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화
“화 안 낸다고 하셨잖···”
“놀랍게도 제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도 화를 낼 수 있단다· 오직 제국에서 가장 사악한 마법사만이 가능케 한 일이지·”
위대한 예술가는 부서진 흑자석 꽃을 저 옆으로 몰아낸 뒤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이겠구나· 맞느냐?”
“예·”
이미 짐작할 건 다 짐작한 대마법사에게 어설픈 거짓말을 해봤자 별 소용이 없었다·
이한은 담담히 대답했다·
“워다나즈 가문의 막내이자 에인로가드 2학년·”
“예·”
-2학년?
-5학년 아니었나?
뒤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이한은 상대에게 집중하느라 듣지 못했다·
“제국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불쌍한 운명을 짊어지게 될 희생양· 번제(燔祭)용 마법사· 곧 불타버릴 가엾은 자!”
“···그 그건 아닙니다만·”
상대가 착각한 것 같았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는 마치 미래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곧 그렇게 될 것이다· 네가 당장 도망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럴 리··· 앗· 아닌가?”
부정하려던 이한은 살짝 흔들렸다·
생각해보니 다른 친구들과 달리 해골 교장한테서 마법을 따로 배우고 나서부터 유독 인생에 애로사항이 많아진 기분이었다·
해골 교장 휘하의 막내 제자가 예상보다 대화가 통하는 것 같자 위대한 예술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저 소년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미쳐버리거나 혹은 타락해서 교수가 되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끔찍한 무언가가 되기 전에 계도해서 빛이 내리쬐는 밝은 길로 데리고 와야 했다·
“내 너에게 가르칠 게 적잖이 있겠구나· 따라오거라·”
예술가의 발언에 페트로가드 학생들은 부러움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저런 행운이라니! 오자마자 위대한 예술가 님을 독대하고 그 진리를 배운다는 건···”
“감사해야 할 일이야· 워다나즈 가문에서 온 마법사· 잘 기억해라· 너의 영혼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 거다· 가문이 네게 요구하는 것에 흔들리지 마라· 제국에서의 체면 때문에 억지로 일을 시킨다 하더라도 무시하란 말이다·”
‘젠장· 에인로가드였으면 팼을 텐데·’
이한은 페트로가드 학생들을 속으로 욕하며 위대한 예술가의 뒤를 쫓았다·
* * *
위대한 예술가가 머무르는 처소는 생각보다 크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검소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이한이 놀라워하는 것 같자 예술가가 물었다·
“훨씬 더 사치스러울 줄 알았나?”
“조금은 그랬습니다·”
“나는 나 자신만의 쾌락과 행복을 쫓고 있지만 그게 꼭 사치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란다· 그건 오히려 멀어지는 길일 수도 있지·”
살풍경한 안을 둘러보던 이한은 그림 몇 점을 발견했다· 그 중에는 놀랍게도 낯익은 인물도 있었다·
치렁치렁하게 긴 머리카락에 고대 왕국의 조각상에서나 볼 법한 완벽한 이목구비·
바로 인간 형태의 해골 교장 초상화였다·
“하나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도록 하려무나· 애초에 가르치려고 데려왔는데 질문 하나 못 받아줄까·”
“역시 마법사 님께서는 교장 선생님의 제자셨습니까?”
“아니다·”
“!”
이한은 경악했다·
혹시 마법범죄자였나???
‘이런· 내가 이렇게 안일하게 행동하다니···!’
“나는 그 비열하고 사악한 자에게 속아 넘어간 가련한 에인로가드의 학생이었을 뿐이지·”
“···”
제자 맞잖아!
상대는 해골 교장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길게 돌려서 말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가이난도가 ‘나는 공부하지 않고 놀았다’를 직접 말하기 싫어서 빙 돌려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그건 왜 갑자기 물어보느냐? 알고서 온 게 아니었나?”
“아· 저 초상화를 보니 생각이 나서···”
이한은 아직 존경심이 남아서 그렸냐고 물어보려다가 멈칫했다·
괜히 상대를 자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종종 그리지·”
“그렇습니까??”
“그래· 내 쾌락을 위해서·”
마침 말이 나온 김에 위대한 예술가는 어떻게 그림으로 쾌락을 쫓는지 보여주었다·
화르륵!
초상화를 바로 불태워버린 것이다·
“불타는 그림을 보면 지독한 증오심도 조금은 희미해지지·”
“···”
이한은 방금 존경하냐고 묻지 않은 걸 진심으로 다행히 여겼다·
만약 물었다면 저 그림과 같이 불타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앉거라· 내 네게 해줄 이야기가 있으니·”
에인로가드에서 온 후배가 얌전히 앉자 위대한 예술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래 아직은 와닿지 않겠지· 네 운명이 불행하고 곧 번제용 제물로 바쳐지게 될 거란 이야기도·”
“사실 그건 조금 짐작이 갑니다만·”
“?!”
당장 해골 교장 밑에서 마법 배우다보면 제 2의 분신이 나타나거나 마법범죄자가 나타나거나 반마법주의자가 나타나서 싸움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그런 만큼 이 학파 선배가 무슨 뜻으로 저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짐작이 갔다·
물론 위대한 예술가는 이한의 반응에 살짝 놀란 것 같았다·
고작 2학년 밖에 안 된 녀석이 이런 반응을 하니 놀랄 수밖에 없긴 했다·
“짐작이 간다고? 아니야! 네가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어 마법범죄자 반마법주의자 악신숭배자 대악마 차원 괴물··· 혹은 교장 선생님 분신하고 싸워야 하는 그런 거 아닙니까?”
“···!!”
생각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예리한 대답에 위대한 예술가는 더욱 놀랐다·
아니?
“그걸 알면서도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고?”
