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4화
갑자기 제자가 뜨거운 열정을 드러내자 젊은 왕자는 당황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하기 싫다는 듯 투덜댔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하지만 놀랍진 않군요·’
왕자는 빠르게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니 제자는 원래 마법을 좋아했고 어려운 마법은 더더욱 좋아했다·
난이도 높다는 설명에 도전 정신이 자극받았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제자님· 난이도 높은 마법이 제자님이 가진 마법사의 긍지를 깨운 건가요?
“네? 아니··· 저는 그냥 버두스 교수를 탈것으로 쓰고 싶ㅇ···”
“···?”
유크벨티레는 후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냥 네 발로 기어 다닌다고 했지 등 위에 탈 수 있다고는 안 했던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전력으로 도와드리겠어요! 제자님· 정령을 꺼내세요·
왕자는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급 화염 정령을 소환했다·
수많은 정령들 중 그나마 이한과 친한 참새 형태의 정령이 나타나 머리 위에서 짹짹댔다·
-···그 정령 말고요 제자님·
“내가 생각해도 그 정령은 아닌 것 같군·”
기운을 회복한 유크벨티레까지 말을 얹자 이한은 알겠다고 손을 내저은 뒤 다람쥐 형태의 하급 냉기 정령을 소환했다·
-제자님·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저런 귀여운 정령을 두 번이나 꺼내는 건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요· 혹시 자랑하고 싶었나요?
“···사실 그런 마음도 조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실수였지만 두 번째는 자랑에 가까웠던 것이다·
유크벨티레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런 정령을 왜 자ㄹ···”
“제 정령 욕하면 결투 신청할 겁니다· 선배님·”
“···”
유크벨티레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금 후배의 모습을 보니 예전 디레트를 분노하게 만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이 골렘은 형편없는 것 같은데· 계약 파기하고 새로 찾는 게 낫겠어·
-야· 나가·
-나는 너를 위해서 정확한 조언을 해준 건데 이런 대접은···
-꺼져· 그냥 영원히 꺼져·
그리고 그 이후 디레트는 일주일 정도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유크벨티레 생각에는 아마 흑마법 때문 같았다· 흑마법 학파가 사람을 비이성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지금 눈앞의 후배도 흑마법 학파니 꽤 그럴듯한 논리였다·
“스승님께서 말하신 정령은 아마 뇌공왕이겠죠· 그런데 제가 최근에 소환해서 한동안은 문양의 힘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아닌데요?
왕자의 말에 이한은 의아해했다·
어라?
“그럼 비바람의 호민관입니까?”
우피눔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대정령이었지만 페르쿤트라처럼 직접적인 소환을 할 수 있는 계약의 문양은 아니었다·
-그런 정령하고도 계약했었나요? 제자님은 참 정령에게 사랑받고 있네요·
젊은 왕자는 놀라워했다·
정령의 칭호나 작위는 그 정령의 강함을 짐작할 수 있는 간단한 척도였다·
호민관을 자칭할 수준의 정령이라면 결코 약하지 않으리라·
“??”
물론 이한의 의아함은 풀리지 않았다·
페르쿤트라도 우피눔도 아니면 뭘 말하는 거지?
‘아르나는 별이지 정령이 아닌데?’
-제자님· 설마 지팡이에 있는 정령을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제야 이한은 지팡이에 깃든 정령의 존재를 떠올렸다·
서어나무의 정령이자 자칭 투전승목왕의 작위를 갖고 있는 지팡이에 유폐된 정령 사라탄·
정령왕의 신목(神木)으로 지팡이의 뼈대가 바뀌자 간신히 힘을 회복한 이 정령은 바로 이한에게 덤벼들 만큼 흉폭한 놈이었다·
심상세계 안에서 검은 책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이한이 졌을지도 몰랐다·
“정령을 꺼내라고 하셔서 제가 바로 소환 가능한 정령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정령이 아주 못되고 악랄한 놈입니다·”
이한은 바로 고자질을 시전했다·
-무 무슨··· 내가 뭘 했다고?!
