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2화
30분 후·
알시클은 간신히 에린다르벨을 설득해서 수도에 위치한 3층짜리 마법사 별장을 선물로 받아냈다·
에린다르벨은 여전히 꺼림칙하다는 듯이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펭에린 님·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후학에게 이런 속물적이고 성의 없는 선물을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워다나즈! 가자!”
후배 마법사의 등을 떠밀며 알시클은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났다·
여기 더 남아있다가는 내일까지 저 대마법사의 반성을 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알시클 님· 존경스럽습니다·”
“갑자기 왜?”
이한이 존경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말하자 알시클은 의아해했다·
“수도 저택을 받아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존경해주는 건 고마운데 다른 걸로 존경해주면 안 되냐?”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걸어가던 둘은 저 멀리서 낯익은 복장을 한 학생들을 발견했다·
처음 보면 누더기를 걸친 거지 떼들인가 싶다가 지팡이와 문양을 보고 뒤늦게 ‘아!’하게 되는 복장·
바로 에인로가드 학생들이었다·
“너희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이한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날짜를 따져보면 에인로가드도 학기가 끝났을 때긴 했지만 친구들이 다 수도에 와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혹시 이한이 모르는 커다란 행사가 수도에서 진행되고 있었나?
‘익명의 후원자가 지원한 막대한 상금이 걸린 마법 대회 같은 게 있을지도···’
“너 구하러 왔는데·”
“교장 선생님이 너 잡아갔대서 왔지·”
“···아·”
친구들의 대답에 이한은 바로 환상에서 깨어났다·
“다들 고맙다· 그런데 일은 다 끝났어· 별로 오래 안 걸렸거든·”
“대체 무슨 수단을 썼길래 그렇게 일찍 끝난 거지?”
지젤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가이난도의 어머니 같은 예외는 별개로 치고 제국의 성난 후원자들을 설득하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특히 에인로가드 관련해서는 학을 뗀 이들이 많은 것이다·
“혹시···”
“!”
지젤이 말끝을 흐리자 이한은 놀라워했다·
‘설마 눈치챘나?’
교장 선생님의 그 비열한 수작을?
“버두스 교수님을 놓고 거래한 건가?”
“헉· 머리 좋은데? 그런 방법이 있었을 줄이야·”
“역시 워다나즈군!”
“···아니다·”
이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솔직히 좋은 방법이긴 했지만 저런 방법을 쓰진 않았다·
저건 나중에 정말로 궁할 때나 쓸 방법이었다·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중에 듣고 여기까지 온 김에 다들 별장 저택에 방문하지 않겠어?”
친구의 제안에 학생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나눠져서 숙소를 찾는 것보다는 워다나즈 가문의 저택에서 묵는 게 더 편할 터였다·
‘어라? 그런데 수도에 워다나즈 가문 별장이 있었나?’
요네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문할 때마다 머무를 수 있게 각 지역마다 저택을 마련해놓는 제국의 다른 대귀족 가문들과 달리 외부 활동이 거의 없는 워다나즈 가문은 고정으로 구비해놓은 저택이 거의 없다고 들었었다·
그런데 별장 저택이라니·
수도라서 예외적으로 있는 것일까?
“이한· 원래 수도에 워다나즈 가문의 저택이 있었어?”
“후후· 잘 물어봤어·”
요네르의 질문에 이한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누가 물어봐주지 않았다면 자신이 직접 말했을 것 같은 기쁨의 미소였다·
“사실 이번 의뢰의 보수로 받았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줄래???”
* * *
알시클은 저택의 겉모습을 둘러보더니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오· 썩 괜찮은데·”
“···”
“···”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별로 동의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먼저 정문과 본관 사이를 연결하는 길목에는 밀림처럼 뻑뻑하게 자라난 식물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일반적인 저택이라면 앞뜰이나 뒤뜰에 화원이나 정원 온실을 두고 구경과 산책을 즐겼지만 여기 저택은 조금 더 적극적인 모양이었다·
길과 온실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그 뒤에 자리 잡은 본관도 딱히 멀쩡하지는 않았다·
3층 위로 우뚝 솟은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와 함께 희끄무레한 악령들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오고 있었으며 발코니로 둘러싸인 2층 창문은 산산조각 나서 그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귀를 기울여보면 저택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별장 저택 맞아?”
