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4화
뒤에서 피혁상이 저주를 퍼붓는 걸 들으며 이한은 씁쓸하게 돌아섰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군·’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하필 볼라디 교수한테 걸리다니·
어마어마한 불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잠깐· 그런데 이러면 다른 투기장도 망했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
볼라디 교수는 처음으로 멈칫했다· 이한은 그 모습에 경악했다·
설마?!
* * *
다행히 망하지 않은 지하 투기장이 하나는 있었다·
물론 그 투기장을 발견하기 전까지 볼라디 교수는 세 곳의 망한 투기장을 추가로 방문해야 했다·
-네놈이 우두머리를 다 잡아가놓고 투기장은 무슨 투기장! 다 흩어졌다!
-살 살려주십시오! 저는 목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무기도 없어요! 무기 없으니까 제발 그 마법만큼은!
-아· 당신이 그 전투 마법사요? 덕분에 이 주점을 싸게 살 수 있었소· 여길 쓰던 길드 놈들이 아주 학을 떼더군·
“찾았군· 들어가자·”
‘이걸 과연 찾았다고 할 수 있나?’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방법이라면 그냥 이한이나 가르시아 교수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길 가다가 범죄자 같아 보이는 용병이면 아무나 붙잡고 거꾸로 매달아버린 다음에 ‘알고 있는 지하 투기장 입구를 말해!’라고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달칵-
이번에 들은 지하 투기장 입구는 빈민가 인근 하수도 옆에 숨겨져 있었다·
낡은 바윗돌로 둥글게 쌓아올린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나가다가 붉은 칠이 되어 있는 돌을 세 번 두드리면 안에서 비밀문이 열리는 것이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제법 환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횃불은 물론이고 마법을 사용한 광원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그것밖에 없다고? 더 걸어라 이 잡놈아!
-내 카드에서 손 떼지 못해!? 이 마령관 카드를 탐내는 놈들은 모조리 심장을 씹어버리겠다!
-아래를 노려! 아래를 노리라고! 방패 든 위쪽이 아니라!
긴 통로 끝에서는 시끌벅적한 고함이 새어나왔다·
마법사 카드부터 시작해 지하 투기장까지 온갖 도박이 진행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너저분하게 때가 묻은 은화를 대충 카운터 위에 쌓아올린 채 숫자를 세고 있던 투기장 길드원이 새 손님을 발견하고 물었다·
“누구 소개로 오셨소?”
“고르곤 혼혈이 여기 온 적 있나?”
“누구? 모르는데· 누구 소개로 왔냐니까?”
상대의 목소리에 험악함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투기장에 와서 금화를 내고 갈 손님이 아니라 수상쩍은 사람으로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한은 지팡이를 붙잡았다· 그러나 볼라디 교수가 한 발 더 빨랐다·
쾅!
길드원은 그대로 카운터에 머리를 박고 기절했다· 동시에 볼라디 교수는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강렬한 염파(念波)를 때려 박았다·
움직이지 마라!
위압감 넘치는 텔레파시에 무언가 잘못됐다 싶은 사람들은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나 겁이 없거나 멍청한 사람들은 욕설과 함께 허리춤에 찬 무기를 집어 들려고 했다·
“쪼개져라 페르쿤트라의 벼락이여!”
1학기 동안 여러 5서클 마법으로 자신을 혹사시킨 이한은 자연스럽게 배우지도 않은 마법을 응용해서 사용했다·
방금 사용한 마법은 페르쿤트라의 하급 벼락 마법을 강화시키고 응축한 다음 억지로 쪼개서 산탄처럼 쏘아낸 변형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페르쿤트라의 연쇄 벼락>· 4서클 정도 되는 마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파지지지직!
번개가 여럿을 꿰뚫자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나뒹굴었다· 이한은 멈추지 않고 축장한 마법을 발동시켰다· 섬뢰창과 번개 망토가 시전되며 주변에 방전 현상을 일으켰다·
“다가오지 마라! 다가오면 공격하겠다!”
“먼저 공격해놓고 뭐라는 거냐 미친 새끼야!”
“···음!”
