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6화
“그런 왕자가 있어요?”
이한이 경악해하는 사이 옆에서 가르시아 교수가 의아해했다·
페트로가드의 뛰어난 부여 마법사들은 원시 마법을 이용해 작품에 일시적으로 숨결을 불어넣을 줄 알았다· 그건 가르시아 교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예술가 선배의 처소에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 선배가 걸어놓았을 정도의 그림이라면?
“암릿비르마 왕자인가?”
“그건 누굽니까?”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붉은 기사가 대신 대답해줬다·
“옛 칠왕국 시절의 왕자라네· 뛰어난 작품들을 여럿 남겼지·”
“아하·”
“···자네는 분명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라고 했지? 대귀족 가문 출신인데 왜 모르나?”
기사 람의 순수한 의문은 이한을 살짝 아프게 만들었다·
칠왕국 시절에 있었던 가짜 황금 투기 사건은 시작부터 끝까지 낱낱이 꿰고 있었지만 유명한 예술가 왕자는 정말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가짜 황금 투기 사건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 사건이 있었나? 아니· 왜 그걸 아는 사람이 암릿비르마를···”
“이한 학생이 똑똑해서 그래요· 하여간 이한 학생· 암랏비르마 왕자는 아니라는 거죠?”
제자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가르시아 교수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상상을 초월했다·
“네· 교장 선생님입니다·”
“···”!
가르시아 교수는 너무나도 크게 충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멈춰버렸다·
마치 시간 마법에라도 당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누누누누누누구요?”
“교장 선생님이요···”
“거짓말 하지 마요! 선배 방에 교장 선생님의 그림이 왜 있어요?”
“그게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이한은 짧고 간단하게 요약했다·
너무나도 선배가 생각하고 있을 법한 계획에 가르시아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할 법해!’
성격상 충분히 할 사람이었다·
···물론 그게 안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 원래 움직이는 그림이 있었어요?”
작품에 숨결을 불어넣는 것도 단계가 있었다·
단순히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말을 거는 수준까지·
기사의 말을 들어보니 친절했다고 하던데 그럼 말을 거는 것까지 가능하단 소리였다·
‘아무리 선배님이라지만 정말 대단하신데?’
예술가가 없는데도 말을 건다는 건 어느 정도 지속성을 확보했다는 소리 아닌가·
위대한 예술가의 마법을 감안해도 실로 놀라운 결과였다·
“아뇨· 없었습니다·”
“네?”
“적어도 제가본 그림 중에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애초에 선배님의 목적은 완벽한 작품을 완성하는 거지 어중간한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예술가가 원하는 건 아예 살아 움직이는 선량한 대마법사였지 그림 속에서 말을 걸어주는 친절한 대마법사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저런 걸 완성하는 데에 힘을 낭비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군요· 그럼 하나밖에 없어요·”
가르시아 교수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어떤?”
“기사님께서 착각하신 거예요·”
“···”
“···”
이한은 현실도피하는 가르시아 교수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심지어 볼라디 교수도 조금 어이없어하는 것 같았다·
기사 람은 작게 볼멘소리를 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걸 착각할까···”
* * *
-제자님! 오랜만이네요·
“아아아아악!”
처소 안에 들어간 가르시아 교수는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람은 당황해서 물었다·
“왜 왜 그러는 건가?”
저 강한 전투 마법사가 저렇게 비명을 지를 정도의 일이라니·
혹시 저주가 걸린 그림인가?
“아닙니다·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은 다들 저 왕자의 그림을 보면 비명을 지르곤 하지요·”
‘마법사들이란!’
기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제국 마법학교의 마법사들은 제각기 다른 기행으로 유명했지만 역시 그 중 가장 괴팍한 건 에인로가드였다·
“빨리 문 닫고 들어와요· 이한 학생·”
“어· 기사님이 들으면 안 됩니까?”
