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화
이한은 깊은 책임감을 느끼며 말했다·
딱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페트로가드 마법사들의 원한을 증폭시킨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페트로가드 가서 뭐라도 해야 했다·
‘가자마자 버두스 교수 욕부터 크게 하고 들어가야지·’
계획을 세우던 이한은 문득 이상함을 깨달았다·
“어? 알시클 님 어디 있어?”
웅성거리는 친구들 사이에 유독 한 명의 마법사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글쎄요?”
시아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장 건물이 워낙 넓은 탓에 마법사 한두명 정도는 보이지 않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욕탕에서 헤엄치고 계신 거 아닐까요?”
“그건 아닙니다· 아까 상수도 시설에서 오염된 슬라임들 쏟아져 나오길래 정화 작업 중이었거든요·”
지나가던 랫포드가 팔을 흔들며 말했다· 저택에 연결된 상수도 시설에도 마법사들이 버린 마법 폐기물들이 많아 청소에 시간이 걸렸다·
“그러면 서재에서 정어리 통조림을 간식 삼아 독서 중이실지도 모르겠네요·”
“왜 굳이 정어리 통조림을···? 아니· 그것도 아닐 것 같은데· 혹시 뭐 이상한 일은 없었어?”
시아나는 ‘그 편이 귀여우니까요’하고 대답한 다음 생각에 잠겼다·
“아· 별 건 아닌데 아까 배그렉 교수님이 방문하셨어요·”
“···알시클 님!! 알시클 님!!!!”
이한은 오늘 보여준 움직임 중 가장 빠른 움직임으로 저택에 뛰쳐들어갔다·
라파드엘은 그 모습에 전율했다·
‘저 자식 움직임이 한층 더 성장했어!’
원래도 마법사 가문치고는 믿기 힘들 만큼 근접전에 능한 녀석이었는데 최근 여러 일들을 겪고 나더니 이제는 기사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큰일났다!’
저택의 1층을 빠르게 확인한 뒤 계단으로 달려가면서 이한은 후회했다·
너무 방심했던 것이다·
알시클이 무섭다고 징징댔을 때 좀 더 진지하게 들어줬어야 했는데···!
“알시클 님!”
“나 여기 있다· 워다나즈!”
구석진 방에서 들려오는 알시클의 목소리에 이한은 후다닥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원래는 서재로 쓰였을 방에는 볼라디 교수와 알시클이 서있었다· 이한은 알시클의 위아래부터 훑었다·
‘상처는 없으신 것 같은데· 아니다· 배그렉 교수님은 충분히 상처 없이 팰 수 있는 분이시지·’
“왜 그렇게 급하게 불러?”
“뭘 왜입니까? 알시클 님이 교수님 만나면 자기 목숨이 그날로···”
“야 야!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난 괜찮아! 그렇지? 볼라디 배그렉?”
알시클은 날개를 퍼덕이며 황급히 이한의 말을 막으려고 했다·
지금 이 자식이 볼라디 배그렉 사정거리 안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한단 말인가·
이한은 펭귄 수인 마법사가 지금 어떤 뜻으로 날개를 퍼덕이는지 알지 못해서 멈칫했다·
‘뭐지?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하시는 건가 아니면 협박 받아서 괜찮다고 하시는 건가?’
에인로가드에서 배운 학생답게 이한은 마력을 넓고 얕게 방사한 뒤 영혼 인식 마법까지 시전했다·
혹시라도 볼라디 교수가 알시클의 등짝 위로 나있는 푹신한 펭귄 털 속에 마법적 흉기라도 겨누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뭐하는 거지?”
“야··· 워다나즈 너···”
그리고 당연히 들켰다·
둘 다 저 마법들을 모를 만큼 멍청한 마법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볼라디 교수는 의아해하고 알시클은 의도를 알아챈 탓에 기겁했다·
“진짜 괜찮아! 진짜 괜찮다고· 내가 저번에 한 말은 잊어버려!”
놀랍게도 알시클은 정말로 괜찮은 게 맞았다·
저택에 방문한 볼라디 교수는 어떤 기습이나 공격 고문도 하지 않았다·
-으아아악! 볼라디 배그렉! 미안해! 미안해! 일단 진정하라고!
