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화
‘혹시 대단한 마법사였나?’
사실 알시클에게 설명을 들었을 때만 해도 이한은 이 마법사에 대해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었다·
수옥탄에 맞아서 즉시 날아간 것도 그렇고 이한의 기준에서 진짜 뛰어난 마법사들은 리치가 되거나 차원 여행의 비전으로 죽음 정도는 가뿐히 미뤘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뛰어난 마법사라고 꼭 리치가 되리란 법은 없었다·
특히 지금 이 마법사 유령이 말해준 마법 내용은···
‘절대 내 수준이 아니다·’
시공간 계열의 마법인 건 알았지만 그 이상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마법사의 뜻에 따라 정해진 공간이 나오게 하는 문이라니· 소세계로도 가능할지 엄두가···
“어? 워다나즈?”
물약 조제실을 치우고 남은 시약을 관리하던 닐리아와 요네르가 올라온 이한을 보고 놀라워했다·
지금쯤 마법사 유령이 남긴 문제를 해결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왜 그래? 벌써 풀었어?”
“아니· 너무 어렵더라·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아·”
“뭐?!?!”
둘은 빈 유리병을 떨어뜨릴 만큼 놀랐다· 닐리아는 그림자 순찰대 출신다운 재빠른 동작으로 유리병을 붙잡았다·
“깜 깜짝이야··· 그보다 워다나즈· 뭔가 착각한 거 아냐? 네가 해결할 수준이 아니라니·”
“···”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닐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요네르도 닐리아의 편을 들었다·
“맞아· 이한· 괜히 못하겠다고 하지 말고 한 번 해봐· 그러면 의외로 될 수도 있어·”
언제 한 번 친구들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이한은 마법사 유령이 풀어달라고 하는 난제를 설명했다·
“저 유령은 의지에 따라 확정되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게 꼬여서 무한 공간의 미궁이 되어버렸어· 이 정도쯤 되면 내 수준으로 해결할 수 없지·”
“···”
“···잠깐· 그래도 워다나즈면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닐리아는 순간 설득되려는 자신을 붙잡고 요네르에게 속삭였다·
이제까지 언제나 ‘앗 이건 정말 워다나즈도 해결 못하겠구나’싶었던 생각이 얼마나 많이 틀려왔던가·
요네르도 그 말에 솔깃했는지 살짝 흔들리는 표정을 지었다·
“야· 다 들린다·”
이한은 친구들을 노려보았다·
* * *
‘우정이 이거밖에 안 된다니·’
고작 못하겠다는 말도 믿어주지 않고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 두 친구의 모습에 이한은 툴툴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옆의 1층 창문을 보니 지젤과 더르규 라파드엘이 열심히 덩굴을 자르고 불태우는 게 보였다·
“이 정도면 될 것 같나?”
“아니· 연무장으로 쓰려면 좀 더 넓어야지· 저기까지는 싹 정리해야 해·”
“그런데 모라디··· 여긴 워다나즈 별장 아니냐? 연무장이 필요해?”
마법사 가문의 저택 정원에 왜 연무장이 있어야 하나 싶어 라파드엘이 물었다·
그러자 지젤의 얼굴이 굳어졌다· 별 생각 없이 습관대로 연무장부터 만들다가 아픈 곳을 찔린 것이다·
“···워다나즈도 검술 하잖아·”
“연무장 필요할 정도로 했나?”
“···하겠지· 그리고 저택에 연무장 있으면 멋있어·”
지젤은 더르규를 보며 눈짓했다· 도우라는 뜻이었다·
“이 이한도 연무장을 보면 좋아할 거다· 연무장은 멋있잖나·”
“그런가? 저번에 다른 푸른 용의 탑 놈하고 이야기했었는데 뭔 저택에 무식하고 촌스럽게 연무장을 놓냐고 싫어하더라고·”
“···”
“···”
라파드엘은 그냥 자신이 겪은 일을 말했을 뿐이었지만 지젤과 더르규의 안색은 급변했다·
그···
그런가?
친구만 믿고 있다가 봉변을 당한 더르규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모라디! 이한도 좋아할 거라면서!”
“조 조용히 해· 아직 확정은 아니니까·”
“생각해보니까 이상했다! 이한도 대귀족 가문 출신인데 무슨 저택 앞에 무식하게 연무장을···”
더르규가 친구 저택을 망친 건가 싶어 초조하게 발을 구르는 사이 걸어온 이한이 셋을 불렀다·
“도와줄까?”