“학교 창피하게 무슨··· 빨리 들어와요!”
람은 친절하게 밖으로 나가줬다·
속으로는 ‘혹시 옛날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이 비열하게 습격한 왕자인가?’같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원래 마법사들의 일은 마법사들이 해결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셋만 남자(그림까지 포함하면 넷이긴 했다) 그제야 가르시아 교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실 수 있었다·
-괜찮으신가요 제자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아 보여서 걱정되는데요·
“전 괜찮습니다·”
-제자님 말고 옆의 제자님이요·
그림 속의 왕자는 가르시아 교수를 가리켰다·
“아하· 가르시아 교수님도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얻으셔서··· 그보다 스승님·”
-···
왕자는 못 들은 척했다· 이한은 의아해하며 다시 불렀다·
“스승님?'”
-····아· 미안해요· 들기 너무 좋은 말이라서··· 저처럼 부족한 마법사에게 이런 홀륭한 제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네요·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진정하세요· 교수님·”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이미 한번 경험한 적 있는 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는 걸 보니 현실에서 만나게 된 일이 그만큼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었다·
‘놀랍긴 하군·’
그리고 이건 이한에게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 맞았다·
옆에서 가르시아 교수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되레 냉정해졌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웠다·
일단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그림이 위대한 예술가가 자리를 비웠는데도 지속된다는 것도 놀라웠고 그 상대가 심지어 이한이 과거 차원에서 만난 해골 교장이란 건 더더욱 놀라웠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예술가 선배님은 분명 그 과거 차원에 방문하신 적이 없었는데?’
“스승님· 몇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제자님· 제자님들을 도울 수 있는 건 제 기쁨이죠·
젊은 왕자는 수줍게 말했다· 이한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어야 했다·
“크음··· 네· 혹시 예술가 선배님과 만나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아니요· 애초에 그 마법사와는 관계도 없는걸요·
“네? 어 그 선배님도 엄밀히 따지자면 스승님 제자···”
-아니요·
이한이 학파의 계보와 구성을 설명하려고 하자 왕자는 단호히 말을 잘랐다·
-그 사람은 제 제자가 아니에요· 본인이 부정했거든요·
“···”
“···”
이한과 가르시아 교수는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니까 혹시 지금···
“토라지신 겁니까???”
“쉿· 이한 학생· 누구나 섭섭해할 수 있어요·”
“···그 그렇군요·”
이한은 상대를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선량한 왕자 시절의 해골 교장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림의 힘을 빌려 현현한 상태·
얼마나 불안정한지 모르는데 괜히 자극해서 좋을 게 없었다·
“잠깐· 스승님· 그럼 예술가 선배님은 어떻게 스승님을 불러온 겁니까?”
-그 사람이 불러온 게 아니에요· 제자님·
그림 속의 왕자는 선뜻 설명에 나섰다·
원래 어제까지만 해도 왕자는 이 차원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단순한 그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한이 예술가 밑에서 음악 마법을 연습하는 사이 왕자는 자신이 깨어났다는 길 자각하게 되었다·
“···예?!”
이한은 자신이 범인이었다는 길 깨닫고 깜짝 놀랐다·
가르시아 교수와 볼라디 교수는 아무 말 없이 제자를 쳐다보았다·
두 교수가 딱히 별 생각 없이 쳐다보는 걸 수도 있었지만 이한은 이상하게 기분 탓인지 ‘또 또 해놓고 모르고 있었어요?’라는 환청이 들렸다·
‘하지만··· 말이 되는군·’
과거에서 생전의 해골 교장을 직접 만나본 적 없는 예술가가 직접 이렇게 불러올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마법사는 둘 밖에 없었으니 상대가 아니라면 이한이 범인이었다·
“저는 딱히 의도하지 않고 연습만 했을 뿐입니다·”
-글쎄요· 제자님· 그건 저도 내막을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군요· 하지만 마법이란 건 원래 모든 걸 다 알 수 없는 신비가 있어요· 어쩌면 우리 사이의 인연이 부족한 마법을 채워준 걸지도 모르죠·
“이한 학생· 입에서 피 나요· 살살 깨무세요·”
“죄송합니다·”
가르시아 교수는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제자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혀를 너무 세게 깨문 모양이었다·
자신도 똑같이 깨물었던 만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예술가 선배는 이걸 알려주기 위해 스승님을 두고 가신 겁니까?”
