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8화
“빨리 나가시죠· 참· 저 때문에 떠나신 건 비밀입니다·”
“설마 페트로가드 놈들이 이한한테 책임을 묻겠어요?”
친구들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수상한 외부인을 치워달라고 불러서 치워줬더니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원한을?
그건 발드로가드에서도 안할 짓이었다·
“물을 거 같은데·”
“맞아요· 물을 가능성이 높아요· 교수님들한테 비밀 엄수 부탁하고 빨리 나가죠· 기사님한테 책임을 돌리는 게 좋겠어요·”
가르시아 교수의 계책에 이한은 존경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과연 에인로가드를 먼저 졸업한 선배의 지혜는 보통이 아니었다· 현 상황에서 최적의 희생양을 찾아내는 속도가 남들보다 대여섯 배는 빠른 것이다·
“참· 페트로가드에서 더 있고 싶은 사람?”
이한은 떠나려다가 문득 친구들 생각이 나서 물었다·
자신만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친구들 중에는 두 번째로 만난 마법학교 학생들과 더 어울리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두 번째요?”
가르시아 교수는 의아해하며 손가락을 접었다·
칼라로가드 발드로가드 페트로가드면 3번째 아닌가?
“워다나즈 너는 어떻게 할 건데? 끝나면 바로 별장으로 돌아갈 건가?”
“아니· 난 슬슬 경매장에 방문해야 할 것 같아·”
저번 학기에 만드라고라를 훌륭하게 키워낸 이한은 버드나무 교수의 추천으로 <제국 원예가 클럽>의 내부 경매에 참가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
내부 경매에 참가를 허락받았다는 건 곧 가입도 허락받았다는 뜻·
클럽의 신입 회원이라면 먼저 찾아가서 인사 정도는 올리는 게 예의바르게 보일 터였다·
‘예의 바르게 보이면 만드라고라도 더 비싸게 팔릴지도 모른다·’
원래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이한은 클럽에 방문할 때 구울의 왕이나 서리거인의 왕이 그려진 망토라도 하나 걸치고 갈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수도 경매장이면··· 황금의 전당에서 진행돼?”
“응·”
경매란 게 기본적으로 비싼 물건들을 모아놓고 귀한 사람들을 부르는 만큼 아무 장소에서나 진행되지 않았다·
물론 흙바닥 위에서 감자 포대를 사기 위해 다투는 에인로가드식 경매도 있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제국의 경매는 최소한의 품위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국 수도 인근에서 경매가 진행된다면 황금의 전당에서 열릴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제국 이전부터 행운과 부(富)의 축복이 겹겹이 깃든 신성한 장소·
이 전당에서는 원예가 클럽은 물론이고 여러 경매가 같이 진행되었다· 각자 원하는 물건이 있는 학생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다른 제국 마법학교 출신의 뛰어난 마법사들과 더 교류할 것인가 아니면 마법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탐욕스러운 호사가들과 어울릴 것인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우린 워다나즈 네 일정을 존중해·”
“페트로가드 친구들은 언젠가 만날 기회가 있을 거야· 없어도 되고·”
친구들은 즉시 대답했다·
솔직히 페트로가드에 더 있어봤자 별로 재미도 없을 것 같았다·
여기 와서 제일 재밌었던 게 가이난도가 기사 얼굴에 독 뿌린 거였으니···
“저는 좀 더 그려보고 싶습··· 으으읍·”
시아나는 황급히 티질링의 입을 막았다· 이한이 고개를 돌렸다·
“방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티질링 사제님도 기대된대요!”
다른 사제들도 재빨리 시아나를 거들었다· 그 모습에 가르시아 교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불사조 탑이 저래도 되는 걸까?!’
사제 출신 학생들이 활발해지고 적극적으로 변한 건 좋았지만 가끔 이래도 되나 싶을 때가 있었다·
* * *
“흐음· 흐으으음·”
“으으음·”
교수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나온 학생들은 신중하게 깃펜으로 종이 위를 그어나갔다·
지금 이들은 참가할 수 있는 경매를 찾고 있었다·
“여기! 여기 경매는 우리가 참가할 수 있을지도···”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지젤에게 좋이를 내밀었다·
<너도밤나무 경매>
기사의 기사에 의한 기사를 위한 무구 판매·
오직 명예로운 기사들만 참석 가능·
지젤 대신 이한이 보지도 않고 말했다·
“거기 참가 불가능해· 밑에 더 읽어보면 현 기사단 소속만 참가 가능하거든·”
이하 제국 기사단 소속이 아닐 경우 참석 불가능···
“···”
실망한 흰 호랑이 탑 학생은 문득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워다나즈 넌 이걸 어떻게 알고 있냐?”
