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9화
조우린이 자신도 모르는 던전 내 함정에 놀라워하는 사이 이한은 재빨리 글자를 지웠다·
이 보물상자를 준비해놓은 용은 앞으로 71년 정도는 더 기다려달라고 적어놓았다·
그래야 안에 든 보석이 완전한 광채를 되찾을 거란 이유였다·
‘못 열게 해야지·’
괜히 어설프게 열어서 실망시키는 것보다는 나중에 완성된 보석을 얻는 게 조우린에게도 좋을 터였다·
저기는?
보물상자에 관심을 끈 조우린은 길 끝에서 새로 나타난 분수대를 가리켰다·
칠왕국 시절의 건축 양식으로 만들어진 분수대와 그 분수대가 자리 잡은 방 안은 별다른 위험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옛날 귀족이 사용하던 저택의 내실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한은 방심하지 않았다·
“분수 안에 사악한 적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이렌처럼 말입니다·”
세이렌! 에인로가드에도 있다고 들었노라!
“아주 잘 아시는군요· 전하· 아주 사악한 이들이죠·”
교수의 의뢰를 받아 학생들의 시험을 방해하는 세이렌들은 교활하고 사악한 종족이었다·
이한도 몇 번 당할 뻔한 만큼 더더욱 그랬다·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고개를 위아래로 흔드는 조우린을 내버려둔 채 접근한 이한은 분수대에 새겨진 글을 확인했다·
21번 휴게실(미완-아직 장식품 추가해야 함)
ㄴ물장난 가능한 대형 욕탕도 추가해야 함
ㄴ대형 마력 축음기도 추가해야 함
ㄴ날아다닐 수 있도록 천장 높이를 더···
“···”
던전에 이런 휴게실이 있는 것도 황당했지만 아직 미완이라는 건 더더욱 놀라웠다·
이한은 한없이 멍청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글자를 가렸다·
‘아니· 긴장 풀면 안 된다· 그래도 던전· 다른 용들이 조우린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몬스터를 기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꾹 참으며 뒤쪽을 향해 손짓하자 조우린과 에안두르데가 빠르게 달려왔다·
분수에 가까이 다가가지 말도록 해라 에안두르데! 세이렌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흥· 나와봤자···”
이리 오라니까!
조우린은 분수대를 향해 호전적으로 접근하는 에안두르데를 앞발로 꽉 끌어안았다·
부글부글-
“?!?”
이한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분수대의 수면 위로 물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조우린과 에안두르데는 세이렌이 나타났다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역시!
새끼 바실리스크는 꼬리를 꼿꼿이 세우며 조우린 위에서 적의를 뿜어냈다·
그리고 물보라와 함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걸 보니 제법 고위 정령이 분명했다·
고위 물의 정령은 유동(流動)하는 자신의 육신을 흔들며 작업을 준비했다·
휴게실을 관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던전의 식수 중 오염된 게 있는지 확인하고 만약 문제가 있다면 정화 작업에 들어가야 했다· 용과의 계약을 이행하려면 성실하게 움직여야···
···
“···”
-···
눈이 마주친 정령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치 물의 정령이 아니라 냉기의 정령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적 적대 정령이야?
조우린이 이한에게 물었다·
정령이 꼭 친절하고 상냥한 성격은 아니었다· 난폭하고 오만한 정령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던전처럼 밀폐되고 마력이 왜곡되는 공간에서는 정령의 성질이 더욱 괴팍해질 수 있었다· 실제로 던전을 탐험하는 모험가들은 안에서 정령을 만나면 바로 경계부터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한은 지금 앞에 나타난 정령이 이런 경우와는 다르다는 걸 직감했다·
일단 적의나 위협이 느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당황하고 있다!’
상대 정령이 쩔쩔매는 게 느껴졌다· 영혼 인식 마법까지 배운 만큼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어느 정도 의사 파악이 가능했던 것이다·
“···혹시 다른 용과 계약을 맺고서 던전을 관리하러 소환된 겁니까?”
-!
굳어 있던 물의 정령은 크게 놀랐다·
-맞 맞습니다· 혹시 알고 들어오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제발 자비를! 비밀을 엄수해야 한단 말입니다·
물의 정령은 간곡히 부탁했다·
원래 용과의 계약은 주기적으로 던전을 관리하되 나중에 방문하는 사람이 생기면 절대 들키지 말라는 내용의 계약이었다·
위험천만한 던전에 저런 뒷정리를 하는 정령이 나타나면 얼마나 실망스럽겠는가·
···그런 거였어?
