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2화
조우린이 멋대로 굴어도 이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이한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됩니다·”
“그래? 어쩔 수 없군·”
예술가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만드라고라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원예가 클럽 회원들이나 아쉽지 예술가는 이 만드라고라 하나면 충분했다·
“잠깐· 저기 들러도 되겠습니까?”
원예가 클럽이 빌린 홀을 나와 걸어가던 이한은 백동(白銅)으로 된 장난감 장식이 전시된 다른 쪽 입구를 가리켰다·
플라허 그랑덴 일레이나스 시의 장난감 장인 모임
“···2학년쯤 됐으면 품위 있게 마법사 카드를 해야 하지 않느냐?”
예술가는 당혹스러워했다·
비교적 옛날 마법사인 위대한 예술가의 기준으로 에인로가드 2학년은 마법사 카드를 4학년쯤 됐으면 체스를 6학년쯤 됐으면 그냥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는 게 맞았다·
마법사 카드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장난감이라니·
“아· 제가 쓰려는 게 아니라 선물하려고요·”
“아하· 어린 친척한테?”
“아뇨· 조우린 전하한테요·”
“···??????”
귀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공작새 깃털로 장식된 커다란 모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대체 용에게 저런 장난감이 왜 필요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 그렇군· 호기심에 조사나 분석을 해보려는 것인가·’
생각해보니 당장 우만부터가 마법사 카드의 업(業)을 선대 용으로부터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조우린 전하가 갑자기 제국의 다른 종족들이 어떤 장난감을 갖고 노는지 조사하고 싶어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예술가가 당황스러워하는 사이 이한은 주섬주섬 금화를 확인했다· 이번 만드라고라 판매 덕분에 주머니는 상상 외로 풍족했다·
‘조우린 선물 사고 바실이 선물 사고··· 이 정도면 다른 친구들 필요한 거 사도 남겠는데·’
“경매 참가하고 싶···”
“됐다· 다 구입하지·”
예술가는 후배와 관리인 사이의 대화를 끊고 끼어들었다· 참가를 신청하려던 이한이 당황했다·
“이건 제 금화로 사려고 했습니다만·”
“에인로가드 학생 주제에 비효율적으로 행동하지 말거라· 조사가 목적이라면 많이 가져다드릴수록 좋아하시겠지·”
“조사요? 무슨··· 하긴 쉽게 부수실 테니 많이 가져가는 게 좋긴 하겠습니다·”
이한은 조우린의 괴력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놀다 보면 최소한 몇 개는 부서질 텐데 그게 이한인 것보다는 장난감인 게 낫지 않겠는가·
예술가는 에메랄드로 장식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목표로 했던 만드라고라도 얻었겠다 한정적이지만 예술 작품이 생명을 얻은 사례도 들었겠다 이제 다시 새 거처로 날아가 작업에 몰두할 생각이었다·
···미치광이 대마법사와 만날 수도 있는 수도에서 이렇게 오래 돌아다녀서 좋을 것도 없었고···
“다 됐느냐?”
“약속 있으십니까? 저는 친구들 선물이나 좀 골라보려고 했는데요·”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을 말하나보구나· 하긴· 너 정도면 그럴 법하지·”
해골 교장 학파에 이름을 올릴 정도의 학생이라면 탑 내에서도 우두머리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가르시아 교수만 봐도 그렇지 않던가·
“가르시아 교수님이 뭘요?”
“앗· 아무것도 아냐·”
“···?”
이한은 의아해했지만 예술가는 말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훨씬 선배라 하더라도 주먹 앞에서는 무력한 것이다·
“아· 선배님· 그런데 저는 푸른 용의 탑 말고 다른 탑 친구들도 선물을 골라야 해서 더 걸릴 수 있습니다만·”
“···왜????”
예술가는 당황했다·
* * *
경매장을 돌면서 마저 선물을 산 이한은(예술가는 값을 대신 치르면서도 이해가 안 갔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배와 작별하고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인파 사이에서 매우 보기 드문 종족을 발견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의 선망 어린 시선과 속삭임을 듣는 종족 바로 펭귄 수인 종족이었다·
“알시클 님! ···이 아니군?”
