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3화
문제가 생기면 선배 마법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습관은 생각보다 중요했다·
당장 이한만 해도 그 습관을 들이지 못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어야 했는가·
이번 차원 침식 탐사도 이한이 선배 마법사에게 도움을 청했다면···
‘그건 아니군·’
생각해보니 선배 마법사 알시클이 끌고 간 셈이었으니 이건 예외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한은 알시클을 불렀다·
설마 도움 안 되는 예외가 두 번 일어나겠는가·
“알시클 님!”
-어? 왜?!
시약 보관실의 독을 사제들과 함께 정화하던 알시클은 이한이 급한 목소리로 부르자 깜짝 놀랐다·
“여기 유령이 나타났습니다!”
“뭐!?”
우당탕!
알시클은 물론이고 다른 친구들까지 바로 지팡이나 검을 뽑아들고 달려왔다·
“어디!?”
“여기요·”
“···아무것도 없는데?”
“제가 마법을 날렸거든요·”
“···”
친구들은 매우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지젤은 속으로 생각했다·
‘반응이 너무 빠른 것도 문제군·’
혼자서 너무 빨리 쓰러뜨린 탓에 다른 사람들이 확인하려고 해도 할 게 없었다·
“그 그렇군· 잘··· 잘 했다· 반격은 중요하지···”
“어떤 유령일까요?”
“나야 모르지· 네가 방금 박살냈는데·”
알시클은 툴툴대며 벽난로 근처를 확인했다·
영체의 희미한 기운은 느껴졌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워다나즈가 제대로 치명타를 먹인 모양이었다·
“진짜 유령인 모양인데· 그것도 마법사 유령인 모양이다·”
통계적으로 마법사들은 죽어서도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았다·
공방에 깔아놓은 마법이 주인 사후에 새어나와 주변을 뒤집어놓는 일은 흔해서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고 소환수나 차원 통로의 족쇄가 풀려 타 차원의 괴물들이 몰려드는 일도 제법 많았다·
마법사 본인이 공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하더라도 위험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수많은 마력과 신비를 겪은 마법사 본인의 영혼과 육신 자체가 위험요소였던 것이다·
비의를 갈망하는 마법사의 강력한 의지는 육신의 쇠락에 맞서 기묘한 저항현상을 일으키곤 했다·
“아하· 교장 선생님처럼요?”
“···아 아니· 그것도··· 리치도 맞긴 한데 그건 좀 같은 범주에 놓기에는 너무···”
가이난도의 순진무구한 질문에 알시클은 당황했다·
리치화가 이제 죽음에 저항하는 마법사의 수단 중 하나긴 했지만 이런 유령과 같은 범주에 놓기에는 너무 수준 차이가 심했다·
리치화는 흑마법 학파에서도 지고한 경지에 오른 마법사만이 펼칠 수 있는 고도의 대마법이었고 유령화는 그냥···
“미련 많고 원한 많으면 되는 거지·”
“에인로가드에 많을 거 같은데 왜 본 적이 없지?”
누군가 의문을 품자 알시클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대답했다·
“어중간한 유령은 바로 퇴치됐겠지· 에인로가드가 무슨 발드로가드냐?”
“아·”
다른 사람들이 대화하는 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이한은 뒤늦게 기억을 떠올렸다·
“잠깐 유령이 자기가 남긴 마법을 풀어달라고 했던 거 같습니다!”
“과연· 마법사 유령의 목적 중에는 꽤 흔한 목적이지· 황자 너는 저런 말 못 들었나?”
“저는 그냥 꺼지라고 쫓아냈는데요·”
“흠·”
알시클은 유령의 반응 차이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런 식의 악령이 아닌 유령은 대부분 그렇게까지 위험하지 않았지만 마법에 있어서 절대는 없었다·
당장 차원 괴물 추적할 때도 안일한 마음으로 행동했다가 제국 감옥으로 직행할 뻔하지 않았던가·
“가이난도는 못 미더워서 안 물어본 거 아냐?”
“그럴지도···”
“설마 그런 이유겠냐· 다들 진지하게 고민해봐라·”
알시클은 에인로가드 학생들에게 훈계했다· 이한은 주방을 마저 점검하며 물었다·
“전투로 유령을 완전히 퇴치하는 건 어려울까요?”
