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9화
“멀리 도망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버 모 교수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 마법사들은 아무도 모르는 심산유곡으로 도망치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위대한 예술가도 그렇게 호다닥 사라진 만큼 벌써 저 멀리 갔을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에요· 이한 학생· 제국의 대도시에서 멀어지면 필요한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가르시아 교수는 대신 설명했다
뛰어난 제자였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는 게 이럴 때 드러났다·
에인로가드 출신이라면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도주하더라도 챙길 건 챙기는 것이다·
“역으로 허를 찌르는 효과도 있죠·”
“···”
설명에 집중하던 가르시아 교수는 제자가 쓰레기 보는 눈빛으로 선배를 쳐다보고 있다는 건 알아채지 못했다·
“쓰ㄹ··· 아니 선배님이 멀리 안 가신 이유는 알겠습니다· 어쨌든 초상화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잘 됐군요·”
이한이 부르려고 하자 가르시아 교수는 재빨리 말렸다·
“잠깐만요· 이한 학생·”
“?”
“나중에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예? 어 바로 알고 싶어하실 것 같은데요· 충격받으실까봐 그러시는 겁니까?”
자기가 두고 간 그림 하나가 왕자 시절 해골 교장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여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긴 했다·
하지만 이한은 믿었다·
예술가처럼 뛰어난 마법사라면 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양분으로 삼을 거라는 걸·
‘선배님이라면 분명 괜찮으실 거다·’
“아니 그게 아니라···”
가르시아 교수는 머뭇거렸다·
해골 교장의 초상화 때문에 상대가 충격받는 건 교수가 알 바 아니었고 그보다는···
“···억!”
전당 안을 어슬렁거리던 위대한 예술가는 이한과 눈이 마주쳤다·
외마디의 비명을 지른 위대한 예술가는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페트로가드에서 도망치셨는데 이렇게 바로 이한 학생을 만나면 아무리 선배님이어도 수치스러우실 것 같아서···”
“아·”
이한은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지만 선배 되는 마법사들에게는 체면이 있었던 것이다·
“전혀 생각 못했습니다· 확실히 체면이···”
선배 마법사들에 대해 생각하던 이한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뭐지?’
그러나 그런 위화감을 해소하기도 전에 위대한 예술가가 다시 나타났다·
치렁치렁하게 긴 검은 머리칼에 원래 있던 가면 대신 자리 잡고 있는 이목구비는 고귀한 가문 출신의 귀부인을 연상시켰다·
그걸 제외한 복장이 그대로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아차· 선배님의 뜻을 존중해드려야 한다·’
이한은 최대한 멍청한 태도로 말했다·
“저 사람은 누군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교수님·”
“···널 속이려고 변장한 게 아니니까 그런 같잖은 연기는 할 필요 없다·”
예술가는 후배를 노려보며 말했다·
가끔 쓸데없는 배려가 사람을 더 상처입힐 때가 있었다·
“이 전당 안에서는 날 아지르모 부인이라고 부르도록 하거라···”
휠씬 괜찮은 가명들이 많을 텐데 군이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드래곤 이름 중 하나를 갖고 오는 예술가의 모습에 이한은 의아해했다·
“아지르모라는 이름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아주 좋은 질문이야· 그렇다· 용이란 종족에 그 이유가 있지·”
예술가는 질문에 만족했는지 흔쾌히 설명해줬다·
제국의 여러 종족들은 제각기 자기들이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했지만 어느 종족도 무시할 수 없는 위대한 종족을 하나 뽑는다면 용밖에 없었다·
선천적으로 완벽함을 타고난 대륙의 고대종족·
“용들은 모든 걸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의 이름도 성별도 색깔도 계약자도 심지어 해골 교장의 제자가 될지 말지도 선택 가능하지·”
‘마지막은 다른 종족도 선택 가능하지 않나?’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말했다가는 화낼 것 같아서 참았다·
“그렇기에 나는 미치광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을 때 용처럼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해나가겠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빌린 것이다·”
이름에는 마법적인 힘이 따르는 법·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겠다는 뜻으로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고른 예술가에게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용의 이름은 당연한 선택처럼 보였다·
“과연 그렇군요·”
“어떻게 보면 용의 이름이 나 자신을 보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런데 선배님· 두고 가신 그림 하나가 젊은 왕자 시절의 교장 선생님으로 변했는데요·”
“···”
예술가는 용의 이름이 보호하는 것치고는 너무 크게 비틀거렸다· 안색은 마치 납빛처림 창백해져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진심으로? 진심으로 묻는 거냐? 어떤 마법사가 그런 말을 듣고 괜찮을 수 있겠느냐?”
