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5화
“생각해보니 에안두르데가 그렇게 멍청하게 행동했을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렇겠지·”
“···알고 계셨습니까!?”
이한은 교수의 반응에 당황했다·
하긴 학파의 스승으로서 이한보다 더 길게 봐왔을 만큼 볼라디 교수가 에안두르데를 정확히 판단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근데 그러면 왜 안 말리셨지??’
“그런데 왜 찾으러 오신 겁니까?”
“?”
볼라디 교수는 눈썹 끝을 위로 살짝 올리며 제자를 쳐다보았다·
상대가 감정 표현이 그리 격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름 경력이 쌓인 만큼 이한은 무슨 뜻인지 읽어낼 수 있었다·
저건 물음표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무슨 소리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네가 에안두르데 사라졌다고 온갖 호들갑과 오두방정을 다 떨었잖아?
‘아·’
이한은 매우 민망해졌다·
생각해보니 알히들 말만 듣고서 ‘에안두르데가 지하 투기장 갔답니다! 빨리 구해야 합니다!!’하고 호들갑을 떤 건 자신이었다·
볼라디 교수 입장에서는 긴가민가하더라도 선배가 저렇게 펄펄 날뛰니 일단 찾으러 동행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신중하게 판단했어야 했는데·”
“아니· 같은 학파로서 우애가 깊은 건 칭찬할 일이지·”
‘둘 밖에 없는데요·’
학파에 두 명밖에 없으면 가이난도와 앙라고도 친해질 것 같았다·
교수와 같이 빈민가 구역을 떠나며 이한은 다시 한 번 반성했다·
앞으로는 무작정 습격하기 전에 사실을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겠다고·
···절반은 널브러지고 남은 절반은 수도 경비대에게 끌려가고 있는 길드원들이 들었다면 속 뒤집어질 생각이었다·
* * *
“과연 그렇군요·”
가르시아 교수는 칭찬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하지 못한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제자를 쳐다보았다·
에안두르데는 뿌듯한 얼굴로 낡은 금화주머니를 흔들었다·
예전에 노예상인 중 한 명이 폐쇄된 투기장에 금화를 숨겼다는 말을 듣고 기억해뒀었는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역시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 말이 그렇게 쓰이는 게 아닌··· 어쨌든 무사하니 다행이네요···”
“이한이 찾으러 갔다는 말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쉿· 괜히 미안해할 수도 있으니까 조용히 해·”
소식을 듣고 모인 2학년 학생들은 뒤에서 소곤거렸다· 그 모습에 알히들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어? 어··· 그 흑마법 시전할 때 불하초 시약의 비율이 얼마나 위력에 영향을 끼치는지 토의하고 있었어·”
가이난도는 허겁지겁 변명했다·
그 변명에 알히들은 새삼 존경스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방학 도중에도 저렇게 마법에만 몰두하다니·
역시 2학년 선배들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우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구나·’
방학 되자마자 산해진미와 소설잡지에 빠져 흥청망청 노는 친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실함이었다·
“야· 넌 어떻게 그런 걸 떠올렸다?”
“쉿· 선배가 연구하던 주제 그냥 따라서 말한 거야·”
“···”
친구가 가이난도를 한심하게 보는 사이 이한과 볼라디 교수가 돌아왔다·
전당 앞에 모여 있는 마법사들을 본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교수님·”
“아뇨· 둘 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별 일 없었죠?”
“예· 별 일 없었습니다·”
이한의 대답에 친구들은 그런가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지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워다나즈의 왼쪽 어깨 윗부분에 못 보던 핏자국이 생겨난 것이다·
‘저거 피 아닌가?’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걸 묻기도 전에 이한이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여기 모여 봐· 예전에 졸업한 선배님이 너희들을 위해 선물을 주고 가셨으니까·”
“뭐? 정말?”
친구들은 뜻밖의 말에 의아함을 표했다·
웬 선물더미를 저렇게 쌓아놓고 갔나 싶었는데 저게 그들을 위한 선물이었다고?
“난 저거 워다나즈가 자기 돈으로 산 건 줄 알았는데·”
“워다나즈가 자기 돈으로 산 다음에 가상의 선배를 꾸며낸 거 아니야?”
