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7화
‘저 놈이 왜 여기 있는 거냐?’
누구 때문에 왔는지는 아직 몰랐지만 키타렌아눔은 과연 노련한 마법범죄자였다·
회복도 덜 된 상황에서 강력한 전투 마법사와 맞붙을 만큼 무모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하다 싶으면 도망친다·
이 간단한 원칙을 지키는 제국의 범죄자는 은근히 드물었다·
키타렌아눔은 작은 방 안에 풀어놓은 짐을 전부 챙긴 뒤 복도 끝 창고로 걸어가 말린 고기와 빵을 싹 쓸어 담았다·
그리고는 투명 장막을 뒤집어쓴 채 지하 탈출로로 달렸다·
‘잘 해봐라· 이빈타! 네놈에게 도적의 행운이 따르길 비마!’
* * *
“이상하군·”
사실 볼라디 교수는 무쇠망토 이빈타를 찾아서 여기에 온 게 아니었다·
근처 숲으로 도망친 목장주가 하나 있어서 찾아왔다가 폐허 마을을 발견한 것이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저기 원견(遠見) 마법도 설치되어 있고요·”
이한은 예리한 감각으로 폐허 잔해 위에 설치된 마법을 알아차렸다·
근처만 마력의 흐름이 다른 듯한 기묘한 위화감이 있었던 것이다·
지젤은 친구의 말에 빤히 쳐다보았다·
“왜?”
“아무것도 아냐·”
친구의 감각이 점점 더 사람이 아닌 괴물의 영역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정말 다음 학기 정도 되면 사람보다는 교수에 가까워질지도···
“와· 누군지는 몰라도 진짜 멍청한 놈인가봐·”
가이난도가 비웃었다·
근처에 이렇게 들킬 만한 마법을 걸어놓으면 ‘나 여기 있소’라고 외치는 셈 아닌가!
물론 이건 도적들에게도 키타렌아눔에게도 억울한 모욕이었다·
도적들은 마법범죄자가 멋대로 민폐를 끼쳐놓은 것이었고···
···키타렌아눔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었으니까·
-저런 곳에 숨겨놓은 마법을 감각만으로 찾아내는 놈이 괴물이지 그걸 예상해서 위장을 해놓으란 말이냐!?
안 그래도 부상이 심각한데 그런 곳까지 쓸 마력은 없었다·
“숲으로 숨은 목장주가 걸어놓은 마법일까요?”
“아니· 마법의 수준이 높군·”
볼라디 교수는 목장주의 정보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국 법으로 금지된 변종 코카트리스 알을 몰래 들여와서 팔다가 사고를 내고 도주한 자였는데 마법 수준이 높은 자라면 이런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다·
전형적인 문외한의 사고·
“마을에 흔적이 있군·”
“흔적 말입니까?”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마법 말고 이 폐허에서 별다른 흔적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잔해가 인위적이다·”
“!”
교수의 대답에 이한은 크게 놀랐다·
단순히 먼지 쌓이고 부서진 잔해라고 넘기는 게 아니라 거기서 인위적인 규칙성을 발견하다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폐허는 불규칙해야 했던 것이다·
‘과연·’
“지하에 숨어 있는 자들이 있을 수 있겠어·”
볼라디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숲을 확인할 테니 일단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이한과 지젤은 즉시 대답했다· 가이난도는 기뻐하며 옆 바위 위에 앉았다·
‘후후· 이번은 쉽게 가겠구나·’
“가셨나?”
“음·”
“그럼 가자·”
지젤의 말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폐허로 다가갔다·
바위 위에 앉아서 막 쉬려던 가이난도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어딜 가?!”
“교수님 오시기 전에 지하에 숨은 놈들 잡을 건데·”
“···”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이한과 지젤의 모습에 가이난도는 자신이 순간 이상한 건가 싶었다·
‘내가 이상한가?!’
분명히 배그렉 교수님은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는데···?
“이 이한· 혹시 배그렉 교수님하고 싸웠어?”
“아니· 싸웠으면 내가 이렇게 멀쩡하진 않겠지·”
‘그럴듯한데?’
지젤은 속으로 감탄했다·
확실히 논리적인 대답이었다·
“근데 왜 멋대로 들어가려는 건데?”
“음·”
이한과 지젤은 시선을 교환했다·
혹시라도 볼라디 교수가 폭주하는 일을 막기 위해 악신과 관련된 정보를 먼저 숨겨야 한다는 걸 알리지 않고 가이난도를 설득할 수 있을까?