-아니요· 그냥 제가 숨은 건데요·
왕자는 친절하고 선량했지만 제자 아닌 마법사에게 자신의 각성과 사정을 설명해줄 만큼 무르지 않았다·
깨어나자마자 바로 숨어 있다가 예술가가 작품들을 챙겨 도망치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희미해지고 있군·”
“괜찮습니다· 교수님· 저는 멀쩡합니다·”
볼라디 교수가 불쑥 걱정하는 말을 꺼내자 이한은 괜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교수는 이상한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 제자를 쳐다보았다·
“그림이 희미해지고 있다·”
“아!”
민망해진 이한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볼라디 교수의 말이 맞았다·
이한과 가르시아 교수가 충격에 빠진 탓에 눈치 채지 못했는데 그림의 색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구성을 유지하기 위해 마력을 소모하고 있어서겠죠· 제자님들· 너무 놀라지 마세요·
왕자는 별로 개의치 않아했다·
이렇게 제자들과 다시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근사하고 감사할 일이었던 것이다·
이 마법사의 처소는 잔여 마력이 많았기에 이 마력들을 흡수하는 길로 어떻게든 그림의 형태를 유지했지만 마력이 모두 소모되면 아마 작별의 시간이 찾아올 터였다·
“제가 마력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이한은 서둘러 나섰다·
그림이 희미해지고 있는 지금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림 근처로 다가가 마력을 강하게 발산하며 이한은 물었다·
“어떻습니까?”
“다시 선명해지고 있어요· 이한 학생· 그런데···”
“?”
“···이한 학생이 계속 주기적으로 마력을 보충하려면 힘들지 않겠어요?”
가르시아 교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커다란 그림을 보관해두고 주기적으로 마력을 보충하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마법사라면 이것도 불가능했겠지만 눈앞의 제자는 원래 마력을 남한테 퍼주는 특이한 습관이 있었으니까·
지금도 몬스터부터 광석까지 줄이 제법 길지 않은가·
그러나 살아 움직이는 젊은 왕자의 그림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당장 예술가 선배부터 시작해서 해골 교장이나 제국의 마법사들까지·
이들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보관하고 있으면 온갖 귀찮은 문제에 휩쓸릴 게 예정된 물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서 ‘젊은 해골 교장을 내놔라’하고 덤빌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끔찍했다·
-제자님· 억지로 그림을 유지하지 마세요· 만남이 있으면 작별이 있기 마련입니다·
왕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력을 풀라고 종용했다·
조금 더 남겠다고 제자를 힘들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갈등하던 이한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크윽· 전 괜찮습니다· 제 배낭에 넣어놓고 다니면 됩니다!”
‘아차· 괜히 물어봤다·’
가르시아 교수는 뒤늦게 후회했다·
억지로 뺏거나 진실을 숨기고 자연스럽게 소멸을 시켰어야지 착한 제자한테 묻는 순간 절대 포기할 리 없었던 것이다·
“배낭에 넣어도 괜찮겠습니까?”
-제자님· 바닥없는 늪에 던져도 이 그림 안은 언제나 평온하답니다· 배낭이라면 분에 넘칠 뿐이죠·”
이한이 조심스럽게 배낭에 그림을 집어넣으려고 하자 왕자가 입을 열었다·
-제자님·
“예?
-여긴 배낭 안이 아니라 지하실 같습니다·
“···?!”
별장 저택 지하실이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