조언했다·
차라리 마력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금세 쓰러져서 소멸했을 텐데 이 마법사 놈이 마력을 계속 보충해주니 쓰러지지도 못하고 고통이 지속되었다·
“그건 좀···”
이한은 머뭇거렸다·
웃는 얼굴에 침 뱉기 뭐하다고 젊은 왕자 앞에서는 이상하게 직설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해골 교장이었으면 ‘아 장난하십니까 투서 넣을 겁니다’하고 바닥에 드러누웠겠지만 자신을 믿고 저렇게 초롱초롱하게 응원해주는 왕자한테는 조금···
개··· 개새ㄲ··· 그럼··· 익히라고···
“알겠어· 알겠어· 좀만 더 버텨봐라·”
휘듯이 날아오는 파편을 피하며 이한은 사라탄을 달랬다·
‘저 자식· 엄살이 정말 심하군·’
왕자가 나서지 않는 것만 봐도 아직 상황이 그렇게까지 심각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말 위험했다면 왕자가 나서지 않았겠는가·
‘기초는 배우긴 했는데···’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한테 배웠던 공간 마법의 기초와 방금 왕자에게 들은 주문을 떠올리며 초점을 맞췄다·
공간이동은 사실 그 겉모습 때문에 투사체 계열 마법처럼 보이기 쉬웠지만 따지고 보면···
‘···오히려 차원 계열 마법과 결이 비슷하지·’
막대한 마력으로 공간을 짓누르고 뒤틀어서 물체가 이동할 길을 만드는 것·
그게 공간이동의 기본적인 원리였다·
이한은 깊게 호흡했다·
소세계 마법은 물론이고 다른 강력한 마법들을 몇 번 쓴 경험이 비교적 빠른 적응을 도와주었다·
마력을 집중시켜서 공간을 뒤튼다!
콰직!
통제에 실패한 부서진 벽돌 하나가 유크벨티레의 발치로 공간이동 되면서 부서지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마법이 막혀서 끙끙대던 유크벨티레는 깜짝 놀라서 허겁지겁 손을 흔들었다· 빨리 하겠다는 뜻이었다·
“···”
나중에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한은 다시 집중했다·
‘방향을 반대쪽으로 해야겠어·’
물론 유크벨티레도 마법사인 만큼 스스로의 대마력으로 공간이동을 막아내거나 혹은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먼저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매우 지친데다가 고위 마법에 몰두한 상황·
자칫하다가는 선배를 암살한 후배로 에인로가드 역사에 길이 남을지도 몰랐다·
-잘하고 있어요· 제자님· 시전 속도를 더 단축시키고 좌표를 더 정확히 다듬으면 충분하겠네요·
“감사합니다·”
빨리··· 빨리 해···
“알겠다니까? 조용히 좀 해라·”
이한은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균열을 이동시켰다·
차원 균열은 평범한 궤짝이나 돌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대상이었다· 보내면서도 손아귀가 욱신거리고 두통이 올라올 정도였다·
“됐습니까?”
-훌륭해요· 제자님·
사 살았나···?
압력이 조금 약해지자 사라탄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마법사 놈의 마법 때문인지 아니면 버틸 만큼 다 버텨서인지 압력이 줄어든 것 같았다·
“아히만의···”
“3차! 3차다 사라탄!”
유크벨티레의 주문을 들은 이한은 선배가 막힌 부분을 해치우고 마지막 마법을 불러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속보에 사라탄은 휘청거렸다· 육신은 아직 힘이 남아 있었지만 의지가 꺾인 것이다·
의지가 꺾인 정령은 겉으로도 티가 났다· 사라탄의 거대한 육신이 줄어들고 마치 썩은 고목처럼 비틀거렸다·
끝··· 끝났··· 포기해···
“뭘 포기해 이 자식아!”
사라탄은 옆에서 후려갈기는 둔탁한 타격에 깜짝 놀랐다·
바로 도망갔을 줄 알았던 마법사 놈이 옆에서 자신을 부축한 채 일갈하고 있었다·
“버텨라! 거의 다 왔어! 나도 같이 마법을 시전할 테니까!”
왜 왜···?
이런 상황에서 정령이 쓰러지면 마법사는 포기하고 물러서는 게 정석이었다·
그런데 이 마법사는 구박을 할지언정 자리를 비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걸음을 내딛고 같이 짐을 짊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사라탄은 무심코 젊은 왕자를 쳐다보았다·
혹시 저 대마법사가 말한 선한 마음이란 게 이런 걸 뜻하는 것이었나?
‘정령이 생각보다 허약하군요·’
젊은 왕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은색 머리칼을 한 마법사의 마법을 도와주면서 겸사겸사 제자한테 몇 가지 마법을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정령이 생각보다 허약해서 기회가 나지 않았다·
간신히 공간이동 마법 하나만 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유폐되어 있었다지만 이렇게 엄살이 심할 줄이야·
마법사 님! 이걸 말하신 거였습니까!?
-네?
선한 마음 말입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래요? 잘 됐네요· 그러면 조금만 더 버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