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9화
상대의 반응에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놈이 내 가문을 어떻게 아는 거지? 혹시···”
···설마 나를 의심하는 것이냐?
페르쿤트라는 계약자의 시선에 황당해했다·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너무 빠른 것 아닌가?
“혹시 흥분하셔서 말한 거 아닙니까?”
요새는 다 쓸어버린 것 같군· 이만 돌아가도록 하마·
뇌공왕은 스스로의 인내력에 자부심을 느꼈다· 저런 헛소리를 듣고서도 분노를 터뜨리지 않다니·
보통 수양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계약자와 계약을 맺고 나서 페르쿤트라 또한 정신적 성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르릉!
“음· 아닌 모양이군·”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고위 정령을 그렇게 의심해도 돼?”
“의심한 게 아니라 그냥 확인한 거지· 아니면 우리 변장에 실수가 있었나?”
이한은 자신과 친구의 옷차림을 확인해보았다·
둘은 지금 평소 걸치고 다니는 에인로가드 누더기 아니 에인로가드 교복 대신 무늬 하나 없는 평범한 외투를 위에 걸치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이걸로 신분을 알아보기 힘들 것 같았다·
“에인로가드 출신인 걸 알았어도 가문까지 맞힐 수는 없지·”
“그렇긴 하군·”
“그냥 최근 네 악명을 듣고 추측한 거 아니야?”
“···”
이한은 친구의 소름끼치는 추측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말도 안 돼· 계속 지하에 은둔하고 있던 놈이 소문만 듣고 날 맞힌다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지젤은 솔직히 그럴 가능성도 꽤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친구가 쌓아올린 최근 소문들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절대 그럴 리 없어· 모라디· 알겠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추측 같은 건 꺼내지 말라고·”
“···알겠으니까 진정해· 확실히 널 알아본 거 같긴 하더라· 정신 차리면 물어보자고·”
보기 드물게 말을 쏟아내는 친구를 진정시키며 지젤은 상대를 꽉 묶었다·
‘확실히 특이한 망토군·’
워다나즈가 관심을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한이 옆에서 다 안다는 듯이 속삭였다·
“금화로 환산하면 얼마쯤 나갈까 계산하고 있군· 그렇지? 사실 나도···”
“···아니· 전혀 안 했는데·”
“?!”
이한은 당황했다·
그렇다면 저 망토를 보고 어떤 생각부터 한단 말인가?!
잠시 후·
두 에인로가드 학생은 쓰러진 도적단 두목을 완전히 탈탈 벗겨먹었다· 이한은 상대의 부츠 아래 밑창까지 탐색 마법을 시전했다·
“없군· 실망인데·”
에인로가드에서는 종종 물자가 발견되는 곳이었기에 이한은 더욱 아쉬워했다·
“아무래도 이만한 규모의 부하들을 거느렸으니 그렇게 쩨쩨하게 숨겨놓을 리는 없겠지·”
“도적 주제에 이렇게 사치스럽다니!”
이한이 이상한 부분에 분노하는 사이 이빈타는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갖고 있던 장비부터 마법 아이템까지 모조리 사라졌다는 걸 깨닫자 이빈타는 허탈해했다·
“저주 받은 운명 같으니! 마법사들하고 엮이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 꼴이란 말이냐?”
“깼나? 내가 워다나즈 가문인 건 어떻게 알았지?”
“예전에 너희 가문 마법사를 본 적이 있다·”
이빈타는 순순히 대답했다·
다른 도적이었다면 자존심과 굴욕감 때문에라도 버팅겼겠지만 이빈타는 그런 부류의 도적이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워다나즈 가문의 핏줄 앞에서 건방을 떨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어떤 꼴을 당할지 몰라 벌벌 떨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가문 마법사를 본 적이 있다고? 언제?”
“남부 분화 혼란 때·”
“남부 분화 혼란 때면···”
손가락을 접어가며 년도를 확인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옆에서 듣던 지젤도 기억이 났는지 질문했다·
“십 년 전 일 아니야?”