에인로가드 선배에 대한 믿음이 조금도 없는 친구들은 수군거렸다·
이제까지 만난 졸업생들의 면면을 떠올려보면 아무리 봐도 저런 선물을 주고 갔을 리가 없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냐· 빨리 와서 줄이나 서라·”
‘강하게 부정 안 하는 거 보니까 더 수상한데·’
2학년 학생들은 속으로 의심스러워했다·
대귀족 가문 출신에 학기 도중에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의뢰를 수행하던 워다나즈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저 정도 재력은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하긴 워다나즈는 금화에 별 욕심 없으니까·”
“···뭐?!”
요네르는 옆에서 나누는 다른 탑 학생의 목소리에 경악했다·
대체 왜 그런 오해가?
“왜 그런 생각을?”
“뭐 뭐야· 메이킨· 워다나즈한테 불만 있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이유가 궁금해서?”
“돈 안 받고 요리를 해주잖아·”
“···”
요네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너무 반박하기 힘든 말이었기에 간신히 떠오르는 건 이런 대답밖에 없었다·
“돈··· 돈 받잖아·”
“응? 아· 은화? 그건 선배들하고 비교하면 내는 것도 아니잖아·”
“그게··· 그러니까··· 아니다···”
요네르는 어떻게 오해를 풀어야 할까 고민하다 한숨을 푹 쉬고 포기했다·
이한이 생각보다 금화에 관심 많다고 말해도 별로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요네르· 여기 <물마산맥 마탑의 삼각 플라스크>·”
이한은 연금술 학파 소속의 친구에게 마법이 걸린 플라스크를 내밀었다· 설명을 읽은 요네르는 눈을 크게 떴다·
“성분 확인 복제 정화 변환까지? 너무 기능이 많은 거 아니야?”
요네르는 의아해하며 플라스크를 요리조리 확인해보았다·
아티팩트에 기능이 많은 게 뭐가 문제냐 싶을 수 있었지만 사실 문제가 맞긴 했다·
마법을 추가로 부여할 때마다 그 난이도와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것이다·
마법끼리 서로 충돌하는 문제부터 마력 수급 문제 안정성을 위한 시약 추가···
그럴 바에는 그냥 기능이 나뉜 아티팩트 여러 개를 쓰면 되는 일이었다· 굳이 억지로 하나에 다 쑤셔박을 필요가 없었다·
“응· 그래서 만든 마법사는 징계 받았다고 하더라고· 다른 마법사가 대리로 경매장에 들고 나왔더라·”
“···고 고마워· 잘 쓸게·”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을 보니 친구에게 선물을 제대로 골라줬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산은 수정으로 된 아스트롤라베(선물을 받은 아산은 형이고 누이고 다 필요 없다는 발언으로 이한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더르규는 역장 방패가 달린 가죽 건틀렛 랫포드는 새 락픽과 자물쇠구멍 안을 탐색하는 마법벌레 니기소르는 화염 정령과 반응해서 다양한 속성의 불을 만들어내는 랜턴···
“잠깐· 워다나즈· 혹시 아까 전당을 돌아다니면서 경매 시작되기 전에 다 사들였던 사람이 너였어?”
“내가 아니라 졸업한 선배가···”
“과연 그렇군·”
‘뭔가 다른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은데?’
이한은 친구의 대답에서 의아함을 느꼈지만 굳이 캐묻지 않고 넘겼다·
오늘 사들인 물건들 중에서 쓸만한 걸 나눠주려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자· 닐리아· 여기·”
“고 고마워?”
닐리아는 <저주 받은 붉은 창>을 받으며 당황했다·
대체 왜 이걸 선물로 주는 건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워다나즈가 줬으니 무슨 의도가 있겠다 싶었다·
“···아니· 그걸 네가 왜 가져가?! 선물은 여기 옆에 있는 깃펜이야!”