사라탄은 비명을 질렀다·
한동안 마법사 놈이 자신을 잊어버린 것 같았기에 숨죽인 채 지팡이 속에서 얌전히 지내고 있었는데···
“보십시오· 바로 대답할 수 있으면서 이제까지 없는 척 절 속이고 있었습니다·”
-네놈이 날 안 불렀잖아! ···아가가가가가각!
이한은 저번에 굴복시켰던 것처럼 가차 없이 마력을 퍼부었다·
꾀를 부린 게 들통 난 사라탄은 재빨리 항복선언을 했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꼭 먼저 나와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너 저번에도 그래놓고 가만히 있었지 않나?”
-···그런데 딱히 도와드릴 일이 없었··· 그가가가가가각!
사라탄은 딱히 틀린 말을 하진 않았다·
이한이 그 뒤로 상대한 적들이 워낙 강력한 만큼 깨어났다고 해도 지팡이 안에서 한정적인 권능만 쓸 수 있는 사라탄이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마력을 회복시켜주는 권능이나 식물을 성장시켜주는 권능 지팡이를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권능 정도였는데 이런 건 강적을 상대할 때 쓰기 힘든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을 한다고 해서 꼭 그게 정답은 아니었다· 이한은 최근 만난 강적들을 떠올리며 도와주지 않은 정령에게 분노를 토해냈다·
이 페르쿤트라보다 못한 놈 같으니!
원래라면 지팡이의 주인만 들을 수 있는 비명이었지만 젊은 왕자는 주인과 노예 사이에서 공명하는 영혼의 파장을 읽어냈다·
-진정하세요· 제자님·
“하지만 스승님· 이 정령 때문에 제가 얼마나 고생을 한지 아십니까? 심상세계 속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고 만드라고라도 이 자식 때문에 망할 뻔했단 말입니다·”
-···?
사라탄은 멈칫했다·
전자는 알겠지만 후자는 그런 기억이 없었던 것이다·
-잠 잠깐· 만드라고라는 결국 내 잘못이 아니라 그 드래곤이···
분명 드래곤이 멋대로 침입해서 만드라고라를 키워놓았던 거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때도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간신히 풀었었는데?
“그랬나? 뭐 그럼 그건 빼고·”
-···
“하여간 날 공격한 건 사실이잖아·”
-그 그건 그렇긴 한데·
젊은 왕자는 손을 흔들어서 둘의 말다툼을 잘라냈다·
-그만· 그만두세요 둘 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요· 자· 정령 님·
말과 동시에 이한이 쥐고 있는 지팡이의 나무 부분에서 강한 정령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나무에 완전히 봉인되었던 사라탄이 밖으로 풀려나고 있었다!
사라탄은 깜짝 놀라서 나무로 구성된 울퉁불퉁한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았다· 심상세계에서나 움직일 수 있었던 진짜 정령의 육신이었다·
이··· 이 몸의 힘이! 이 몸의 힘이!
-그러면 이제 이야기를···
죽여버리겠다 이 꼬맹이!
힘이 돌아오자마자 사라탄은 포효했다·
흑단나무와 호두나무가 얽혀서 만들어진 거대한 망치가 주먹 대신 모습을 드러냈다· 마력과 정령의 힘이 섞인 이 망치는 얄미운 마법사를 한 방 갈겨줄 응보의 무기였다·
-들어주세···
닥쳐! 뭐하는 새낀진 모르겠지만 풀어줘서 고맙다· 하지만 두 번은 없어! 그림 찢어지고 싶지 않으면 입 닥치고 있으라고!
사라탄은 일갈한 뒤 이한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한은 조금의 긴장도 없이 정령을 마주 쳐다볼 뿐이었다·
그 태평함에 오히려 사라탄이 움찔했다·
뭐지?
“팔이 날아갔는데·”
뭐?
“팔이 날아갔다고·”
무슨 개··· 헉?!
사라탄은 그제야 자신이 팔에 만들어 낸 거대한 망치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에는 다리가 사라지더니 몸이 갑자기 바닥으로 추락했다·
쿵!