이한은 반박할 말이 없어서 살짝 말문이 막혔다·
마법사가 기습에 약한 만큼 볼라디 교수는 먼저 기습하는 걸 선택했는데 아무래도 그 선택이 여기 범죄 조직 길드원들에게는 매우 무례하게 느껴졌으리라·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싸움이 벌어진 이상 그대로 맞아줄 수는 없었다· 이한은 용의 이빨로 구성된 중형 스켈레톤 골렘을 소환했다·
우드득!
그리 넓지도 않은 지하 투기장 시설을 박살내버리는 미친 파괴 행각에 마법사를 저격하려고 쇠뇌를 꺼내오던 길드원들이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저주 받을 마법사 새끼야!!”
“뭐가 그리 불만이어서 여길 다 때려부수는 거냐!”
“···으음!”
이한은 ‘지금 상황이 난장판이고 내가 번개 망토와 염동력으로 방어를 하고 있다지만 원거리에서 마법 화살이나 볼트가 날아오면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을 수 있어서 방어용 소환수를 꺼낸 거다’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지하 투기장의 시설을 절반 박살낸 이상 그럴 기회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한은 포기하고 파괴를 명령했다·
“서 있는 놈들은 모두 쓸어버려!”
경무장한 투기장 길드원들은 골렘을 제압하지 못하고 공처럼 쓸려나갔다· 이한은 뒤에서 쉬지 않고 <까마귀의 사안>을 시전했다· 저주에 적중된 적들은 중독되어서 쓰러졌다·
“무··· 무슨···!”
“마탑이 통째로 몰려왔냐?!”
연결되어 있던 다른 방에서 튀어나온 길드원들은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황당해했다·
곳곳에서 번갯불이 번쩍이고 투기장 가운데에서는 중형 골렘이 기물을 와르르 날려버리며 날뛰고 있었으며 무기 들고 나온 동료들은 무슨 저주를 당했는지 맞지도 않았는데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사 한두명이 할 법한 폭력이 아니었다·
마탑이 통째로 몰려와서 날뛰고 있는 것 같은 과잉폭력!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누가 마법사 납치라도 했나?? 그런 적 없는데?’
“검이여 비블레의···”
이한이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최근에 익힌 <비블레의 날아다니는 검>까지 소환하려고 하자 그 사이 돌아온 볼라디 교수가 말했다·
“여긴 없는 것 같군·”
“앗· 그렇습니까?”
중앙에서 제자가 길드원들을 패는 동안 볼라디 교수는 안쪽의 길드원들을 모두 제압한 뒤 확인을 끝내고 나온 것이다·
“돌아가자·”
“예·”
두 마법사가 사라진 뒤 숨막히는 정적이 찾아왔다·
남아 있던 손님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밖으로 도망쳤다· 사방에 널브러진 길드원들은 이들을 협박하거나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지켜만 봤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이 미친 마법사 새끼들···!”
* * *
사실 처음 간 지하 투기장에 에안두르데가 없다고 해서 놀랄 건 아니었다·
수도는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도시였고 그 도시의 그늘에서 굴러가고 있는 범죄도 그만큼 많았다·
빈민가에 있는 크고 작은 지하 투기장만 해도 열몇개는 가뿐히 넘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지하 투기장도 에안두르데가 보이지 않자 이한은 살짝 고민에 빠졌다·
“혹시 에안두르데가 다른 불법 투기장에 간 게 아닐까요? 여기가 아닌···”
‘그걸 다 부수기 전에 생각하면 안 됐던 거냐?’
옆에 쓰러진 길드원이 눈을 감은 채 속으로 욕했다· 눈을 떴다가는 마법사들이 금방이라도 두들겨 팰 것 같아서 무서웠다·
대체 고르곤 혼혈이 누구야???
그러나 볼라디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 쉽지 않다·”
빈민가 구역이 아닌 수도의 다른 곳에도 이런 투기장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은 에안두르데 같은 사람이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나름의 신분 확인과 보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비교적 입장이 수월하고 에안두르데가 잘 아는 이쪽 구역의 투기장이 분명하리라·
“음·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이 근처에 다른 불법 투기장이 없습니까?”