-?
-···어 나 치러 온 게 아니었나?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나?
-···그러게!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하다보니 말이야· 하하하·
볼라디 교수가 방문한 목적은 이번에 차원 너머 공허에서 찾아온 괴물에 대한 정보 공유였다·
제자는 한사코 참가하지 않았다고 부정했지만 볼라디 교수는 바보가 아닌 만큼 당연히 속지 않았다·
-안 안 속았나?
-속아야 하나?
-아··· 아니지· 아이 참· 볼라디 배그렉 자네는 참 예전부터 똑똑했던 것 같아· 그러니까 에인로가드 교수도 하고·
-공허 거미 이야기로 돌아오지·
-그럴까?
알시클은 잘 맞지도 않는 아첨을 포기하고 바로 정보 공유로 돌아왔다·
-괴물의 특성을 봤을 때 다시 차원 밖으로 도망쳤을 가능성이 의심되는군·
-그럴 수 있지· 재생력이나 번식력이 보통이 아닐 테니 침식된 차원이 불타버리기 전에 도망갔을지도·
-다시 워다나즈를 노릴 가능성도 있겠군·
-어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확실히 놈이 마력 때문인지 집착했던 것 같기도·
-그런데 경각심이 안 드나?
볼라디 교수의 질문에 알시클은 기겁했다·
순간 ‘니가 그러고도 선배 마법사냐? 죽어라!’하는 뒷말이 예상된 것이다·
-살려줘!!!
-?
-아 아니· 그게··· 그러게 말야· 경각심이 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요즘 머리가 나빠졌나봐·
-그런 것 같군·
-···
···하여간 기습이나 공격 고문은 없었다·
정신적으로는 좀 괴로웠지만···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참· 안 들키셨죠?”
“···”
순진무구하게 차원 침식 토벌 참가가 안 들켰는지 묻는 워다나즈의 모습에 알시클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아마···?”
“후후· 감사합니다·”
“그보다 지하실 문제는 해결했냐?”
“아· 그건 일단 한동안 내버려두려고 합니다·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요·”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지금 페트로가드 마법사 분들이 시도하고 계시긴 한데 아마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페트로가드? 거기 괴짜들은 왜?”
“이것도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그럼 간단하게 요약해줘·”
“네· 페트로가드 마법학교에 교장 선생님의 옛 제자 분이 나타나서 난리치고 있답니다· 가르시아 교수님하고 같이 가서 설득해보려고요·”
“···”
“···”
두 마법사는 침묵했다·
간신히 충격에서 벗어난 알시클은 입을 열었다·
“조 조금만 더 길게···”
“예? 대충 다 설명 된 거 아닙니까?”
‘그게 어디가 설명이냐?’
알시클은 속으로 투덜댔지만 참았다·
마법사의 무서운 스승이 옆에 있을 때는(특히 사정거리 안에 있을 때는) 섣불리 괴롭혀서는 안 됐다·
“그래· 잘 다녀와라·”
“동행하지·”
“!”
볼라디 교수의 말에 알시클은 깜짝 놀랐다·
페트로가드와 가장 인연 없을 것 같은 마법사가 왜 갑자기?
‘아· 그렇군·’
생각해보니 볼라디 배그렉은 해골 교장 밑에서 배운 적도 있고 무엇보다 워다나즈의 현재 스승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워다나즈가 해골 교장의 옛 제자를 설득하러 가는 길에 동행하려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안타깝다· 스승들 때문에 저런 고생을 해야 한다니·’
알시클은 워다나즈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스승을 잘못 둔 탓에 저런 고생을 추가로 해야 하다니·
만약 알시클이 해골 교장의 옛 제자를 만나야 한다면 진지하게 탈주를 고민했을 것 같았다·
이한이 방 밖으로 먼저 걸어 나가자 볼라디 교수가 말했다·
“가지·”
“?”
알시클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나 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
나인가!?
* * *
지하실 해결에 실패하고 유령에게 쫓겨난 페트로가드 마법사들은 매우 침울해진 상태였다·
가르시아 교수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애썼다·
“그 노엔첸프 문제는 이제까지 다들 해결 못했잖아요!”
