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화
해골 교장이야 그렇다 쳐도 가르시아 교수까지 저러자 이한은 살짝 시무룩해졌다·
‘둘 다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물론 두 사람이 볼라디 교수에 대해 더 오랫동안 알고 지내긴 했다·
특히 해골 교장 같은 경우에는 볼라디 교수의 학생 시절도 알고 있을 터·
이한 입장에서는 확실히 알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아마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내셨긴 하겠지·’
에인로가드 복도를 침 뱉으면서 걸어가다가 다른 탑 보이면 주먹을 날리고 비버 수인 보이면 마법을 날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달라질 수 있는 법 아니겠는가·
실제로 최근에 볼라디 교수는 학파 제자 숫자가 100% 증가하자 놀라울 만큼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었다·
진심 어린 제자들의 설득으로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녀석·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군·’
해골 교장은 제자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은근히 쓸데없는 잡생각을 자주했다·
감정 표현이 적은 조각상 같은 이목구비 때문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여서 다른 교수들은 잘 속아 넘어갔지만···
해골 교장은 넘어가지 않았다·
딱!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다시 지팡이로 한 대 맞자 이한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종종 이 스승은 사악한 독심술 능력을 보여줄 때가 있었다·
본인은 ‘네 마력을 뚫고 생각을 읽을 마법이 있으면 에인로가드 영지에 성이나 하나 더 짓겠다’고 타박했지만 원래 뛰어난 대마법사는 거짓말에도 능하지 않은가·
‘진짜 환상 마법으로 읽는 거 아닌가?’
딱!
해골 교장은 한 대 더 때린 다음 말했다·
“받아 적어라·”
“예·”
“몰락해서 사라지기 전의 악신 놈 이름은 생귀로스· 숭배자들은 ‘공정한 섭정관’이라고 불렀다· 옛날 서부 뱀파이어들이 선호했고···”
원래 이런 악신에 관한 정보는 필요하지 않다면 굳이 알려주지 않는 편이었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존중하는 해골 교장도 몇몇 지식은 통제를 걸어놓는 편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런 악신에 관한 지식이었던 것이다·
해골 교장이나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 같은 시니컬한 대마법사들의 이론에 따르면 신격이란 것은 영혼 가진 필멸자들의 집단적 무의식으로 이뤄진 힘·
역으로 생각하면 아는 순간 엮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됐다·
대부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아주 가끔 불운에 불운이 겹치면 인생이 꼬일 수가 있었다·
당장 프라흐갈 교단만 해도 평소에는 기분 나쁜 촉수 키메라로 변신하려는 머저리들의 집단으로 보였지만···
···사람이 절체절명의 상황에 빠지면 프라흐갈이란 악신이 가진 생명과 재생의 힘이 긴박히 머릿속에 떠오를 수가 있었으니까·
특히 적극적으로 이상한 짓들을 많이 하는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의 경우 좀 더 주의가 필요했다·
“근데 넌 뭐 괜찮겠지·”
“이한 학생은 이미 다른 악신들과도 많이 접해서 숨긴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을 것 같아요·”
“···교수님·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을까요??”
해골 교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가르시아 교수의 말이 뾰족하게 마음에 박혔다·
마치 포기한 것 같은 태도!
학생을 사랑하는 가르시아 교수가 보였다고는 믿기 힘든 태도였다·
“없어요· 없어· 그냥 이한 학생에 대해 반쯤 포기하고 믿는 거죠·”
“교수님···!”
이한은 다시 감동했다· 역시 가르시아 교수였다·
“포기했다는 말은 왜 못 들은 척 넘어가는 거냐?”