“조금 더 됐지· 그러면 히에르단 형님께서 해결하신 일이겠군·”
이한의 입에서 워다나즈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 이야기가 나오자 지젤은 보기 드물게 흥미를 느꼈다·
사실 제국의 대귀족 가문치고 워다나즈 가문은 특이할 만큼 신비의 장막에 둘러싸인 가문이었다·
제국에 은둔하는 가문이 워다나즈 가문만 있지는 않았지만 워다나즈 가문 정도의 위명을 가지고서도 저렇게 은둔하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이다·
분명 워다나즈에게는 두 명의 형이 있었고 한 명은 저번에 본 정령의 주인이었으니···
‘첫째· 장남이군·’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군· 대마법사 한 명이 그 모든 혼란을 정리하는 모습은·”
이빈타는 묻지도 않았는데 내뱉었다· 그 목소리에는 아직도 공포가 생생했다·
“그렇겠지·”
지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문외한들이 대마법사의 마법을 보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당장 고유세계 같은 게 펼쳐지는 걸 보면 이제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법칙이 저 아래로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느낄 것이다·
“확실히 히에르단 형님이 좀 거북하시긴 해·”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빈타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 모습에 지젤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어라?
‘뭔가 다른··· 다른 것 같은데?’
방금 이빈타가 ‘무서웠다’라고 말한 것과 워다나즈가 ‘거북하다’라고 말한 건 서로 다른 의미처럼 느껴졌다·
전자는 마법의 초월적인 경지에 압도된 거라면 후자는···
‘애초에 워다나즈가 마법 때문에 거북해할 리가 없을 텐데?’
압도적인 마법을 보면 누구보다도 먼저 관심을 보일 녀석이 그것 때문에 가족을 거북해하는 건 말이 안 됐다·
지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거북하단 거지?”
“음? 그러니까 히에르단 형님은 좀··· 효율을 추구하시지·”
“···너도 그렇지 않나?”
“완벽주의적인 부분이 있으시고·”
“너도 그렇잖아·”
“사람을 조금 조종한다고 해야 하나···”
“너도 그렇잖···”
“모라디· 질문해놓고 그렇게 무례하게 굴 거면 왜 질문한 거냐?”
“아 아니···! 아니다· 내가 실언을 했어· 사과하지·”
지젤은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충분히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워다나즈의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다·
“나하고 차원이 다르다니까· 예시를 들어주지·”
이한은 친구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겪었던 일을 꺼냈다·
-도련님··· 여기··· 새로 들여온 책들입니다···
-고맙습니다· 여든 여덟 개의 눈을 가진 악마 하인님·
“잠깐·”
“?”
“···아니다· 계속해·”
지젤은 방금 하인에 대해 묻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야했다·
모라디 가문도 북부에서 꽤 척박한 곳에 있는 만큼 방문하는 손님들의 놀란 반응을 꽤 자주 보곤 했지만 워다나즈 가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바보도 쉽게 할 수 있는 장래성 높은 제국의 수익사업들>? 아니 이런 훌륭한 책을 대체 누가 갖고 들어온 겁니까? 처음 들어보는 책인데?
-후후··· 칭찬 감사합니다···
-여기 나온 적송화로 할 수 있는 사업이 특히 마음에 듭니다· 독특하고 다양한 꽃의 구근만 확보해놓으면 나중에 제국 원예가들에게 크게 돈을 받고 팔 수 있을 거라니· 더군다나 적송화는 구근을 바짝 말려서 보관해도 죽지 않는 식물이잖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실은 저택의 정원에도··· 심어놓은 게 있지요···
-혹 혹시 제가 좀 캐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도련님··· 도움이 되셨다면 나중에 가주님께 제 칭찬을 조금이라도 부탁드립···
“잠깐· 잠깐·”
듣다 못한 지젤은 결국 끼어들었다·
워다나즈가 저택에서 혼자 저러고 있었다는 게 재밌긴 했지만 지금 주제와는 너무 멀리 온 것이다·
“이게 무슨 상관인데?”