그리고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건 유폐된 상태에서 불리하게 싸운 탓에 패배한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풀려났는데도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사라탄은 먼 과거에 정령들에게 봉인당했을 때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다·
그··· 그윽··· 어떻··· 게···
-정령 님· 이제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림 속 젊은 왕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상냥하게 말했다·
그 태도가 오히려 사라탄을 두렵게 만들었다·
닥··· ㅊ···
-어쩔 수 없나요·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젊은 왕자는 다시 한 번 손짓했다·
이한은 느낄 수 있었다·
지하실 바닥 안에 고정되어 있던 사라탄의 정령 육신에서 영혼이 추출되는 것을·
그리고 그 영혼은 그림 안으로 흡수되었다·
손아귀 안에 정령의 영혼을 가둔 왕자는 두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쥐더니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
이한은 경악했다·
이제까지 저 정령이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건 몇 번 봤었지만 저렇게 공포로 격렬하게 떠는 건 처음이었다·
대체 뭘 하고 있길래?
경악하는 사이 영혼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사라탄은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정신이 나갔던 것 같습니다· 부디 마법사 님의 발깔개가 되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제가 발깔개가 나갔던 것 같습니다· 부디 정신의 마법사 님이 되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그건 괜찮아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혀가 풀리신 것 같은데 잠깐 쉬시죠·
“대 대체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이한은 놀라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 방법이라면 앞으로 이한을 피하는 정령들도 설득할 수 있을지 몰랐다·
-간단한 방법이에요· 제자님· 제 영혼 깊숙한 곳을 직접 보여주고 설득했지요·
“···”
대체 어떤 영혼이길래 저 정령이 저렇게 겁에 질린단 말인가?
이한은 놀라워하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으음· 나는 무리겠군·’
정령이 이한의 영혼 깊숙한 곳을 보면 ‘뭐 이런 속물이 있냐?’하고 얕볼 것 같았다·
-정령 님· 현재 정령 님은 강력한 봉인으로 본질의 촉심(燭心)이 저 지팡이 속에 가둬져 있어요·
발깔개가 되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
사라탄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후유증 때문에 입이 멋대로 다른 말을 내뱉었다·
젊은 왕자는 놀라지 않고 차근차근 격려했다·
-자· 정신 차리세요·
예 예···
-그 봉인을 어떻게 푸는지는 알고 계시나요?
여기 마법사 놈··· 아니 님이··· 지팡이의 권능을 사용하고 공명하면 봉인이 녹아내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하지만 제자님에게만 완전히 기대서는 안 됩니다· 정령 님도 스스로 수행을 하셔야 해요·
마법사의 일을 돕는 거라면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만···
“네가 언제?”
이한의 말에 사라탄은 못 들은 척했다·
솔직히 도울 기회가 없었던 게 사라탄 잘못은 아니었던 것이다·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제자님의 일을 돕는 걸 말하는 게 아니랍니다· 제가 말한 수행이란 건 스스로의 선한 마음을 닦는 일을 뜻해요· 스스로 갈고 닦지 않는다면 힘이 아무리 회복되더라도 결코 그 지팡이를 벗어나실 수 없을 거예요·
!!!!
사라탄은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이··· 이 정령 놈들· 그런 개짓거리를 해놨다고?!’
방금 왕자의 영혼이 담긴 설득에 감화된 사라탄은 허겁지겁 물었다·
그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선한 마음을 갈고 닦을 자신이 없습니다·
“뭐 저런 놈이 있어?”
이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벌써 자신이 없다고 시작하다니·
유크벨티레가 옆에서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미 선량한 자신과 달리 저 정령은 구제불능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령 님을 인도해줄 선한 마음의 길잡이가 있으니까요· 그 길잡이를 따라가면 정령 님도 선한 마음을 갈고 닦을 수 있을 거예요·
그 그게 누굽니까? 제가 아는 정령인가요?
-아뇨· 여기 제자님이요· 제자님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고 배우세요·
···
사라탄은 순간 세뇌 상태에서 벗어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