해골 교장은 옆에서 빈정거리며 설명을 계속했다·
이 생귀로스라는 악신은 특이하게도 ‘공정한’이라는 칭호가 붙었는데 이유는 이 악신이 가진 특성 때문이었다·
제물을 바치면 그에 걸맞은 힘을 내려주는 것이다·
문외한이라면 ‘그게 뭐가 특별하냐’고 물을 수 있었지만 사실 특별한 게 맞았다·
기본적으로 신성은 무언가를 바친다고 꼭 보답을 돌려주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 등가교환이 성립한다면 지금 불사조 탑 학생들은 자유자재로 신성 마법을 쓰고 있었을 터였다·
“하긴· 저도 운이 좋아서 신성 마법을 몇 개 받긴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힘들죠·”
“이한 학생은 운이 아니라 그냥 마력이··· 아니· 됐어요· 계속 듣죠·”
여하튼 재깍재깍 보상을 돌려주는 생귀로스의 특성은 숭배자들에게 아주 강한 충격을 주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신과 달리 얼마나 매력적으로 느껴졌겠는가·
“수상하군요· 그렇게 좋기만 한 거래가 있을 리 없잖습니까·”
“눈치가 많이 좋아졌군그래·”
당연히 거기서 끝났다면 악신이란 말도 붙지 않았을 것이다·
생귀로스는 기본적으로 유혈이 낭자한 제물을 선호했고 더 많은 피를 바치는 자에게 더 많은 보상을 주었다·
이런 체계는 필연적으로 폭력과 파국을 부를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결국 들통 나서 몰락했지· 원래 이런 놈들은 오래 가기가 힘들다·”
이 생귀로스에 비교한다면 프라흐갈이나 크삭사리골은 차라리 얌전한 편이었다·
지역을 피로 물들이는데 이목이 안 쏠릴 수가 없었다·
“대대적으로 토벌이 진행됐겠군요·”
“대대적으로? 음··· 뭐· 그런 셈이지· 하여간 대충 이런 놈이니 처음 보는 이방인이 찾아와서 공정한 거래로 힘을 주겠다고 꼬드겨도 속아 넘어가지 마라·”
“저를 무슨 머저리로 보십니까?”
“마법 가르쳐준다고 해도 믿지 말고·”
‘혹시 진짜 머저리로 보시는 건가?’
이한은 살짝 의심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걱정할···
“대충 피 좋아하고 묘하게 강해보일 것 같은 놈이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거나 하면 주의하고·”
“에인로가드에 많은 것 같은데요·”
“2학기 때 외출할 일 많을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군·”
해골 교장은 가르시아 교수를 보며 말했다·
2학년 2학기 때부터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날품팔이 아니 정당하고 고귀한 의뢰를 통해 금화를 확보해야 했다·
안 그러면 3학년 때부터 미친듯이 소모되는 마법 비용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필연적으로 외출할 일이 확 늘어나는데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배그렉 교수님은 어차피 에인로가드에 계속 계실 텐데 뭐가 걱정이십니까?”
이한이 의아해하며 물었지만 해골 교장은 무시하고 가르시아 교수와 말을 이어나갔다·
“워다나즈 녀석만 그냥 내보내면 마법범죄자 놈들이 파리처럼 달라붙을 테고 그렇다고 배그렉 교수를 붙여주면 악신숭배자 잔당 놈들이 모기처럼 달라붙을 수도 있지 않은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네요·”
늑대와 염소와 양배추를 가지고 무사히 강을 건너는 문제처럼 이 문제 또한 해결하기 복잡했다·
이한 학생만 내보내면 마법범죄자가 붙고 배그렉 교수를 붙이면 악신숭배자가 붙고···
“!”
이것저것 방안을 고민하던 해골 교장은 눈썹을 찡그렸다·
던전 바깥의 저택 인근에서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저택 근처에 모기가 돌아다니는군·”
“예? 어떤 미친놈이 말입니까?”
이한은 추격자가 저택 근처를 기웃거린다는 사실에도 두려워하거나 떠는 대신 깜짝 놀랐다·
기본적으로 여긴 드래곤의 저택이었다· 조우린이 아직 미성숙하긴 했지만 전투력이 약한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위험하지·’
스스로를 통제 못하는 드래곤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여기에는 에인로가드의 종말과 해골 교장이 있지 않은가·
물의 정령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구석에서 던전을 돌보던 걸 멈추고 황당해했다·
어떤 미친 필멸자가 이 주변을 기웃거리지?
“아무래도 정말 부활한 게 맞는 모양이다· 나와라!”
해골 교장이 성마르게 명령하자 담벼락을 넘어 자택 안으로 침입할 방법만 엿보던 침입자가 갑자기 통로 끝에 나타났다·
“!”