“예전에 참가하고 싶어서 조건 훓어본 적 있었거든· 안되더군·”
“···”
넌 대귀족 가문 출신이잖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모두 속으로 황당해했다·
제국의 경매에는 손님의 자격을 제한하는 곳들이 꽤 있었다·
당장 이한이 참가하는 <제국 원예가 클럽>의 내부 경매도 회원이 아니면 참가가 불가능했으니 기사단 소속이나 클럽 소속 같은 자격은 꽤 흔한 편이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 왜 그런 제약을 걸어놓는지 모르겠어· 자유로운 참가가 경매를 더 활성화시킨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건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미 미안하다· 워다나즈· 내가 잘못했어·”
이한이 갑자기 폭포처럼 투덜대며 불평을 늘어놓자 흰 호랑이 탑 학생은 겁에 질렸다·
워다나즈가 이럴 때가 제일 무서웠던 것이다·
차라리 그냥 화를 내고 욕을 해!
“역시 마법사들 경매밖에 없나·”
“그거라도 가능한 거에 감사해야지·”
학생들은 참가 가능한 경매의 목록을 확인하며 볼멘소리를 냈다·
에인로가드 출신인 만큼 상당히 많은 마법사들 경매에 참가할 수 있었지만 학생들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음 학기 동안 천문도를 그려줄 아티팩트가 필요해·’
‘연구 생각하면 유물 하나 정도는 가져가야 하는데·’
‘시험 칠 때 속임수를 쓸 수 있는 아티팩트는 없나?’
희귀하고 값비싼 유물이나 아티팩트일수록 은밀한 경매에 남 몰래 나오기 마련·
어디어디 클럽 내부 경매라 외부인은 참가하지 못한다는 글을 볼 때마다 학생들은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좋아· 다 됐다·”
그러는 와중에 가이난도는 깔끔하게 깃펜을 내려놓았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의아해하며 종이를 확인했다·
서부 마법사 카드 경매(참가)
동부 마법사 카드 경매(참가)
남부 마법사 카드 경매(참가)
···
‘괜히 봤군·’
친구들은 무시하며 시선을 돌렸다· 요네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 그런 것만 참가하면 나중에 어떡하려고?”
“뭘?”
“뭐긴 뭐야· 있는 금화 다 카드에 탕진하면···”
요네르는 그래도 사촌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이한을 살짝 가리켰다·
기껏 모아 놓은 금화를 카드에 써버리면 진지하게 다음 학기 동안에는 탑 밖으로 쫓겨나서 자야 할지도 몰랐다·
“카드 팔려고 참가한 건데?”
“···뭐?!!”
요네르는 물론이고 다른 친구들도 깜짝 놀랐다· 이한은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을 쳐다보며 경고했다·
“쉿· 다들 계획 짜고 있잖아·”
“하 하지만 워다나즈· 가이난도가 카드 팔려고 경매 참가한다잖아·”
“뭐?!?!!?!”
“···”
가이난도는 친구들의 반응에 부루퉁해졌다·
이한은 달래며 물었다·
“미안· 나도 모르게· 그보다 카드를 판다니? 혹시 최근에 마법범죄자나 악신숭배자가 널 협박하고 있니?”
“···아니거든?! 경매장에서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금화가 필요하잖아·”
경매는 구매자뿐만이 아니라 판매자로서도 참가할 수 있었다·
당연히 갖고 있는 아이템들을 팔아 금화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정말 놀랍군!’
그게 가이난도와 마법사 카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심지어 다른 탑 학생들도 놀라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우리도 금화를 더 마련해야 하나?”
“더 의뢰를 받았어야 했을지도···”
“그건 2학기 때에나 본격적으로 시작한다잖아· 방학 때는 시간이 없었고·”
“저번에 워다나즈하고 번 돈이 있긴 한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뭘 어떻게 해서 벌었는데??”