“맞는 말이야·”
가르시아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인로가드 출신이라면 어느 누구도 저 말에 태연할 수 없을 짓이다·
저걸 무슨 길가다 돌멩이 주운 것처럼 말하다니···
“대체 어떻게???”
“저도 잘·· 사실 우연히 움직이는 그림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저희가 연습할 때 말입니다·”
“연습할 때? 하지만 그 때는 어떤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선배님이 제자가 아니라고 하셔서 토라지셨다고···”
이한은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림이 변한 건 교수들도 설명하기 힘들 만큼 우연이 작용한 일이었다· 설명하려고 해도 한계가 명확했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정확히 전달되었다·
왕자 시절 해골 교장의 그림이 예술가한테 단단히 토라졌다는 사실!
“···”
예술가는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악한 해골 교장보다 더 역겨운 건 토라진 해골 교장이었다·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정신이 붕괴된 기분이구나· 오늘 경매가 끝나면 상태를 확인해야겠어·”
“한 번 뵙는 건···”
후배의 제안에 예술가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충격이 너무나도 큰 상태였다· 여기서 직접 대면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지 예술가 본인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변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정보다· 감사를 표하마·”
“그래도 만나보시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확실히 방법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군·”
예술가는 못 들은 척 화제를 돌렸다·
학파 막내 제자와의 마법 연습이 어떤 영향을 줬는지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마법의 전체적인 방향성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한이 그림을 살아 움직이게 바꿨다면 예술가 본인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저런 마법사를 불러오지 않는다·’
예술가는 굳게 다짐했다·
만약 젊은 해골 교장을 불러온다 하더라도 적당히 건조하고 냉정한 성격이지 이한이 말한 것 같은 모습은···
···그러나 한 번 들은 모습은 쉽게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으윽·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란 말이다! 이 악령이!”
“···”
이한은 예술가가 두통에 시달리는 듯한 비명을 지르자 갑자기 걱정이 됐다·
괜히 말했나?
“그냥 숨길 거 그랬나요?”
“아뇨· 잘 말했어요· 언젠가는 알아야 할 텐데요 뭘· 극복하는 건 선배님이 알아서 할 일이죠·”
가르시아 교수는 은근히 냉정했다·
제자면 모를까 속 좁은 선배까지 걱정할 만큼 교수가 한가하진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원예가 클럽 회원들도 만나봐야 하는 만큼 이한은 입을 열었다·
선배한테 전할 말은 다 전했으니 이제 할 일을 하러 가야 했다·
그 말을 들은 예술가가 충격에서 벗어나 말했다·
“잠깐· 여기 왔다는 건 경매에 참가하기 위해서겠군· 어느 경매에 참가할 예정이지?”