“워 워다나즈 가문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군·”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물론이고 비교적 비위가 강한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도 질린 표정이었다·
이쯤이면 별장이 아니라 폐저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들 왜 그러냐? 이 정도면 되게 괜찮은 건데·”
알시클만 이해 안 간다는 듯이 에인로가드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제가 제국 전역을 돌아다닌 건 아니지만 어느 곳에도 이런 별장이 유행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어? 일반적인 별장이야 그렇지· 근데 이건 마법사가 쓰던 별장이잖아·”
일반적인 귀족이나 부호가 사용하는 별장 저택이라면 당연히 미의식과 편의성이 중요했다·
하지만 마법사가 사용하는 별장 저택은 그냥 공방을 대신하는 용도였다·
이 정도면 마법사의 공방으로 썼던 저택치고 제법 괜찮았다·
“일단 건물의 형태가 잘 유지되고 있고 정문부터 시작해서 어느 부분도 괴생명체로 변화하지 않았어· 이러면 정리하기도 쉽지· 며칠만 치우면 아주 쓸만한 마법 공방이 되겠는데·”
펭귄 수인 마법사의 확신 어린 태도는 학생들에게도 전염되었다·
듣다 보니 또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긴 이게 에인로가드 영지 내에 있는 건물이라고 생각하면 꽤 괜찮은 건물이긴 해·”
“맞는 말이군· 워다나즈가 상처 입을 수도 있으니까 다들 너무 험한 말은 하지 말자고·”
친구들은 이한 앞에서 괜히 가문의 별장 저택을 욕하는 일은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강철 같은 친구라 하더라도 가문의 선택이 비웃음을 산다면 마음에 상처가 날 수도 있었다·
“워다나즈· 이 저택은 아주···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습니다·”
아덴아르트는 최대한 친구가 상처 받지 않을 표현을 골라서 말했다·
흐뭇하게 저택을 둘러보던 이한은 갑작스러운 황녀의 말에 의아해했다·
‘혹시 아덴아르트도 갖고 싶었던 건가?’
생각해보니 가능성이 있었다·
아덴아르트도 명석한 친구인 만큼 수도에 위치한 저택이 가진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깨닫지 않았겠는가·
저택의 외양이 얼마나 엉망이든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건 그 위치였다·
“미안합니다· 황녀님· 하지만 제가 억지로 뜯어낸 게 아니라 대마법사 님께서 강제로 주신 겁니다·”
“···?”
아덴아르트는 이한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마법사라면 교장 선생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뇨? 에린다르벨 님이요·”
“···어머니가 이 별장을 주셨다고요?!?!?”
보기 드물게 아덴아르트는 펄쩍 뛰며 놀라워했다· 평소 그 언니처럼 대부분 무감정하게 행동하던 친구라고는 믿기 힘든 반응이었다·
이한은 그 반응에 살짝 미안해졌다· 이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갖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이게 사실 에린다르벨 님이 무책임하게 주신 게 아니라 수십 명의 목숨이 걸린 복잡한 사연이···”
“어머니께서 왜 이런 아무 가치 없는 선물을 주신 거죠?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아덴아르트의 말 때문에 받은 충격이 생각보다 컸는지 이한은 자연스레 반말이 나왔다·
아무 가치가 없다니?
그러나 황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평소 후배 마법사들에게 선물을 주실 때 훨씬 더 의미 있고 뜻깊은 선물을 건네 오셨습니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 직접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워다나즈가 고작 이런 선물을 받다니요·”
“아니아니아니· 괜찮습니다! 의미가 있어요! 다 의미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알시클의 활약을 망칠까봐 이한은 다급히 아덴아르트의 앞길을 막아섰다·
아덴아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의미가 있다니 그게 무슨···”
쾅!