학생들이 소곤대자 가르시아 교수는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여러분· 다들 경매에 흥미를 보이는 건 좋은 일이에요· 그렇지만 욕심에 빠져서 한 가지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군요·”
‘절제하라는 소리신가?’
“경매장에는 마법사를 필요로 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아요· 감정부터 저주 해제 물약 제조 등등· 에인로가드 출신이라면 충분히 의뢰를 받을 수 있답니다·”
‘아니었군!’
자신이 학창 시절에 금화를 충당했던 노하우를 전수하는 가르시아 교수의 모습에 학생들은 모두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에인로가드에 진정한 스승이 있다면 바로 이 눈앞의 교수일 터였다
“교수님! 어떤 의뢰가···”
“흰 호랑이 탑에게 특히 더 좋은 의뢰도 있습니까?”
“혹시 흑마법 학파인 건 밝히는 게 좋을까요 안 밝히는 게 좋을까요?”
친구들이 질문 세례를 퍼붓는 동안 원예가 클럽을 제외한 경매 중 참가할 만한 게 있나 둘러보던 이한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입을 열었다·
“교수님· 교수님·”
“?”
조용히 앉아 있던 볼라디 교수는 제자의 부름에 시선을 돌렸다·
“교수님께서는 학창시절에 어떻게 금화를 버셨습니까?”
“현상금과 결투·”
친절하게 대답해준 볼라디 교수는 제자의 추후 질문을 기다렸다·
가르시아 교수가 온갖 질문을 다 받고 있는 것처럼 눈앞의 제자도 그렇게 캐물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 호기심과 탐구심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아하·”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다른 방법으로 벌어야 할 것 같았다·
“···”
* * *
찬란한 빛으로 뒤덮인 옛 양식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황금의 전당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이한은 전당 전체를 타고 흐르는 기묘한 마력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틀어버릴 수도 없을 만큼 강하고 오래된 힘이었다·
“역사적인 장소죠· 이한 학생· 느껴지나요?”
가르시아 교수는 이한이 왜 쳐다보는지 알겠다는 듯이 옆에서 설명했다·
이 황금의 전당은 제국 이전부터 행운과 부의 축복이 겹겹이 깃든 곳이었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실제로 대규모의 신성 마법들이 몇 번이고 축성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덕분에 이 안에서는 소세계처럼 몇 가지 규칙들이 강제됐다·
소매치기를 할 수 없다거나 물건을 다른 물건으로 위장할 수 없다거나···
‘헉· 황금 무게 계산하고 있었는데·’
이한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마력의 흐름을 이야기했다·
“이 마력들이 안에서 별개의 규칙을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흥미로운 장소에요· 꼭 보물 때문이 아니라 이 마법을 보려고 오는 마법사들도 제법 될 정도죠·”
가르시아 교수는 이 황금의 전당은 아마 의도하고 만들어진 게 아닐 거라고 설명했다·
여러 사제들과 마법사들이 마법을 시전한 게 예상 밖의 효과를 만들었고 그 효과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흘러온 것일 거라고·
“이한 학생은 원예가 클럽부터 방문한다고 했죠?”
“예· 혹시 원예가 클럽 회원들은 어떤 선물을 좋아할까요?”
“···그냥 가도 괜찮으니 그냥 가세요·”
이한은 속으로 투털댔다·
가르시아 교수는 너무 청렴한 탓에 이런 일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하고 교수님은 여기서 기다릴 테니 다들 자유롭게 돌아다녀보세요· 궁금한 거 있으면 찾아오··· 아악!”
“???!”
이한은 깜짝 놀랐다·
가르시아 교수가 마치 젊은 해골 교장의 그림을 발견했을 때처럼 비명을 지른 것이다·
주변에 어마어마한 위험이 있는 게 분명했다· 실제로 볼라디 교수도 마력을 내뽑으며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한 학생· 보여요? 저기?”
“청옥이 박힌 터번을 두른 엘프를 말하시는 겁니까? 젠바야의 마법이 걸린? 황금 장식이 오히려 가격을 깎을 것 같은···”
“대체 그런 건 어떻게 봤어요? 그거 말고 옆! 옆에요!”
“??”
“선배님이에요·”
먼저 도망친 위대한 예술가가 전당을 어슬렁거리는 모습에 이한은 황당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