조우린은 다른 드래곤들이 던전을 가꿔주는 걸 넘어 남몰래 과보호를 해왔다는 사실을 깨닫자 살짝 풀이 죽었다·
친구들과 함께 신나는 모험을 하려고 내려왔는데 알고 보니 저택을 돌아다닌 것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잠깐· 혹시 아까 보물상자도 함정이 아니었던 거 아니야?
요즘 점점 지능이 올라가는 조우린의 모습에 이한은 속으로 전율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흐르면 정말 속이기 힘들지도 몰랐다·
“그보다 전하· 정령부터 해결하셔야죠·”
비밀은 지켜주겠노라···
시무룩해져서 말하는 조우린의 모습에 물의 정령은 쩔쩔맸다·
대답은 들었어도 영 걱정되었던 것이다·
관리를 맡긴 용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불만을 토해내기라도 하면···
-잠깐· 마법사 님· 혹시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이십니까? 나비공자의 동생이신?
물의 정령은 꿈틀거리며 이한을 쳐다보더니 무언가 눈치챘는지 의사를 전달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잠깐· 어떻게 아셨습니까?”
처음에는 조우린과 같이 돌아다니는 에인로가드 마법사여서 맞혔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제국 사람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극소수였는데 정령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아·’
이한은 그제야 짐작했다·
“이것 때문이군요·”
계약으로 받은 여러 문양 중에는 대해와 비바람의 호민관을 자칭하는 정령 우피눔의 문양이 있었다·
상대는 물의 정령인 만큼 이걸로 알아봤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 아··· 혹시 호민관의 문양입니까!? 몰 몰랐습니다!
“?”
물의 정령은 우피눔의 문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설마 여기서 대해와 비바람의 호민관이 남긴 문양을 볼 줄이야·
거칠고 난폭한 이 정령은 같은 정령이라 하더라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어 그럼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마력으로 인한 위협적인 압도감이 느껴졌습니다·
“···”
공손한 태도로 무례한 텔레파시를 지껄이는 정령의 모습에 이한의 안색이 굳었다·
‘이 자식이?’
“압도감 느껴진다고 꼭 저란 법은 없지 않습니까? 제국에 마력으로 인한 압도감을 뿜어내는 마법사들이 얼마나 많··· 많진 않더라도 몬스터들도 있···”
이한···
조우린은 주절대는 계약자의 모습을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언제나 냉철한 조우린의 계약자가 이런 반응을 보여줄 줄이야·
-죄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억측을···
“···아닙니다·”
이한은 씁쓸한 표정으로 정령의 사과를 멈추게 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정령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소문이 도는지 다 받아 적고 싶었지만 차마 캐물을 수가 없었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부디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만약 그러신다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흥· 어차피 정령들은 다 저를 피할 텐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달래보겠습니다·’
이한은 말하고 나서 생각과 말이 반대로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물의 정령은 더더욱 쩔쩔맸다·
“방금 말은 잊어주십시오· 그보다 전하께서는 이미 실망하셔서··· 음· 혹시 안쪽에 좀 덜 관리된 곳은 없습니까?”
-드래곤께서 다치기라도 하면 이 던전에 계약된 정령들은 모두 다 처참한 운명을 맞이할 겁니다!
물의 정령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몸서리를 쳤다· 얼굴이란 게 없는 정령인데도 감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과보호가 생각보다 훨씬 심하군·’
그러는 사이 조우린은 점점 더 시무룩해져가고 있었다· 오죽하면 같이 실망했던 에안두르데가 대신 달래고 있을 정도였다·
조우린이 잘못 골랐노라···
“아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맞아요! 이렇게 쾌적하고 편안한 던전도 좋아요!
떠드는 사이 던전 깊숙한 곳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리적인 충격으로 만들어지는 소리와는 달랐다· 이한은 마법사답게 마력으로 인한 충격임을 직감했다·
“잠깐! 혹시 방금 충격은 다른 차원의 몬스터가 습격해온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뇨· 아티팩트가 마력을 머금고 강화되면서 만들어 낸 마력 파동입니다·
“···혹시 눈치가 없으십니까?”