침입자는 순간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곧 침착을 되찾았다·
상대는 지금 수도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들어온 것치고는 너무나도 평범한 모습이었기에 역으로 놀라웠다·
낡은 갈색 튜닉을 걸치고 손에는 둥그런 작업용 동판을 들고 있는 모습이 누가 봐도 도시의 길드 소속 일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침입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이한은 이질적인 부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눈빛이었다· 일꾼의 눈빛이 살기로 붉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대-대마법사에게 인사드리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일꾼의 목구멍 안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낯선 목소리였다·
해골 교장은 웬 악신숭배자 잡놈이 인사를 올리겠다고 이렇게 뒤를 쫓아서 찾아온 상황 자체가 굴욕적이고 기분 나쁜 것 같았다·
마치 벌레를 바라보듯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인사드리러 왔으면 본론만 말하고 빨리 뒤지도록 해라· 오래 듣고 싶지 않으니·”
“그-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마법사께서는 저희와 악연이 있으십니다·”
“네놈들하고 악연 있는 게 한둘이겠나·”
“하-하지만 저희에게 치명상을 입히신 건 대-대마법사 당신입니다· 그-그러니 복수를 기다리십시오·”
“긴 줄 맨 뒤에 뒤에 뒤쯤 서면 되겠군·”
부활한 악신 교단의 하수인이 와서 선전포고를 하는데도 해골 교장은 심드렁했다·
“할 말은 다 했나? 다 한 모양이군· 그럼···”
“교장 선생님· 전하 아직 계십니다·”
“좋은 지적이군· 훌륭하다·”
해골 교장은 모처럼 제자를 칭찬했다·
조우린 앞에서 사람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걸 보여줘서 좋을 게 없었다·
나중에 ‘조우린도 해보겠노라!’하면서 취미를 들인다면 바로 황궁에서 소환 편지가 날아올 것이다·
“끌고 가서 치워야겠군· 전하· 죄송합니다· 괜한 날벌레를 데리고 와서···”
침입자!
조우린이 뒤늦게 외쳤다· 해골 교장과 이한은 걱정스럽게 용을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충격을 크게 받은 것일까?
던··· 던전에 드디어 침입자가 들어왔노라! 조우린의 던전에도!
조우린은 놀라긴 했다·
둘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던전을 노리고 들어오는 침입자도 아무 던전에나 들어가지 않았다· 던전으로서 가치가 있는 곳에만 들어갔다·
“···전하· 저 놈은 사실 악신숭배자고 교장 선생님을 쫓아서 왔···”
“쉿· 조용히 해라·”
해골 교장은 제자의 입을 막았다·
조우린에게 악신에 대해 자세히 알려줘서 좋을 게 없었을 뿐더러···
···저렇게 기뻐하는데 굳이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어보였다·
* * *
“후배 넌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미친 악신숭배자였으니까·”
“···”
에안두르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선배를 쳐다보았다·
구석에서 해골 교장 가르시아 교수와 한참 쑥덕대더니 갑자기 들어온 침입자를 치워버리고 ‘별 일 아니었단다 그냥 미친 악신숭배자였어’하는데 수상함을 안 느끼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알겠슴니다·”
그래도 에안두르데는 선배라고 믿음을 보여줬다·
만약 숨기는 게 있다 하더라도 에안두르데가 알면 안 되기에 숨기는 거라고 믿어준 것이다·
에안두르데는 시선을 돌렸다·
조우린은 아까부터 가만히 있었다·
그 진지한 표정을 보니 침입자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고민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됐다·
만약 이 드래곤이 눈치 없이 캐묻거나 한다면···
‘내가 나서서 설득해야 해·’
이한· 이한·
“왜 그러십니까?”
여기 저택이 침입자한테 노출됐다는 건 조우린이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조우린도 잠시 위치를 옮겨야 하지 않을까?
“어디로요?”
안전한 곳이 좋겠노라! 마법사들이 많고 마령관도 있는 곳· 기왕이면 ‘에’로 시작하면 더 좋을 것 같구나·
“과연·”
“뭘 ‘과연’이냐? 말리지 못해!?”
해골 교장은 기겁해서 제자를 구박했다·
지금 누굴 또 데리고 오려고 이런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