“아냐· 아까 네가 바로 날려버릴 정도면 별로 전투력이 강한 유령 같지는 않다· 생전에도 비전투 마법사였겠지· 다만 이런 건 평화롭게 해결하는 게 좋아서···”
“아하· 하긴 굳이 싸워서 시설을 부수고 저택의 값어치를 깎을 필요가 없죠·”
“···그 그것도 그렇고 원래 마법사의 저택은 비밀이 많거든· 주인에게 온전히 물려받아서 나쁠 거 없어·”
“그럼 계획을 바꿔서 지하실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가이난도는 정돈 안 된 주방을 보며 울상을 지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대찬성했다·
“잘 생각했어· 워다나즈· 한 끼 굶는다고 안 죽지·”
“수상한 곳부터 먼저 확인하자고·”
“아오· 이래서 다른 탑 놈들은·”
살코와 지젤의 반응에 가이난도는 툴툴댔지만 푸른 용의 탑 학생들도 지하실을 먼저 확인하고 싶어했다·
“연금술 학파였으면 좋겠는데·”
“소환 쪽이었으면 좋겠군· 쓸만한 연구라도 있으면 도움 될 것 같아·”
“···”
가이난도는 시무룩해져서 이한 뒤로 움직였다· 사람은 많은데 의지할 친구는 별로 없었다·
“저런· 너 배고프겠다· 가이난도· 이거라도 먹을래?”
“···!”
이한이 바구니에서 주섬주섬 샌드위치를 꺼내자 가이난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 만들었어?!”
“아까 차원 침식 뒷정리하면서 만들었지·”
“이한···!”
-내가 남긴 마법을 풀어다오···
“···으아악!”
가이난도는 닭고기 샌드위치를 던지며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 쪽에서 마법사 유령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한은 솜씨 좋게 샌드위치를 염력으로 받아낸 다음 가이난도의 입에 물리고 뒤로 밀어냈다· 거의 예술에 가까운 솜씨였다·
알시클은 보면서 감탄했다·
‘녹휘석 마탑 마법사들이 보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겠구나!’
염동력 마법의 세세한 통제를 저 정도로 갈고 닦는 마법사는 정말 드물었다·
“무슨 마법을 풀어달란 겁니까?”
이한은 상대가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하면 바로 반격할 준비를 마친 뒤 질문을 던졌다·
무해해 보이는 유령이라 하더라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아래에··· 내 연구가 있다··· 따라와라···
“잠깐! 아까 여기 황자한테는 왜 안 물어보고 그냥 쫓아내신 겁니까?”
아산이 궁금했는지 가이난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마법사 유령이 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격 없는 자에게는··· 묻지 않는다···
“···”
“···역시!”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닌 거 같은데?”
알시클이 당황해서 납득하는 학생들을 말렸다·
저기서 말하는 자격이 마법 실력일 리가 없었다·
마법사 유령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가이난도를 보자마자 에인로가드 성적을 짐작하겠는가?
“유령이여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대답해주십시오· 자격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익힌 마법··· 저 마법사는··· 자격이 있다···
“워다나즈가 익힌 마법?”
학생들은 그제야 자격이 에인로가드 성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소환 마법사인가?”
“아니· 부여 마법사일지도·”
“일단 황자가 탈락했으니까 흑마법사는 아닌 모양인데·”
“···그냥 내가 직접 물어볼게·”
이한은 친구들의 대화를 끊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택지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무슨 마법을 말하시는 겁니까?”
유령은 이한의 지팡이를 가리켰다·
서리거인 왕의 푸른 원석을 가리키는 그 모습에 이한은 깜짝 놀랐다·
‘서리거인 종족의 관련자였나!?’
“이한· 그 돌 말고 옆의 공간이동의 광석 말하는 것 같은데·”
“아·”
이한은 머쓱해졌다·
공간 마법 관련자였구나!
* * *
“그런데 용케 이 돌만으로 제가 공간 마법을 익힌 걸 짐작하셨습니다·”
공간이동의 광석 같은 건 공간 마법을 익히지 않은 마법사도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한 아이템이었다·
그러자 마법사 유령은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계···
“?”
-그런··· 요란하게 마법을 장식한 물건은··· 시공간 마법을 전문으로 익힌 마법사가 아니라면 갖고 다니지 않는다···
“!”