푹찐푹찐한 뒤통수를 보고서 외친 이한은 자신이 착각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같은 펭귄 수인 종족이긴 했지만 상대는 알시클이 아니었다·
‘잠깐· 낯이 익은데?’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펭귄 수인은 호다닥 달려오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 반응에 이한은 상대가 왜 낯이 익은지 깨달았다·
같은 펭에린 가문이었지만 알시클이 아닌 알히들이었던 것이다·
에인로가드 1학년 후배!
“알히들?”
“저를 기억해주셨군요· 정말 영광입니다·”
“···혹시 이번 학기에 징벌방 가서 고문당했나?”
이한은 진지하게 물었다·
알히들은 좋은 가문 출신답게 자신감과 오만함이 충만한 소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뒷받침할 능력도 뛰어났다·
해골 교장이 옆에서 ‘여기 이한은 에인로가드에서 평범한 수준인데 한 번 붙어봐라 하하’하고 꼬드겨서 그렇지 충분히 뛰어난 인재였던 것이다·
그런 인재가 무슨 숨 한 번 쉴 때마다 눈치를 볼 만큼 공손하고 깍듯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니·
정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간수들· 아직 1학년밖에 안 된 후배를 이렇게?’
이한은 속으로 데스 나이트들을 욕했다·
언데드답게 사람의 마음이란 게 없었다·
“저는 징벌방에 간 적이 없습니다만·”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탈주나 탐험은 했을 거 아니야· 아· 혹시 모두 다 안 잡힌 건가? 대단한데?”
“아니요· 남는 시간에는 개인실에서 공부했습니다·”
“···”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상대의 안에 깃든 무시무시한 광기를 느낀 것이다·
“그런데 지금 들고 계신 건 뭡니까?”
“친구들 줄 선물인데·”
“제가 대신 들어드리겠습니다·”
“잠ㄲ···”
알히들은 이한의 양팔 위로 쌓인 선물더미를 돕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아니?!’
선배가 너무 자연스럽게 들고 있어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포장된 선물 상자 하나만 들었는데도 넘어질 뻔한 것이다·
“이 이게 뭡니까?!”
“그러니까 잠깐 기다리라고 했잖나· 괜찮아? 그건 살코 줄 강화 모루라서 꽤 무거울 텐데·”
“···”
푸른 용의 탑 수석이자 펭에린 가문의 기대 받는 마법사인 알히들은 다시 한 번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강화 마법 걸어줄게·”
“역시··· 선배님의 마법 실력은 이런 평상시에도 쉬지 않고 단련했기에 단련된 것이군요·”
“뭔 개소리를?”
이한은 당황했다·
물론 에인로가드에서 탈주하거나 물자를 옮기다 보면 과중량 상태에서 돌아다니는 일에도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이한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강화 마법 그 다음에는 마력을 사용한 기사식(式) 육체 강화 그 다음에는 염동력 마법 등등으로 중량의 한계를 올려왔다·
덕분에 에인로가드 제일의 짐꾼이란 칭호를 얻었지만(아직 선배들과 겨뤄보진 않아서 확실하진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지 단련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에안두르데가 말해줬습니다만?”
“···”
‘에안두르데!’
이한은 속으로 자리에 없는 후배의 이름을 외쳤다·
가짜 소문을 퍼뜨리다니!
“이건 단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에인로가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존경스럽습니다· 저도 앞으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돌아다녀보도록 하겠습니다·”
“존경하면 말을 좀 들어주지 그러냐?”
이한은 어이없어했지만 알히들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어디 채석장에 가서 돌이라도 캐온 뒤 배낭에 넣어 볼 생각이었다·
“참· 선배님· 식량은 감사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이한은 일단 시치미를 뗐다·
분명 에안두르데를 만날 때마다 친구들하고 나눠 먹으라고 식량을 챙겨주긴 했지만 이름은 숨겼던 것이다·
에안두르데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 분명···
“선배님께서 주셨잖습니까?”
“무슨 소리야? 에안두르데가 구해온 식량을 착각한 거 아닌가?”
“??”