“그게 좀 사연이···”
“틀렸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구나·”
위대한 예술가는 이한의 말도 듣지 않고 끊어버렸다·
이한은 속으로 투덜댔다·
‘선배라고 조금 너무한 거 아닌가?’
“에인로가드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
“가르시아 교수님이요?”
“하!”
예술가는 경멸 섞인 말로 평가를 대신했다· 이한은 다시 속으로 투덜대며 말했다·
“그럼 디레트 선배님?”
“···그건 누구지? 정답을 모르는 것 같으니 말해주도록 하지· 에인로가드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애초에 입학하지 않은 사람이다·”
“···”
치사한 문제에 이한은 어이없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술가는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그 다음으로 현명한 사람은 입학했지만 최대한 빠르게 졸업해 다시는 에인로가드와 엮이지 않는 사람이지·”
“그 다음으로 현명한 사람은 누굽니까?”
“그 다음부터는 솔직히 현명하다고 할 수 없지· 어리석다고 해야 옳다· 어리석은 사람은 해골 교장에게 가르침을 구하고 그 마법을 조금이라도 전수 받은 사람이다·”
‘자기도 받았으면서···’
“그러나 어리석은 와중에도 현명함의 조각을 찾을 수 있는 법· 그나마 덜 어리석은 자는 노예의 쇠사슬을 잘라내고 저 멀리 도망치는 걸 선택한다·”
“···잠깐 혹시 그러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교수입니까?”
세가면서 듣다 보니 이제 남은 건 교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끝까지 들어라· 물론 교수는 더 어리석은 사람이 맞긴 하다· 어떤 자는 도망치는 대신 에인로가드에 남아 스스로 교수의 멍에를 짊어지곤 하지· 지독히도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도 더 어리석은 자가 있으니 그 정도 되면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할 수 있겠다·”
헛소리도 계속 반복해서 듣다 보면 슬슬 궁금해지기 마련·
이한이 바로 그랬다·
‘아직 남은 사람이 있나?’
교수도 가장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대체?
“그게 대체 누구입니까?”
“바로 해골 교장의 마법을 전수 받는 걸 넘어 감히 모든 직책과 과업을 물려받으려는 자다!”
위대한 예술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대마법사가 맡고 있는 의무와 과업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이 중의 극히 일부만 물려받는다 하더라도 버티지 못하고 눌려죽거나 타죽을 정도로·
그러나 가끔 해골 교장에게 마법을 배운 제자들 중에서 이런 야심을 드러내는 제자들이 있었다·
이런 자들은 감히 가장 어리석고 안타까운 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과연! 다행입니다· 저는 거기 해당 안 되거든요·”
“····”
제정신인가?
순간 위대한 예술가는 이한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귀를 의심했다·
해골 교장 학파의 오랜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누가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앞의 소년은 가장 마지막 경우의 길을 차분히 걸어가고 있었다·
고작 2학년인데도 예술가 본인의 귀에 들려올 만큼 화려한 업적을 쌓았으니 폐쇄된 에인로가드 안에서는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이 있었겠는가·
이런 제자가 후계자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도전한단 말인가?
“물려받을 생각이 없단 말이야?”
“예? 예·”
“정말인가? 그렇다면···”
아직 정말로 믿기진 않았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조금 안심이 됐다·
만약 이 막내 제자가 진심으로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면 설득이 쉬워졌다·
졸업 이후 에인로가드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교수 될 생각 있냐는 편지를 받아도 불태워버리면 됐다·
그러나 그런 예술가의 안심은 곧바로 깨졌다· 이한이 이어서 한 말 때문이었다·
“저는 그냥 옆에서 조금 도와드리는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
와장창!
“!?”
위대한 예술가는 극도로 분노해서 또 하나의 작품을 부숴버렸다·
“그딴 안일한 소리를!”
“아 아니· 도와주는 것 정도는···”
“거리를 둬도 모자랄 판에 옆에서 도와주고 있겠다? 내가 방금 전한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단 소리다!”
가면과 마법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예술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평생 네가 원하는 쾌락과 행복 대신 이 대륙의 알지도 못하는 자들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소리다· 아무리 마법의 신비한 비의로 포장되어 있어도 가당찮은 소리지· 왜 그딴 희생을 해야 한단 말이냐?”
“그 정도까진 아닌···”
“옆에 있느냐 있지 않느냐 뿐이다· 그 외에는 없단 말이다! 이해를 못 하는군· 저 어리석은 배신자 꼬마들을 봐라·”
“누구요?”
“교수들 말이다·”
“···”
“이 교수들이 자기 마법만 연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으냐? 옆에 있는 한 휘말리게 되어 있단 말이다!”
위대한 예술가에게는 논리는 물론이고 확고한 진정성이 있었다·
이한은 그 진정성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럴듯한 부분이 있긴 하군·’
해골 교장이 하는 일의 특성상 옆에서 적당히 돕는 게 사실 힘들 가능성이 높았다·
뒷산에서 차원문 열려서 악마들 쏟아져 나오는데 적당히 여유롭게 도울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처절하게 도와야지·
“이해했느냐!”
“예···”
“그러면 이제 방금 같은 안일한 소리는 더 이상 하지 않겠군· 졸업 이후 도망칠 마음이 들었느냐?”
“아뇨?”
“···왜???”
“그 이미 받은 게 있어서··· 그냥 좀 더 힘들 거 각오하고 돕겠습니다·”
“···”
위대한 예술가는 막내에 대한 분노 섞인 걱정 와중에도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해골 교장 휘하에서 스승을 불태우려고 하거나 자신을 불태우려고 하거나 대륙을 불태우려고 한 제자들은 여럿 있었지만 이런 타입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야심 하나 없이 이렇게 원대한 야망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