이한은 그제야 유령이 뭘 말하는지 깨달았다·
유리에 금이 간 <제한된 시간 가속> 마법이 걸린 회중시계!
에인로가드의 가 모 교수가 학창시절에 만든 아티팩트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이게 그렇게 요란하게 마법을 장식했습니까? 평범해 보입니다만·”
-공간을··· 읽어봐라···
유령의 말에 이한은 의아해하며 <공간 인지> 마법을 시전했다·
혹시라도 주변의 왜곡된 공간이 있더라도 이 마법은 절대적인 감각으로 마법사에게 올바른 측정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잡히는 게 없었다·
-더 깊게··· 더 집중해서···
“???”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한은 감각을 더 집중했다·
상대가 뭔가 착각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시전한 이상···
“···!”
놀랍게도 이한의 감각에 희미한 왜곡이 잡혔다· 회중시계의 겉표면을 따라 마치 장식처럼 뒤틀린 공간이 새겨져있었다·
이 섬세한 마법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정말 아무 쓸모도 없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뒤틀린 국소 공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공간을 인식할 줄 아는 마법사만 보고서 ‘대단하군! 저렇게 세심한 장식이라니!’같은 반응을 보일···
‘과연 보일까? 헛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마법을 그런 곳에 낭비하지 마라···
“···”
유령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훈수를 뒀다·
백 명 중 한 명만이 볼 수 있을 법한 수단으로 자기과시를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멍청한 짓이었다·
“···제가 시전한 마법 아닙니다· 그리고 이 마법을 시전하신 분은 그쪽보다 몇십 배는 지혜로운 분이고요·”
-모르겠군···
마법사 유령은 이한의 말을 별로 귀담아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애초에 유령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는 건지도 의심스러웠다· 알시클의 말에 따르면 이런 유령은 불완전한 존재지 않던가·
생전 지식과 능력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는 리치와 달리 유령은 어떤 부분이 손실되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위층의 시설들은 딱히 시공간 마법과 상관이 없어 보이던데 다른 학파 마법도 연구하셨던 겁니까?”
-나는 다른 학파 마법은 모른다···
“분명 다른··· 아·”
이한은 멈칫했다·
“혹시 에린다르벨 님이라고 아십니까? 대마법사시고 선량한 성격에 실수가 은근 잦으신···”
-모른다···
‘주인이 여러 번 바뀐 거군·’
생각해보니 이 마법사 유령이 바로 전 주인이란 법은 없었다·
그 사이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다양하고 복잡한 난장판을 보면 여러 마법사들이 썼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전에 있던 마법사들은 마법을 안 풀었습니까?”
-풀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
이한은 살짝 걱정이 됐다·
갑자기 다른 마법사들이 실패했다니 자신감이 사라진 것이다·
‘이거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거 맞나?’
“잠깐· 자기가 실패했어도 다른 마법사의 도움을 받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혹시 그러면 반칙입니까?”
-아니··· 상관없다···
유령은 도움을 받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이 남긴 마법만 완성해주면 아무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마법사들은··· 모두 자신이 실패했단 걸 비밀로 지켜달라고 부탁하더군···
“···”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뭐 이런?
‘지금 뭐하자는 거야?’
자기가 실패했으면 다른 마법사한테 이야기해서 해결을 해야지 자존심 때문에 저택을 팔 때까지 숨기다니·
심지어 그 짓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똑같이 한 것이다·
마법사들이란 정말···!
‘음· 하지만 나도 못 풀면 팔 때까지 비밀로 숨겨야겠군·’
어이없는 것과 별개로 이한은 또 하나를 배웠다·
마법사의 공방을 팔 때에는 최대한 하자를 숨겨야 하는 것이다·
-여기다···
기나긴 지하 원형 계단의 끝에 도착하자 유령이 문을 통과했다·
이한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문 너머의 공간이 무수히 많은 공간으로 분열되었다·
“???!?!”
-마법사의 의지에 따라 확정되는 무한히 변화하는 가능성의 공간을 만들려고 했는데··· 통제불가능으로 변해버렸다··· 이 마법을 풀어다오···
“···잠깐 사람 좀 불러오겠습니다·”
이한은 즉시 포기하고 가르시아 교수를 부를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