존경스러운 선배가 이상한 말을 하자 알히들은 갸우뚱거리며 설명했다·
1· 에안두르데가 어디선가 식량을 구해왔다·
2· 출처를 물어보면 ‘이름 밝히면 안 되는 선배’한테서 받았다고 한다·
3· 에안두르데가 평소 말하는 선배는 워다나즈 선배 무리밖에 없다·
4· 아 워다나즈 선배구나!
“···”
‘에안두르데!’
이한은 속으로 자리에 없는 후배의 이름을 다시 외쳤다·
그냥 자기가 구해왔다고 할 것이지 굳이 저런 서투른 거짓말을 하다니·
‘다음에 만나면 거짓말하는 법을 훈련시켜야겠군·’
가이난도가 있으니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래··· 뭐··· 됐다· 어쩔 수 없지·”
빠르게 포기한 이한은 그래도 미련이 남았는지 물었다·
“근데 나 말고 가이난도 같은 친구였을수도 있지 않나?”
“푸하하하하하!”
알히들은 오늘 처음으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농담을 들어서 그런지 더더욱 웃음이 격렬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잠깐 농담이 아니셨습니까?”
“···너 가이난도 만나본 적 없지 않냐?”
“예· 그런데 에안두르데한테 듣기로는 계속 음식을 훔쳐먹는 분이라고···”
“···”
이한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자기 탑의 부끄러운 소문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일은 생각보다 창피했던 것이다·
“···오해다· 장난으로 한 거지·”
“장난치고는 너무 횟수가 많았던 것 같···”
“조용히 해·”
“예!”
후배가 정말로 조용히 하자 이한은 미안해져서 다시 말했다·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지· 그보다 에인로가드는 어땠지?”
에인로가드에 새로 입학한 신입생들은 보통 세계가 무너지는 충격을 받기 마련이었다·
특히 알히들은 입학하기 전 해골 교장을 따로 만나 몇 가지 추가적인 거짓말을 들은 사람·
그 충격은 몇 배로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걸 생각하면 이한은 아직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놀랍고 경이로웠습니다·”
“어 열악하거나 욕이 나오진 않았나?”
“그건 당연하고요·”
알히들이 무슨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놀랍고 경이로운 것과 별개로 욕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그보다 교장 선생님이 한 거짓말 때문에 나중에 많이 놀랐을 것 같은데·”
해골 교장은 알히들에게 ‘이한 같은 마법사는 에인로가드에 굴러다닌다’고 거짓말을 했다·
후배가 그 거짓말 때문에 마법에 몰두하다가 마음에 상처라도 입지 않았을까 싶어 이한은 걱정이 됐다·
“아뇨· 거짓말을 했다는 건 그냥 입학 첫날에 깨달았습니다·”
“···그 그래·”
알히들은 과연 총명한 후배였다·
입학하자마자 해골 교장의 폭언과 교수들의 설명을 듣고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알히들 그러고 보니 수도에는 무슨 일로 온 거지? 꽤 멀리 움직여야 했을 텐데·”
“저는 가문 모임이 있어서 왔고 에안두르데는 친구의 초대장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마차로 왔어요·”
다른 탑이지만 같은 마차로 왔다는 이야기에 이한은 흐뭇해했다·
삭막한 선배들과 달리 후배들은 조금이나마 이한 학년의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식량 덕분에 친해진 걸지도 모르겠군·’
“에안두르데한테 보답하기 위해서 마차를 빌려준 건가?”
“그런 이유도 있긴 했습니다만 사실 에안두르데가 먼저 절 협박하고 마차에 강제로 올라탔습니다·”
“···”
‘에안두르데!’
이한은 속으로 자리에 없는 후배의 이름을 세 번째로 외쳤다·
가만히 있었으면 그냥 초대를 받았을 텐데!
그러나 알히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원대한 마법의 길에 사사로운 감정이나 원한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잠깐· 에안두르데가 친구의 초대장을 받았다고?”
이한은 설마 싶었다·
에안두르데에게 초대를 보낼 사람이라면 조우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조우린은 정이 많으니···’
곧 이한이나 해골 교장 알시클에게 편지를 보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은 이한의 낯빛이 급변했다· 알히들이 깜짝 놀라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알시클 님을 놓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