“?!”
셋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지젤은 손짓으로 더르규와 라파드엘을 이동시켰다· 임시 연무장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뭐··· 뭐야· 워다나즈· 벌써 끝났어?”
“아니· 너무 어려워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더라고·”
그 말에 셋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이한· 그렇게 말하지 말고 가서 다시 해봐라· 너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다·”
“그래· 워다나즈· 자꾸 엄살떨지 말란 말이다·”
더르규와 라파드엘의 응원에 이한도 같이 웃으며 대답했다·
“라파드엘· 연무장에서 연습이나 한 판 하자· 흑마법도 허용하고· 올라와· 이 자식아·”
“아 아니···! 왜!? 왜 나만?!”
“뭐가? 연습하자는 게 왜?”
이한은 웃고 있었지만 라파드엘은 분명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지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한 마디 하려다가 라파드엘한테 선수를 뺏겨서 못했던 것이다·
“지금 원하는 공간 만드는 마법을 만들다가 꼬여서 무한 미궁이 생겼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해결하란 말이냐? 응?”
“···어 못하냐?”
라파드엘의 순진무구한 질문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올라와라· 서로 골렘 하나씩 꺼낼까?”
친구가 에인로가드에서 보기 드문 용아병 골렘을 갖고 있다는 걸 아는 라파드엘은 기겁했다·
더르규는 안절부절못하며 말리려고 들었다·
“이한· 진정해라· 아직 연무장이 완성이 안 됐다·”
“하긴· 아직 더 다듬긴 해야겠군· 도와줄까?”
이한은 지팡이를 흔들었다·
마법 실력에 비해 자신감이 그리 높지 않은 이한이었지만 그래도 몇몇 부분에는 확고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잡일이었다·
어떤 마법사와 승부하더라도 쉽게 지지는 않으리라!
“···어 그런데 연무장은 괜찮냐?”
라파드엘의 질문에 이한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대답했다·
“괜찮지? 왜?”
“대귀족 가문 저택인데?”
“더르규 너 우리 가문 영지 와봤잖아?”
“그랬···”
더르규는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영지에 악마와 골렘과 온갖···
···어라?
‘내가 왜 연무장을 걱정했지?’
생각해보니 워다나즈 가문의 영지에는 연무장보다 훨씬 더 기괴하고 흉측한 것도 많았다·
그걸 떠올리니 별장 저택에 연무장 하나 놓는 것 정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연무장 있으면 좋지· 검술 연습하기도 좋고 있으면 멋있잖아·”
“그 그러냐? 저번에 다른 놈이 연무장 싫다고 해서···”
“누가?”
“황자가···”
“···”
“···”
“···가이난도는 마법사 카드 보관실 제외한 모든 시설을 다 싫어하잖아· 넌 그걸 그대로 들으면 어떡하냐?”
이한의 타박에 라파드엘은 솔직히 억울함을 느꼈다·
그걸 어떻게 구분한단 말인가!
“남은 건 우리가 끝낼 테니 이한 너는 저 마법사 유령부터 해결해라·”
“고맙다· 더르규·”
친구의 호의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해했다·
그걸 보며 라파드엘은 작게 속삭였다·
“워다나즈 녀석이 저렇게 말하고 나서 혼자 해결할 수 있을지 없을지 내기할 사람 있나? 나는 ‘있다’에 건다·”
“나도 ‘있다’에 걸 건데·”
“야· 다 들린다고·”
* * *
이한은 아까보다 한층 더 툴툴대며 움직였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내밀어보니 아까 치운 주방에서 가이난도와 아덴아르트 아산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알겠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다는 표정으로 이한은 친구들을 불렀다· 친구들은 깜짝 놀라서 이한을 쳐다보았다·
“배고파서 간식을 찾고 있었지?”
“···아 아닌데?”
아산은 황당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대체 어떤 근거로 저런 말을 한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덴아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 가이난도 때문에 저런 말을 한 것이라고!
“뭐? 간식 찾는 게 아니었어?”