“좀 끝까지 들어봐· 모라디· 다 상관이 있는 이야기니까·”
“···알겠어·”
이한은 원래 이야기로 돌아왔다·
정보도 얻고 허락도 얻은 이한은 넓은 정원을 돌아다니며 적송화를 찾고 그 구근을 캐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수집하고 모으던 도중 이한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근데 이게 진짜 돈이 되는 게 맞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꽃잎이 좀 특이하고 예쁘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금화를 퍼부을 것 같지 않았다·
정신이 돌아온 이한은 <바보도 쉽게 할 수 있는 장래성 높은 제국의 수익사업들> 책을 확인했다·
너무나도 유혹적인 제목 때문에 확인도 하지 않고 읽었지만 원래 책은 저자도 중요한 법·
가이난도가 쓴 <에인로가드에서 살아남는 법>과 가르시아 교수가 쓴 <에인로가드에서 살아남는 법>은 제목이 같아도 그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자가 없었다·
-이거 누가 지은 겁니까?
-도련님··· 책의 지혜가 중요한 것이지··· 누가 지은 건지는 중요하지 않···
-···안 말하면 정원을 더럽혔다고 누명을 씌우겠습니다!
-제 제발···! 그것만은···!
이한이 심문하자 결국 악마 하인은 진실을 토해냈다·
책의 저자는 정말 상상도 못한 사람이었다·
“해골 교장?”
“뭐? 뭔 해골 교장이야?”
“아 아니··· 상상도 못한 사람이라길래 떠오르는 게 없었어·”
“모라디· 여기서 나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잖아· 당연히 히에르단 형님이지·”
“?”
지젤은 납득하지 못했지만 이한은 이미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 뒤였다·
-형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이한이냐? 2분 24초를 주도록 하지· 그 안에 용건을 끝내거라·
-앗· 예· 30초 안에 끝내겠습니다· 혹시 형님께서 <바보도 쉽게 할 수 있는 장래성 높은 제국의 수익사업들>을 직접 지으셔서 제 서재에 넣으신 겁니까?
-그래· 맞다·
-···어째서 말입니까???
-최근 알라르롱과 같이 돌아다니는 대신 지나치게 책을 많이 읽는다고 들었다· 마법에 입문하기 전 균형 잡힌 육체를 유지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어··· 그냥··· 걸으라고 말을 해주셔도 됐을 것 같습니다만···
-그랬다면 너는 반발했겠지· 억지로 시켜서 효율이 떨어졌을 가능성도 있겠고· 하지만 너는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육체를 건강하게 만들었다· 왜 만족스러워하지 않지?
-···아니 책이 가짜인데 어떻게 만족스럽겠습니까!?
-그렇다면 진실을 파헤치지 말았어야지· 교훈을 얻었다면 앞으로 그러지 말도록·
-···
상대가 대마법사고 다른 차원에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아니다· 아니었어도 뭘 하진 못했겠군·”
“···”
현실로 돌아온 지젤은 이한의 이야기에 압도되었다·
지젤도 자신의 언니인 지클린이 꽤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워다나즈와 비교하니 언니는 꽤나 상식적이고 멀쩡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냥 검술이 조금 뛰어나고 호승심이 조금 강한 정도!
“어쨌든 내가 왜 거북하게 느끼는지 알겠지?”
다른 탑의 못된 친구들에게 ‘워다나즈 이 자식! 사람을 조종하다니!’같은 누명을 자주 쓰는 이한이었지만 첫째 형과 비교한다면 이건 조종하는 것도 아니었다·
저 <바보도 쉽게 할 수 있는 장래성 높은 제국의 수익사업들> 같은 책은 정말 운이 좋아서 알아차렸다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일들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내가 다른 차원의 강한 존재들과 자꾸 맞부딪치는 것도 형님의 계략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건 절대 아닐 것 같은데·”
지젤이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이한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자신의 불운을 누군가한테 책임지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빈타· 나는 형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가진 마법사니까 안심해도 좋다·”
“···”
이빈타는 자신도 모르게 통로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벼락이 남기고 간 상흔이 지독할 만큼 생생했다·
‘이 새끼 더 미친 새끼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