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8화
‘이상하군·’
제자가 강적과의 위험한 승부를 즐기는 성품이긴 했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악신 교단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건 확실히 위화감이 있었다·
“다 됐다! 교수님! 어서 들어가서 따끔하게 말해주세요!”
“!”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볼라디 교수는 가이난도의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가이난도가 지하 요새로 내려가는 샛길을 파놓은 것이다·
옆을 보니 가이난도의 자랑이자 가장 자주 부리는 소환수 가시 레버넌트가 뼈삽으로 변형된 팔을 들고 흙을 치우고 있었다·
원래 저런 형태였을 리는 없을 테니 가이난도가 즉석에서 언데드의 형태를 변형시킨 게 분명했다·
“용케 뚫었군·”
“네? 뭐가요?”
가이난도는 볼라디 교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통로 말이다·”
여기 지하 요새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도적들이 제법 돈을 들였는지 통로와 은신처의 방어가 꽤 단단하고 두터웠는데 가이난도는 그걸 이렇게 짧은 시간에 뚫어버린 것이다·
언데드의 형태를 변형시키는 것만으로는 힘들 텐데···
“아· 부식성 독을 썼어요· 원래는 제가 쓰레기 치울 때 쓰는 독인데··· 헉· 이건 이한한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설명하던 가이난도는 뒤늦게 깨닫고 허둥지둥 말을 돌렸다·
탑에서 나온 쓰레기를 치울 때는 멀리 가서 제대로 처리해야지 귀찮다고 독으로 녹여버리면 호되게 등짝을 두들겨 맞았다·
“제가 평소에는 진짜 제대로 하거든요? 교수님? 교수님?”
가이난도는 어떻게든 변명하려고 했지만 이미 볼라디 교수는 통로로 들어간 뒤였다·
* * *
“이런 지하요새에서 고위 정령을 소환하는 건 안 좋을지도 모르겠어·”
이한은 순식간에 조용해진 통로를 따라 걸어가며 말했다·
사실 지금 요새 통로를 그냥 ‘조용해졌다’라고 표현하면 도적들에 대한 모욕이었다·
요새 통로는 완전히 대파되었다·
오랜만에 멀쩡한 이유로 소환된 페르쿤트라는 기쁨의 폭력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통로의 기관장치를 부숴버리고 함정을 집어삼키며 가끔은 격벽을 잡아 뜯어 도망치는 도적들을 밀폐된 방 하나에 쑤셔박았다·
번개로 이뤄진 종말이 오랫동안 가꿔 온 지하요새를 모조리 초토화시켰지만 도적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평소 마법사와 싸울 때를 대비해 비축해놓은 스크롤이나 물약 마법 아이템은 꺼내지도 못했다· 페르쿤트라는 그럴 시간도 주지 않고 통로를 무너뜨렸다·
각자 정해 놓은 위치로 흩어져 시간을 끌거나 끈질긴 유격전을 펼치지도 못했다· 페르쿤트라는 대충 영혼들이 숨어 있는 게 느껴지면 나올 기회도 주지 않고 가둬버렸다·
“···”
지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워다나즈와 말을 섞었다가는 순식간에 집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방심하지 말자· 방심하지 말자· 방심하지 말자···’
정령왕이 벼락처럼 할퀴고 간 흔적을 보면 ‘이미 다 끝난 거 아니야?’하는 속삭임이 마음속에서 올라왔지만 지젤은 그 속삭임을 무시했다·
“미··· 미친 마법사 놈들·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덤벼든 거냐?”
“!”
그리고 놀랍게도 그 집중은 보답받았다· 통로 끝에서 웬 도적 한 명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마치 땅굴을 헤엄쳐서 나온 것처럼 정신없는 행색이었다· 머리는 봉두난발이고 원래라면 제법 비쌌을 옷도 진흙과 구멍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오직 눈동자만 충격과 공포 원망으로 생생하게 빛났다·
“보라고! 워다나즈! 남은 도적이 있었어!”
“···모라디·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페르쿤트라가 쓸고 지나갔는데 도적이 나왔다면 당황해야 할 일이 아닌가?
흥분했던 지젤은 뒤늦게 목소리를 낮추고 헛기침을 했다·
“네가 방심했을까봐 지적했을 뿐이야·”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다 맡기지는 않아도 되겠는데·”
지젤은 검끼리 탁탁 부딪치며 서릿발을 일으켰다·
기껏 고생해서 돌입했는데 정령왕에게만 모든 걸 맡기면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리 워다나즈의 목적을 돕는다 하더라도 바보 황자처럼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쪽 이름은?”