“위층에 아티팩트 보관실이 있는데 연결된 마력이 좀 부족하더라고· 주방에 남는 마력을 돌릴 수 없나 이야기하고 있었지·”
일정 규모 이상 되는 귀족의 저택은 보통 그 유지나 운영에 마법이 필수적으로 들어갔다·
보관실 같은 경우에는 여러 격리 마법이나 증폭 마법이 필요한 만큼 들어가는 마력량이 상당했다·
“아· 그런 거였군·”
“그런데 워다나즈· 지금 유령의 문제를 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려워서 도움 받으려고 나왔습니다·”
“그렇군·”
“알겠어·”
“···????”
아산과 가이난도의 시큰둥한 반응에 아덴아르트는 당황했다·
“아 아니· 워다나즈가 해결 못 했다는데 다들 이래도 되는 겁니까!”
“아뇨··· 그··· 워다나즈 저러고서 곧 해결할 걸요?”
“맞아· 이한은 말만 저러고 바로 해결한다니까·”
이한은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아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가이난도는 아까 먹은 샌드위치가 소화도 안 됐을 텐데!
분노를 억누르며 이한은 마법사 유령이 남긴 문제를 설명했다· 그러자 아산과 아덴아르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니· 워다나즈가 해결 못한다는 게 농담이 아니었군·”
“···”
“확실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걸 노리고 어머니께서 주셨다고요?”
아덴아르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수수께끼 때문에 저택을 선물한 거라면 결국 실수 아닌가?
“그럼 잘못 고르신 것 같···”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는 과정에도 다 의미가 있는 거죠· 하하· 섣불리 판단하지 마십시오·”
이한은 재빨리 황녀를 현혹시킨 뒤 화제를 넘겼다·
“어쨌든 도움 받으러 갈 건데 너희끼리 알아서 잘 할 수 있지? 참· 일 끝내놓고 저녁도 좀 해놔· 가이난도·”
“···내 내가 뭐 잘못했어?!”
* * *
“여기까지 와서 신전의 일을 도울 필요는 없지 않나? 나 원 참· 좀 놀아도 좋을 텐데·”
알시클은 불사조 탑 학생들의 부탁에 곤란해했다·
제국은 그 넓이만큼이나 다양한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곳이었고 그럴 때마다 여러 신전의 사제들은 솔선수범해서 자선을 베풀었다·
학생들이 수도에 와서 남는 시간에 신전의 일을 돕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신전이 하루 이틀 한 일도 아닐 터·
도움이 없어도 괜찮을 테니 학생들 자신을 위해 무언가 해도 괜찮지 않겠는가·
“맞는 말씀이십니다· 사제들 다른 건 하고 싶은 거 없습니까?”
살코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알시클의 말을 거들었다· 시아나는 빤히 살코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번에 꿀 반 컵만 달라고 했을 때는 엄청 매몰차게 거절하셨···”
“그 그건 우리도 써야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미안합니다·”
검은 거북이 탑이 불사조 탑과 사이가 좋긴 했지만 워다나즈처럼 끝없이 물자가 샘솟는 창고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달라는 걸 그렇게 쉽게 내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살코 랫포드 너희 둘이 사제님들과 같이 수도 시장이라도 돌고 오는 건 어떻지?”
“그거 좋은 생각··· 어 워다나즈· 벌써 다 풀었냐?”
살코의 질문에 이한은 벌컥 화를 냈다·
“못 풀었을 수도 있지! 왜 풀었다고 무조건 단정하는 거냐!”
“아 아니··· 그래도 풀었을 거잖아· 안 그래?”
“못 풀었다· 도움 받아야 해· 알시클 님·”
이한이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받으려고 하자 알시클이 씩 미소지었다·
“워다나즈·”
“그냥 다시 가서 해보면 될 거라고 하면 아무리 알시클 님이어도 저택에서 쫓아낼 겁니다·”
이한이 노려보며 말하자 알시클은 경악했다·
“어··· 어떻게 내 속마음을!?”
상대방 그것도 마법사의 속마음을 구체적으로 읽을 정도라면 환상 마법을 쓰더라도 아주 깊고 정확하게 영혼을 관찰해야 했다·
아무리 워다나즈가 알시클 본인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갖고 있다지만 어떻게 벌써!?
“영혼 마법인가!?”
“그냥 예측이죠·”
“뭐? 예지 마법?!”
“···알시클 님· 그냥 좀 들어주시죠·”
“으응·”
이한이 정색하자 알시클은 살짝 시무룩해졌다·
‘그렇게 화낼 것까지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