“원래 내가 도전에 미친 놈이잖나·”
“맞아· 완전히 미친 놈이지·”
이한의 말에 지젤은 맞장구를 치며 거들었다· 이한이 빤히 쳐다보자 지젤은 당황해서 속삭였다·
“거 거든 거잖아·”
“감정이 섞인 것 같은데··· 여하튼 고맙다·”
가이난도는 둘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이한은 원래 그랬지· 가자·”
“···”
친구가 너무 쉽게 납득하자 이한은 기뻐해야 할지 친구를 걱정해야 할지 살짝 고민이 됐다·
“그래· 그럼 들어가자·”
“근데 위험하지 않을까?”
“수도에서 멀지도 않고 마을도 별로 안 큰데 있어봤자 열댓명 정도겠지·”
이한은 수정 팽이 점술로 위험을 확인했다· 결과를 보니 그렇게까지 위험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일어나라· 뼈로 이루어진 골렘이여·”
용아병 골렘을 소환한 이한은 가이난도에게도 소환수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옆에서 같이 전투를 대비하며 지젤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입구는 어떻게 찾을 생각이지?’
마을이 별로 크지 않다지만 이런 페허에 은신처가 숨겨져 있다면 입구를 찾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게다가 위장 솜씨만 봐도 얼뜨기들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볼라디 교수 정도의 사냥꾼이 아니라면 위화감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다 됐나?”
“응· 그런데 어떻게 찾···”
이한은 커다란 수옥탄을 닥치는 대로 폐허 바닥을 향해 갈겨대기 시작했다·
마력을 믿고 될 때까지 난사하자 마치 주변은 커다란 우박이 내리는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콰지직!
결국 불운한 바닥 하나가 꺼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한은 구멍을 확장시킨 뒤 안으로 뛰어내렸다·
“···”
“···”
그리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스무 명의 중무장한 도적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한도 도적들도 서로 크게 놀랐다·
“침입···!”
“생각보다 숫자가 많다! 다들 조심해! 쪼개져라 페르쿤트라의 벼락이여!”
“아아악! 이 미친 마법사 새끼가!”
당황한 것치고는 너무나도 빠르게 연쇄 벼락을 갈기는 마법사의 모습에 도적들은 비명을 지르며 통로 뒤로 물러났다·
“가이난도! 넌 내려오지 말고 소환수만 보내!”
“그만 떠들고 집중해!”
어느새 내려온 지젤이 등을 퍽 치며 외쳤다·
위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은신처의 규모가 너무나도 컸다· 방금 도망친 도적들의 숫자도 그렇고 통로만 봐도 그 규모와 질이 느껴졌던 것이다·
암석을 파서 만든 통로에 차단이 가능한 벽· 거기에 온갖 함정까지· 이건 위에 있는 황자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파파파파파팍-
도망친 도적들이 벌써 작동시켰는지 사방에서 암기가 날아왔다·
이한은 용아병 골렘을 시켜 벽과 장치를 부수고 남은 공격은 염동력으로 막아냈다·
“무슨 요새인가?!”
“너무 성급했어!”
지젤은 아차 싶었다·
워다나즈의 목표만 신경 쓰다가 상대를 너무 얕본 것이다·
이런 마을에 숨어 있는 놈들이라고 해봤자 별로 대단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어· 이렇게 방심하다니!’
철컥!
어느새 위에 들어온 통로가 닫히고 양 옆 벽이 새로 열렸다· 그리고 도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지젤은 사납게 검을 흩뿌리며 다가오는 도적들을 무력화시켰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냉기가 파도치자 도적들은 이를 갈며 외쳤다·
“마법사다! 냉기 저항 물약 갖고 오라고 해!”
“워다나즈 지원 좀···!”
일단 여기 있는 적들을 쓸어버리고 위로 다시 올라갈 생각으로 몰아붙이던 지젤은 이상함을 느꼈다·
원래라면 자신보다 몇 배는 되는 화력으로 마법을 퍼부어줘야 하는 친구가 잠잠했던 것이다·
“···당신을 부릅니다!”
거대한 공간의 일그러짐과 함께 뇌공왕이 지하 요새의 암반을 찢어발기며 그 살벌한 위광을 드러냈다·
지젤은 경악해서 외쳤다·
“정령왕을 소환했어?!?”