“일단 원예가 클럽 경매부터 참가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다른 경매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만큼 이한은 확정된 것부터 말했다·
“잘 됐구나· 나도 참가할 생각이었는데·”
예술가는 잘 됐다는 듯이 말했다·
보기 드문 희귀식물이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거였는데 마침 후배도 예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같이 가도록 하지·”
“엇·”
갑작스러운 말에 이한은 당황했다·
위대한 예술가는 물론 존경스러운 선배였지만 원예가 클럽에 방문할 때 같이 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이미 페트로가드에서 경험한 일로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부여 마법사하고 같이 다녀서 좋을 게 없는데·’
만약 원예가 클럽에서 ‘아니! 당신은 내 작품 의뢰를 받고 도망친 그 마법사 아닌가!’같은 소리가 나온다면 예술가 옆에 서있던 이한은 자동으로 ‘그 파렴치한 마법사의 후배’로 인식이 잡혔다·
새로 클럽에 들어온 회원치고는 지나치게 가혹한 신고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선배님· 원예가 클럽은 자격이 없으면 방문할 수가 없습니다만·”
“알고 있다· 당연히 갖고 있지·”
예전에 살아있는 나무로 된 저택을 완성했던 일로 예술가는 원예가 클럽 회원들의 극진한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당연히 자리에 참석도 가능했다·
“···그럼 같이 가시죠···”
이한은 살짝 시무룩해진 상태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아는 척하지 말 걸!
“이한 학생· 선배님하고 같이 가나요?”
“예···”
가르시아 교수의 질문에 이한은 살짝 희망 섞인 눈빛을 보냈다·
혹시 교수가 이 자리에서 구해주려는 것일까?
“잘 됐네요!”
“···?”
이한은 순간 자신이 가르시아 교수한테 무슨 잘못을 했나 싶었다·
“꼭 많이 받아오세요·”
“???”
* * *
“어떤 게 필요하십니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
검은 머리칼을 한 귀부인의 선언에 관리인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경매가 시작되기도 전에 거액의 웃돈을 주고 사버리는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한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경쟁 붙으면 안 되는 물건이라도 있으셨나?’
위대한 예술가는 바로 원예가 클럽 회원들을 만나는 대신 가는 길에 있던 전당의 다른 경매장에 훌쩍 들렸다·
-흠· 괜찮겠군·
동부 채집꾼 길드 시약 경매(희귀 시약 다량 보유)
그러더니 이한이 평생 하지 못할 것 같은 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꼭 필요하신 게 있으셨습니까?”
“아니· 경매까지 기다렸다가 귀찮게 다투고 싶지 않았다· 구매한 시약들은 여기 에인로가드 학생의 저택에 보내도록 해라·”
“···?!!”
관리인만큼이나 이한도 놀랐다·
“선배님· 저는 저걸 살 돈이 없··· 없진 않은데 저기에 쓰고 싶진 않습니다만·”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설마 너한테 강제로 사게 하겠느냐? 에인로가드에 돌아갔을 때 써라· 아직 2학년이니 이런 시약은 아무리 많아도 모자라겠지· 흐음· 저기도 들러보자· 부여 마법 학파도 배우고 있다고 했지? 쓸만한 소모용 보석이 필요하겠군·”
이한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갔다· 어찌나 충격적이었는지 ‘소모용 보석’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를 들었는데도 지적하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 내놓도록 하거라·”
“하 하지만 이 보석은 사겠다고 하신 분이···”
“불러라·”
“예?”
“불러서 전해라· 위로금으로 제시한 값의 두 배를 내겠다고·”
문제는 즉시 해결되었다·
이한은 고유세계를 시전하는 해골 교장을 봤을 때와 비슷한 전율을 느꼈다·
일정 이상의 재력은 고유세계와 비슷한 효과를 일으켰던 것이다
‘···존경스럽다!’
그제야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가 무슨 뜻으로 말한 건지 알 수 있었다·
학교 운영도 하지 않고 무의미하게 재산을 탕진하지도 않는 부여 마법사는 실로 막대한 부(富)의 화신이었다·
그 화신이 자신의 선배라는 사실이 한없이 감사할 뿐이었다·
“마법사 카드군· 이것도 지금 다 구입하도록 하지·”
“선배님· 마법사 카드는 어째서?”
“응? 너희들은 안 갖고 노느냐?”
예술가는 의아해했다·
2학년 정도면 갖고 놀 때가 아니었나?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한은 그냥 받은 다음에 가이난도한테 줘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