이한은 눈을 감고 기절한 척 하는 길드원에게 질문했다· 들켰다는 걸 깨달은 길드원은 다급히 토해냈다·
“저기! 저기 길 아래 목장 쪽 근처에서 하는 놈들 있다고 들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 놈들 아주 나쁜 놈들입니다! 꼭 처벌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한은 길드원의 응원을 들으며 다시 볼라디 교수와 같이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세 번째 지하 투기장에서는 그쪽 길드원들이 먼저 마중을 나온 것이다·
“우린 고르곤 혼혈 같은 거 없소!”
미친 사냥꾼 도살자가 나타나서 주변을 휩쓸고 다닌다는 소문에 여기 목장으로 위장한 투기장 소속 길드원들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졌다·
어지간해서는 무력으로 승부를 보거나 했겠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나빴다·
소문을 들어보니 웬 고르곤 혼혈을 찾는다면서 닥치는 대로 초토화를 시키고 있다던데···
-원래 저렇게 초토화시키는 놈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대체 왜 저렇게 부수고 다닌단 말입니까?
-그게 중요하냐? 고르곤 혼혈 사들인 놈 있으면 빨리 말해라· 나중에 숨겼다는 게 들키면 산 채로 껍질을 벗겨버리겠다!
장부를 확인하고 길드원들의 뒷주머니까지 확인한 이들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고르곤 혼혈 같은 걸 데리고 있지 않다고·
그나마 한숨 돌린 길드원들은 목장으로 올라가는 언덕 쪽 오솔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렇게 외친 것이다·
“없다고요?”
“그렇소· 못 믿겠다면 확인도 시켜드릴 수 있소·”
“···어 혹시 제국에 정식으로 허락을 받은 길드십니까?”
이한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불법으로 운영하는 범죄자들이 너무나도 예의바르고 친절했던 것이다·
길드원들은 그 말에 뭐라도 씹은 표정을 지었다·
가는 곳마다 길드들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미친 마법사가 저딴 소리를 지껄이니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개자식!’
“시작해라·”
볼라디 교수는 이한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한이 ‘제발 신호 좀 하고 공격해주십쇼’라고 부탁했기에 말해준 것이었다·
“??”
길드원들은 ‘시작’이 뭔지 이해하지 못해서 반응이 늦었다· 그 순간 두 명의 마법사가 사라졌다·
쾅!
먼저 들이닥친 건 잘 정제된 공격이었다· 쓰러진 길드원들은 마법으로 형성된 환상의 칼날이 급소를 베어버렸다는 걸 깨닫지도 못한 채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로 들이닥친 건 조절 없는 마법의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스승보다 자신감이 부족한 제자는 적당히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언제 역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갖고 계속해서 마법을 연사했다·
“개··· 자식들···”
누군가 중얼거리는 동안 볼라디 교수는 훌쩍 투기장 안으로 이동해버렸다·
그리고는 잠시 후 나왔다·
“없군·”
‘과연· 이게 프로인가·’
이한은 왜 볼라디 교수가 길드원들의 제안을 받지 않고 직접 공격해서 제압한 뒤 수색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런 제안이란 건 믿을 수 있는 상대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여기 길드원들처럼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는 수상쩍은 자들과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에안두르데를 다른 곳에 숨긴 뒤 시치미를 뗄 수도 있었고 들여보낸 뒤 가장 유리한 상황에서 기습을 가할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주도권을 잃지 않는 거였다·
‘하나 배웠다· 나도 쉽게 방심하지 말아야겠군·’
달콤한 제안이라 하더라도 결코 그냥 받아서는 안 됐···
휘릭-
종이새가 날아들었다·
이한은 종이새를 받은 뒤 열어보았다· 가르시아 교수의 필체였다·
“무슨 편지지?”
“···에안두르데 지금 가르시아 교수님하고 같이 있다는데요? 투기장에 간다고 했던 건 옛날에 망한 투기장에 숨겨놓은 돈 가지러 간 거라고···”
“과연· 돌아간다·”
이한은 깊게 자책했다·
에안두르데를 조금만 더 믿어줬다면 그렇게 무모하게 지하 투기장에 금화 얻으러 갔을 거란 착각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조금 더 믿어줬어야 했는데·’
“···”
“···”
반쯤 시체처럼 쓰러져 있던 길드원들은 두 마법사의 뒷모습에 치를 떨었다·
정말 그림자도 닿고 싶지 않을 만큼 지독한 작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