“상··· 상대가 생각보다 강하잖아·”
이한은 확실히 뛰어난 에인로가드의 마법사였다·
예상이 빗나가는 순간 괜한 고집을 부리는 대신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전력을 투입한다·
물론 그게 닭 잡는 데 드래곤 잡는 칼을 쓰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긴 하겠지만···
놀랍군! 뇌공왕을 이런 멀쩡한 이유로 부를 줄이야! 평소에도 좀 이러지 그랬느냐!
모처럼 멀쩡한 이유로 소환된 페르쿤트라는 매우 신이 나서 지하 요새를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드워프들한테 비싸게 사들였을 장치와 통로 격벽들이 자연재해에 날아가는 모습에 지젤은 그녀 자신도 모르게 동정심을 느꼈다·
‘도적들이지만 정말 재수가 없군···!’
* * *
“교수님! 교수님!”
가이난도는 바로 숲을 향해 외치며 달리려고 했다·
그나마 열려 있던 입구까지 닫히고 친구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가이난도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그러나 볼라디 교수는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옆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
넘어진 가이난도는 순간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볼라디 교수가 맞았다·
“언 언제 오셨어요?!”
“저기서 대기하고 있었다·”
볼라디 교수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제자가 최근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었는데 볼라디 교수가 못 느낄 리 없었다·
숲을 수색한다고 자리를 비우면 바로 멋대로 돌입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 그런···! 물론 이한이 요즘 목숨 걸고 무모한 짓을 하긴 했지만 그건 원래 그랬···!”
이한은 원래 그랬다고 하려던 가이난도는 말끝을 흐렸다·
우정을 위해 계속 아니라고 부정해왔지만 솔직히 요즘 이한은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했다·
혹시 교장 선생님한테 패배한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콰르르르르릉!
“무 무슨 소리죠?”
“뇌공왕을 소환했군·”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와 강력한 정령의 기운에 볼라디 교수는 바로 상황을 짐작했다·
제자가 저 상황에서 소환할 만한 정령은 뇌공왕밖에 없었다·
···고작 도적들과 싸우기 위해서 꺼냈다는 게 좀 이상하게 들리긴 했지만 마력량을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이상하지도 않았다·
“그··· 그러면 교훈은요?”
“교훈?”
“교수님이 도우러 들어가시고 이한이 반성해서 앞으로 위험한 곳에 가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걸 계획하신 거 아니었어요?!”
볼라디 교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이난도의 장황한 계획 같은 건 볼라디 교수의 원래 생각과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이런 곳에 숨어 있는 도적단들 수준으로는 제자를 반성하게 할 만큼 위기에 몰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도 바로 뇌공왕을 소환하지 않았는가·
볼라디 교수는 그냥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대기하고 있었던 거였다·
친구가 교훈을 얻을 수 없다는 말에 가이난도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 돼!’
“교수님! 교수님이 따끔하게 말씀해주셔야 해요!”
“잘 모르겠군·”
볼라디 교수는 회의적이었다·
말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는 법·
하지 말라 그런다고 말을 들을 만큼 제자의 성격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장 볼라디 교수도 학생 시절 때는 말을 듣지 않았던 만큼 더더욱 그랬다·
“요즘 자꾸 이한이 혼자서 토벌하려고 한다니까요!? 게다가 최근에는 또 악신숭배자한테 꽂힌 거 같은데 악신숭배자를 혼자서 토벌하려는 놈이 어딨냐구요!”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내는 탓에 가이난도는 볼라디 교수가 움찔하는 걸 보지 못했다·
사실 냉정한 상태였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철저한 계획과 강철 같은 의지가 있다면 불가능하진 않···”
“불가능하죠! 완전 미친놈이나 할 일이라니까요!”
“···”
볼라디 교수는 살짝 머뭇거렸다·
뭐라고 반박해보려다가 볼라디 교수는 결국 포기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렇죠?! 교수님이 그렇게 말해주셔야 해요!”
“어느 교단이지? 프라흐갈?”
제자와 가장 악연이 깊은 교단은 이 생명력 넘치는 키메라들의 교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방학을 틈타 토벌에 심취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닐걸요? 이한이 관련 책을 읽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러면 크삭사리골인가·”
“아뇨· 관련 수배서 봐도 별 반응 없던데요·”
가이난도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예리함을 발휘했다·
그 예리함에 볼라디 교수는 의아해했다·
두 교단 말고 제자와 관련이 있는 악신 교단이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