“난 이빈타다·”
“이빈타? ···이빈타? 무쇠망토 이빈타?!”
지젤은 깜짝 놀랐다·
“누군데?”
“십 년쯤 전인가··· 그 때 이름 날렸던 수배범이야· 당연히 죽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숨어 있었지· 쥐도 새도 모르게·”
이빈타는 대답하며 뿌드득 이를 갈았다· 아직도 지금 상황이 현실성 없는 악몽처럼 느껴졌다·
폐허 마을 바닥이 부서지고 나서 1초·
-침입자! 침입자입니다!
-아까 그 어슬렁거리던 놈들인가? 없애버려!
침입자 경보가 울리자 이빈타는 시큰둥하게 명령을 내렸다·
폐허 마을 바닥이 부서지고 나서 5초·
-침입자가 생각보다 강한 모양입니다! 전투 마법사 같아요!
-통로 막고 함정 가동시켜·
곧이어 온 보고에도 이빈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전투 마법사 한둘로 돌파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폐허 마을 바닥이 부서지고 나서 10초·
-길 다 닫고 벽 열었습니다! 새로 온 놈들 집어넣어서 놈들의 힘을 빼버리겠습니다!
-그래· 새로 온 놈들 실력 좀 보자·
드워프들에게 비싼 돈을 주고 의뢰한 통로가 제값을 한다는 보고에 이빈타는 킬킬댔다· 갇힌 전투 마법사들은 사방에서 몰려드는 도적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폐허 마을 바닥이 부서지고 나서 15초·
-요새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뭐? 뭐? 뭐???
쿠르르르르릉!
요새 가장 아래의 호화로운 방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이빈타는 부하를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돌아온 소리는 요새 전체가 흔들리고 찢겨나가는 울음소리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요새 곳곳에 연결된 전성관(傳聲管)으로 소리치고 명령을 내렸지만 소름끼치는 침묵만 돌아올 뿐·
술이 확 깨는 걸 느끼며 이빈타는 즉시 결정을 내렸다· 갖고 있는 모든 걸 포기하고 망토에 깃든 마법을 시전한 뒤 흙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저 망토 덕분에 걸리지 않은 건가? 모라디· 저건 고대 유물 같다· 상당히 마법이 독특해·”
이한이 속삭였다·
어떻게 페르쿤트라한테 걸리지 않고 여기까지 올라왔나 싶었는데 망토의 힘으로 땅을 헤엄쳐 올라온 게 분명했다·
심지어 느껴지는 마법은 요즘 제국에서 보이지 않는 유형의 마법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직접 분석해보고 싶었다·
“뭘 속삭이나! 기습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
이빈타가 으르렁댔다·
두 전투 마법사가 기습을 계획하고 있다고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망토가 있는 한 기습은 통하지 않았다· 이빈타는 마법사들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워다나즈가 이 와중에 마법 분석하고 있었다는 건 말하지 말아야겠군·’
지젤은 상대를 도발해볼까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너무 필요 이상으로 도발해버리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이미 충분히 도발이 걸린 상태였다· 1분도 안 되어서 요새가 박살난 도적단의 우두머리 아닌가·
“역시 그 놈 때문인가? 키타렌아눔? 그 놈을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뭐!? 키타렌아눔이 여기 있었나?!”
이번에는 이한이 깜짝 놀랐다·
저번에 공허 괴물 사건 때 당연히 같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마법범죄자가 살아 있었을 줄이야·
‘대체 어떻게 목숨을 건진 거지?’
“···키타렌아눔 때문에 온 게 아니었다고?”
이빈타는 살짝 더 혼란스러워했다·
당연히 키타렌아눔 때문에 이 모든 난리가 일어났다고 생각했었는데?
“밖에 수준 높은 마법이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키타렌아눔의 마법이었나·”
“그럼 여긴 대체 뭐 때문에 온 거냐?”
“악신숭배자를 확인하려고 왔다·”
“···?”
이빈타는 귀를 의심했다·
여기 지하 요새에 온갖 죄를 짓고 도망친 놈들은 많았지만 그 중에 악신숭배자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놈은 여기 없는데? 누굴 말하는 거냐? 아니 어느 교단?”