뒤늦게 깜짝 놀란 이한은 창을 뺏은 뒤 깃펜을 가리켰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작문을 도와주는 이 깃펜은 앞으로 사교 활동에 필요한 초대장을 수백 장도 넘게 쓸 닐리아를 위한 아티팩트였다·
‘···창이 더 쓸모 있는 것 같은데···’
닐리아는 속으로 생각하며 깃펜을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창>깃펜인 것 같았다·
이한은 마저 선물들을 나눠줬다·
라파드엘은 흑마법사가 계약 가능한 언데드계의 존재들을 정리한 두꺼운 책(라파드엘은 투덜대면서도 결국 감사를 표했다) 시아나는 지혜의 모노클 살코는 분해 마법이 걸린 거무튀튀한 삽···
“모라디· 여기 이 검은···”
“난 이미 쓰고 있는 검이 있는데·”
지젤은 살짝 당황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선물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미 쓰고 있는 가문의 검이 있었던 것이다·
“끝까지 들어· 이 검은 검처럼 생겼지만 사실 암기가 내장된 마법 아티팩트야· 유명한 결투 마법사가 즐겨 썼다고 하더라고· 이렇게 검을 뽑는 척하면서 발동시키면 칼자루에서 압축된 바람의 탄환이···”
“···”
신나서 설명하는 이한의 모습에 지젤은 경악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졸렬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럴듯하게 들려서 더 어이가 없군!’
지젤은 저 설명에 솔깃해한 스스로가 살짝 수치스러웠다·
상대가 반응이 없자 이한은 살짝 시무룩해졌다·
“마음에 안 드나? 되게 좋은 무기라고 생각했는데·”
“아 아니· 나쁘지 않아··· ···좋은 것 같기도··· 고맙다···”
선물을 받은 지젤은 허리춤에 찼다· 만약 왜 검을 3개씩 들고 다니냐고 묻는 놈이 있다면 주둥이를 후려갈길 생각이었다·
티질링에게는 저주 받은 붉은 창을(닐리아는 살짝 부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아덴아르트에게는 축복 걸린 피크닉 바구니를(아덴아르트는 받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샤루칼에게는 물 원소 마법이 깃든 소라고둥을 선물한 뒤 이한은 가이난도를 불렀다·
“가이난도· 이 잉크병은 집중력 없는 마법사를 위한 아티팩트다· 책상 앞에 앉아서 다른 짓을 하면 얼굴에 잉크를 쏘아버리지·”
“···나 나만 선물이 이상한 거 같은데···”
“그리고 여기 덤으로 마법사 카드· 경매장에서 구했다·”
이한은 두꺼운 카드 뭉치를 내밀었다·
낯익은 카드 목록을 본 가이난도는 감격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건 기적이야!!!”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 * *
친구들과 함께 별장 저택으로 돌아온 이한은 에안두르데를 따로 불렀다·
언제 조우린을 만나러 갈 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네 선물만 산 다음 만나러 갈까?”
“좋은 생각 같슴니다· 그런데···”
에안두르데는 보기 드물게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이한은 살짝 놀랐다·
‘아니?’
대체 무엇 때문에 에안두르데가 저런단 말인가?
‘혹시 금화가 부족한가?’
“질문이 있슴니다·”
손을 든 에안두르데는 몇 번이고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빙빙 돌리고 장황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결국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친구에 대한 우정과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충돌할 경우 어떤 걸 선택해야 하는가?
‘녀석···!’
이한은 살짝 감동해서 요네르를 불렀다·
“요네르· 요네르·”
“어? 왜?”
“에안두르데가 벌써 친구들이 많이 생긴 모양이야·”
요네르를 부른 이한은 방금 들은 이야기를 설명해줬다·
보아하니 에안두르데는 선배들과 같이 남은 방학을 보내야 하는지 아니면 친구들과 노는 걸 선택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게 분명했다·
“?”
요네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그런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이미 이한은 입을 열고 있었다·
“당연히 친구와의 우정을 선택해야지· 에안두르데· 선배는 원래 편한 대로 갖다 쓴 다음 버려도 돼·”
“···야···”
요네르는 매우 복잡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우리도 선배야!
“···그렇슴니까?”
“물론이지! 혹시 친구와 약속이 있나?”
에안두르데는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그리고는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내일 같이 전하를 만나러 가겠슴니다!”
‘저렇게 결연하게 말할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