“으아아아아악!”
지하실 식료품 창고를 확인하러 내려갔던 가이난도가 비명과 함께 솟구쳐 올라왔다·
튕겨 나온 가이난도는 데굴데굴 굴러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지 지하에 웬 마법사의 유령이···”
“!”
아덴아르트는 크게 놀랐다·
이게 어머니의 선물에 담긴 의미란 말인가?
‘대체 무슨 의미지?’
* * *
“그러니까 지하 식료품 창고 문을 열었더니 웬 마법사 유령이 나타나서 널 쫓아냈다고?”
“응·”
“언데드? 저주?”
“유령처럼 보이는 다른 마법일수도 있어요· 부여 마법으로 비슷하게 흉내 낼 수도 있고요·”
“황자 녀석이 착각한 걸 수도 있어· 유령으로 위장하는 마법사도 있거든·”
“왜? 왜 유령으로 위장하지?”
학생들의 가설을 가만히 듣던 알시클이 대신 대답했다·
“충분히 가능하지· 금화가 필요하니까 일단 저택을 판 다음에 지하에 몰래 숨어서 연구를 계속하는 거야·”
“···아 아니·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 음 그게·”
알시클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하고 살짝 허둥댔다·
그리고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모 마법학교 졸업생들 중에··· 조금 있어·”
“···”
“···”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괜히 물었다고 후회했다·
이한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일단 일이나 마저 하자·”
“그래· 워다나즈· 나하고 다른 놈들이 전위를 맡을 테니 네가··· 잠깐 확인하자는 게 아닌가?”
살코는 멈칫했다·
처음에는 이한이 다 같이 모여서 지하를 돌파하자는 줄 알았는데 방향이 이상했다·
지하실이 아니라 저택 1층의 주방으로 가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응? 지하실은 당장 안 급하잖아· 주방부터 치워놔야 식사를 하지·”
“과연 이한이야·”
가이난도는 옆에서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여긴 에인로가드가 아닌 만큼 꼭 지하 식료품 창고에서 먹을 걸 갖고 오지 않아도 됐다· 밖에서 식재료만 사오면 주방에서 요리가 가능했다·
이런 냉철함 때문에 친구들이 이한을 믿는 것 아니겠는가·
“아 아니···! 신경 쓰이지 않나!?”
“악한 놈이었으면 지하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올라왔겠지· 걱정하지 말고 일단 급한 것부터 치우자고· 너희들은 응접실부터 치워줄래?”
“···”
친구들은 할 말은 많았지만 일단 입을 다물고 이한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살코는 중얼거렸다·
“워다나즈 녀석이 더 이상해진 것 같아···”
지젤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간덩이가 부은 것처럼 대담한 녀석이었는데 에인로가드에서 몇 번 사건사고를 더 겪고 나니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 됐다·
저러다가 3학년쯤 되면 앞에서 차원 균열이 생겨도 느긋하게 관찰하며 커피를 마실지도 몰랐다·
친구들이 자신을 수상쩍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이한은 주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의 전 주인은 요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지 주방에는 먼지와 거미줄만이 가득했다·
‘벽난로부터 치워야겠군·’
이한은 지팡이를 휘둘러 벽난로 주변을 깔끔하게 치웠다· 염력과 물 원소 마법이 연달아 나가는데 버틸 수 있는 먼지는 얼마 없었다·
그러자 벽난로 안쪽에서 희끄무레한 마법사 유령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내가 남긴 마법을 풀어다ㅇ···
퍽!
회전하는 수옥탄을 맞은 유령이 산산조각나며 흩어졌다·
이한은 아차 싶었다· 너무 빠르게 반응한 탓에 상대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것이다·
‘이런· 뭐라고 하려고 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