“과연· 없나· 그럼 다행이군·”
“···”
상대 마법사의 대답에 이빈타는 등골에 차가운 고드름이 박힌 것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일단 확인해보려고 이 난리를 피웠단 말인가???
이빈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총천연색으로 바뀌었다· 차라리 자신의 옛 악명이나 도적단 토벌 때문에 왔다는 이유가 더 납득이 갈 것 같았다·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느냐!?”
“나도 이렇게 규모가 큰 도적단인 줄 몰랐다· 덤벼오니 어쩔 수 없었지·”
이한은 당당했다·
원래는 볼라디 교수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악신숭배자인지 아닌지만 확인하려고 했는데 일을 키운 건 여기 도적들이었다·
이빈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지젤은 상대가 이러다가 그냥 쓰러지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럼 이것도 대답해봐라· 내가 왜 도망쳐도 모자랄 시간에 여기서 너하고 말을 나누고 있었을까?”
도적단 두목의 목소리에는 교활함이 번뜩였다· 그 낌새에 지젤은 살짝 움찔했다·
‘아니··· 설마···? 괜찮겠지·’
지젤이 보기에 워다나즈도 절대 교활함으로는 누군가한테 밀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바로 맞아떨어졌다·
이한이 별로 놀라지 않고 대답한 것이다·
“그야 망토의 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망토의 마법 유형도 멀리서 인식했는데 힘이 충전되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 대답에 이빈타는 크게 당황했다·
“알고 있었다고?”
“그래·”
“···힘이 돌아와도 제압할 수 있다 이거냐? 건방진 놈· 그 건방의 대가를···”
“아니· 그건 아니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빈타의 아래에서 페르쿤트라가 흙을 뚫고 솟구쳐 올라왔다·
콰지지지직!
벼락으로 된 정령의 육신이 몸을 파고들자 이빈타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쓰러지는 이빈타의 귓가에 마법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도 정령을 다시 불러오고 있었거든·”
사과하마· 너무 흥분해서 멀리까지 가버렸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멀리 가시면 어떡합니까?”
‘정령이··· 아직까지 소환된··· 상태였다고···?’
이빈타는 흐려지는 시야로 전투 마법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까는 요새가 박살났다는 충격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이상하게 놈의 이목구비가 낯익었다·
왜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인가?
-요약하자면 문제는 다음과 같군· 역병과 기근으로 인한 식량 부족· 반란군과 도적들의 연합으로 인한 위협적 세력· 마력 폭주로 인해 산맥에서 내려온 몬스터 군세· 이번 현계에는 이틀밖에 머무르지 못하니 차례대로 해결할 수밖에 없겠어· 각 가문들에게 서신을 보내서 식량을 각출하도록 하게· 위협적 세력과 몬스터 군세는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
‘기억났다···!’
예전 이빈타가 <칸글라의 조영>을 떠나게 된 사건·
그 때 이빈타는 남부 분화(噴火) 혼란을 틈타 반란군의 의뢰를 받고 제국 진영에 첩자로 잠입했었다·
그리고 그 때 생전 처음으로 대마법사를 목격했었다·
지지리도 말을 듣지 않던 남부 가문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고분고분한 양으로 만든 것도 놀라웠지만 가장 놀라웠던 건···
단 반나절 만에 반란군과 도적들의 연합군을 쓸어버리고 몬스터 군세까지 토벌해버린 일이었다·
-남은 전리품들은 장부에 적은 대로 가문들에게 나눠주도록 하게· 마르시오 비칼레 가문 같은 경우는 불만을 보일 테니 처음에는 절반만 제공하고 불만을 보이면 그 때 원래의 양을 주도록· 라렌 가문은 고나달테스 공의 인정에 목말라하는 가문이니 공의 친필 치하 서신을 전해주게· 가짜지만 눈치채지 못할 테니···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와서 제국의 관료들에게 뒤처리를 명하는 그 소름끼치는 모습에 이빈타는 결심했었다·
대마법사와 맞부딪칠지도 모르는 조직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겠다고!
<칸글라의 조영> 소속 모험가들은 ‘대마법사가 뭐 그리 대수냐’하고 지껄여댔지만 이빈타는 완전히 기가 꺾여버린 것이다·
그 때 허겁지겁 도망쳤던 기억이 떠오르자 대마법사의 신분도 같이 떠올랐다·
분명 대귀족 가문의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워다나즈 가문···!!’
이빈타는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혼절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워다나즈 가문이면··· 미리 말하란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