“그렇긴 한데··· 굴욕적이지 않은 건 아니네요·”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에인로가드 학생들한테 당한 굴욕감이 사라지질 않았다·
“참· 혹시 다른 학생들도 같이 가도 될까요?”
“예? 음··· 네· 그러시죠·”
달세르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수락했다·
에인로가드 학생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고 해서 방문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건 오히려 더 수치스러운 짓이었다·
“교수님이나 다른 마법사도 같이 가도 될까요?”
“예· 그러세요·”
대답하고 난 뒤 달세르는 의아해했다·
‘그런데 킴 교수님 말고 페트로가드에 방문하려는 교수가 있나?’
5분 후·
볼라디 교수를 발견한 달세르와 벤저민은 표정이 심각해져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학생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교수님· 혹시 저희가 따라가는 것 때문에 저러시는 건가요?”
페트로가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별장에 있던 학생들은 생각보다 많이 흥미를 보였다·
물론 ‘방문하고 나면 에인로가드에 들어간 게 너무 화날 것 같으니까 난 안 갈 거야’라는 소수 의견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방문해서 직접 확인하고 싶어했다·
가르시아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킴 교수님·”
동료 마법사와 대화를 마친 달세르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배그렉 교수님이 동행하시는 건 혹시 전투 목적으로···”
“아니에요! 설득! 설득하려고 같이 가시는 거예요!”
가르시아 교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 토벌하려고 꾸린 구성이 아니란 말인가?
이한도 가르시아 교수를 돕기 위해 거들었다·
“믿어주십시오· 배그렉 교수님은 설득하려고 같이 가시는 겁니다·”
“무력으로 설득하는 게 아니라요?”
“교수님이 그래도 그렇게 멋대로 구실 분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렇죠?”
이한의 질문에 볼라디 교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페트로가드 마법사들은 걱정 불신 염려 체념이 섞인 얼굴로 결국 납득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출발하시죠·”
“페트로가드는 얼마나 걸립니까?”
“지금은 수도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천천히 가도 한 시간 안에 도착할 테죠·”
달세르는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을 잊고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에게 페트로가드를 소개해주려고 노력했다·
상처 난 자존심이 아프고 볼라디 교수가 걱정되긴 했지만 외부에서 온 손님을 소홀히 대하는 건 그것대로 불명예였던 것이다·
살코가 손을 들고 물었다·
“페트로가드는 에인로가드와 다른 방식으로 가르친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페트로가드는 아주 자유롭지요· 저희 마법사들은 원할 때 들어와서 서로에게 배우고 원할 때 떠납니다· 교수 직위도 없지요·”
“예!?”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가르시아 교수는 옆에서 부연설명을 했다·
“교수 역할을 하는 마법사는 있지만 교수라고 불리지 않을 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부릅니까?”
“편하게 달세르라고 부르죠· 여러분들도 그렇게 부르세요·”
“···”
충격적인 문화 차이에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누군가 상상하듯 중얼거렸다·
“페트로가드에서는 ‘어이 고나달테스!’ 해도 되나?”
“쉿· 조용히 해·”
옆에서 듣던 이한은 문득 의아해져서 물었다·
“그럼 학생들 평가도 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니죠· 아무래도 기준과 평가는 필요하니까·”
‘다행이군·’
이한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발드로가드처럼 시험을 널널하게 보는 마법학교가 또 있었다면 도저히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으리라·
“그래서 저희는 학생들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게 합니다· 다들 만점을 받죠·”
“···”
“···혹시 나 별장으로 돌아가면 안 되냐?”
“참아· 너무 멀리 왔어·”
이한은 격렬한 친구들의 반응에 살짝 걱정이 됐다·
교장 선생님의 옛 제자도 아직 만나지 않았는데 벌써 이러면···
‘가서 사고치진 않겠지? 에이· 친구들이 무슨 신입생도 아니고 저런 것 때문에 화를 내겠어·’
“궁금한 게 있는데요· 페트로가드 학생들은 휴일에 외출 자유인가요?”
“애초에 자유로움이 우리의 강령인데 당연히 휴일뿐만 아니라 평일도···”
“와! 저기 와이번 모양 구름이군!”
이한은 생각을 바꾸고 대화를 빠르게 잘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