* * *
“볼라디 교수가 같이 있다고?”
“네·”
바쁜 잡무를 얼추 끝내고 가르시아 교수를 찾아 온 해골 교장은 뜻밖의 소식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런 줄 알았다면 괜히 경계했군· 황궁에 침입할까봐 걱정했는데·”
“네?”
“아무것도 아닐세·”
해골 교장은 손을 내저었다·
밖에 테이블이 설치된 카페에서 만난 탓인지 지나가던 귀족 중 몇몇이 인간 모습의 해골 교장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경의를 표하려고 했다·
“마령관 각하!”
“나 그런 사람 모른다·”
“···고나달테스 각하 아니십니까?”
“모르겠는데? 뭐하는 놈이지?”
“???”
귀족들은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멀어져갔다·
모두 떠나자 가르시아 교수가 창피함에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제발 그런 거짓말 좀 하지 마세요·”
“왜?”
“나중에 들키면 창피하니까요! 기부금 받으실 때 만나면 안 민망하세요?”
“상관없지· 옛날에 헤어진 내 분신이라고 하면 되니까·”
“···”
가르시아 교수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해골 교장은 자신을 인근 수도 극단의 새 연극배우인 줄 알고 접근하는 호사가들을 손짓으로 쫓아낸 뒤 물었다·
“워다나즈는? 또 볼라디 교수를 자극해서 어려운 마법을 배우고 있나?”
“아· 아뇨· 지금은 조우린 전하 만나러 갔어요· 에안두르데도 데리고요·”
“!”
해골 교장은 깜짝 놀랐다·
“뭐? 어디에 갔다고?”
“전하 저택에···”
“가르시아 교수! 자네는 그걸 그냥 내버려두면 어떡하나!”
해골 교장은 오랜만에 교육자로서 일갈했다·
에인로가드에서 학생 걱정을 가장 안 하는 사람에게 저런 훈계를 듣자 가르시아 교수는 눈을 끔벅였다·
“아 아니··· 왜요? 수도에서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 아닌가요?”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지· 하지만 워다나즈한테는 가장 위험한 곳이다· 가자·”
마령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우린이 물론 폭력적인 드래곤은 아니었지만 드래곤의 성장은 원래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먼 옛날 해골 교장이 드래곤들 밑에서 수행할 때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어제까지는 마법사 카드 갖고 놀던 드래곤이 오늘부터는 갑자기 ‘투쟁으로 점철된 대륙 종족의 비극적인 운명을 바꿔나가고 싶구나’라고 선언해도 놀랍지 않은 게 드래곤이었다·
“혹시 조우린 전하께서 이한 학생한테 무슨 일이라도 하실까봐 그러세요? 다른 드래곤이면 모를까 조우린 전하가 그러실 분은 아니잖아요·”
“아닌데?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드래곤이지·”
정말 조금도 믿지 않는 그 모습이 오히려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가르시아 교수는 살짝 흔들렸다·
자신이 조우린을 잘못 판단한 것일까?
“내 생각에 전하는 워다나즈 녀석을 꽁꽁 묶은 뒤 방학 끝날 때까지 내보내지 않을 가능성이 높네· 흠· 펭에린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펭에린이 수도에 있나?”
“글 글쎄요?”
가르시아 교수는 시선을 피했다·
아직 페트로가드에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분은 왜요?”
“펭에린을 던져주고 워다나즈를 받아오면··· 아니다· 안 통하겠군·”
처음 만났을 때면 모를까 이제는 1 펭에린으로 거래할 수 없을 것이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조금 귀엽게 생겼다고 황금을 살 수는 없는 법·
“비켜라!”
-역시 들킬 줄 알았···!
해골 교장은 저택 앞 기사들을 옆으로 밀어버린 뒤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낯익은 동굴이 저택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벽에 걸린 누가 봐도 용이 만든 사슬도···?
“!!!”
“굳이 ‘내가 뭐라고 했나’라고 하지는 않겠다·”
‘다 하셔놓고·’
사슬의 위치를 따라간 둘은 시커먼 던전의 입구를 발견했다·
가르시아 교수는 비명 섞인 외침을 터뜨렸다·
“전하께서 이한 학생을 가두려고 이런 던전을 만드신 건가요?!”
“···그 그건 아니겠지·”
해골 교장은 옛 제자의 풍부한 상상력에 살짝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