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1화
각 마차의 학생들이 필적 추적이 불가능한 투서를 각자 작성하고 있는 사이(변환 마법과 화염 원소 마법이 사용됐다) 가이난도는 마차 밖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수도 외곽의 으슥한 곳에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낯익은 친구의 모습도···!?
“어?!”
“가이난도 님· 놀지 말고 손을 움직이세요·”
“빨리 작성하셔야 합니다·”
두 사제가 동시에 타박했다·
어지간해서는 다른 학생들에게 모진 말을 하지 않는 게 불사조 탑 학생들이었지만 가이난도는 예외였다·
가이난도가 벌인 수많은 탈주 행각은 불사조 탑의 사제들마저 믿음을 버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 아니· 이한처럼 생긴 사람이 저기 있었는데···”
“가이난도··· 사제님이 화내시잖아·”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 좀 하지 마· 우리가 창피해·”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은 자기들이 다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마차 안에 있는 게 사제들이어서 망정이지 흰 호랑이 탑이나 검은 거북이 탑이었으면 탑 전체가 망신이었을 것이다·
“진짜라니까! 보라고!”
가이난도가 펄펄 뛰자 친구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타차원에서 온 괴물이 지하를 오염시킨 모양입니다· 마법사들이 모여서 정화 중이라던데요·”
“감사합니다· 봤지?”
대답을 들고 돌아온 친구들은 의기양양하게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저런 곳에 이한이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
시아나는 머뭇거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있을 수도 있지 않나요?’
머뭇거리던 시아나는 옆에서 투서를 작성하고 있던 티질링을 바라보았다·
티질링은 ‘에인로가드의 영주는 제자를 괴물과 싸우게 하고 있다!’라고 거침없이 깃펜을 놀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물어보려던 시아나는 얌전히 포기했다·
옆을 보니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잠깐만! 이한이라면 저기 있을 수도 있잖아!”
뒤늦게 가이난도도 그 가능성을 떠올리고 말했지만 친구들은 타박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워다나즈가 지금 수도에 왜 있는지 까먹었어? 아무리 워다나즈라도 교장 선생님 일 벌써 다 돕고 저기 가서 일하고 있겠냐고·”
* * *
워다나즈? 저기 밖에서 차원 침식 사건 마무리하는 거 돕고 있을 거다·
“···”
“···”
왕궁 앞에서 해골 교장과 마주친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입을 떡 벌렸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녀석· 학교 밖이라고 아주 용감해졌구나· 하지만 사실인걸·
“워다나즈는 교장 선생님의 일을 도우려고 같이 온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그 일을 모두 끝내고 간 거라니까·
“···”
“···”
친구들은 이한이 해골 교장의 일을 돕기 위해 수도로 일찍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놀랐다·
벌써 다 끝냈다고??
“워다나즈를 데리고 강도짓하신 거 아니야?”
“제국 신문에 강도는 없던데···”
“안 들키게 하신 거 아닌가?”
다 들린다·
해골 교장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도짓으로 지원금을 충당한 게 아니냐는 추측은 제법 유쾌했지만 정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정말 다 설득했다· 믿지 못하겠으면 너희들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확인해보려무나·
“말도 안 돼!”
“혹시 워다나즈 님이 졸업하면 그쪽으로 보내겠다고 팔아넘긴 뒤 금화를 받아낸 건 아닐까요?”
“설마··· 아무리 교장 선생님이어도 그렇지 그런 짓을 하시겠어·”
학생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정답의 일부를 맞히는 동안 가이난도는 충격에서 벗어나 물었다·
“어 엄마도 설득되셨나요? 분명 에인로가드에 더 기부하면 자기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하셨는데??”
···그런 말을 하셨었느냐?
해골 교장은 살짝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크라하 부인 같은 관대한 후원자가 저런 말을 했을 줄이야·
혹시 그게 언제 한 말인지 기억나느냐? 두 달 전에 있었던 서부 보석 궁전 절도 사건? 아니면 다섯 달 전에 있었던 만년빙 연락선 실종 사건? 그도 아니면···
제국 신문에 등재된 적 있는 에인로가드 졸업생들이 친 사고 목록이 차례대로 읊어졌다·
그러나 가이난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근데 진짜 어떻게 설득하신 거예요?”
해골 교장에게서 배워 나중에 직접 써먹을 생각이었다·
워다나즈가 부탁하니까 그냥 들어주시던데·
“···어 겨우 그걸로요?”
가이난도는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같이 ‘거짓말하지 마십시오!’라고 외쳐주길 바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바로 납득했다·
“확실히 가능성 있어·”
“나라도 들어줬을 거 같다·”
“!?”
봤지? 어쨌든 워다나즈하고 놀고 싶으면 도시 외곽의 차원 침식 현장에 가봐라· 가서 마법도 좀 연습하고· 너희들의 교장 선생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에인로가드 기부금 문제가 다 해결됐는데도 일이 남으신 건가요?”
요네르가 살짝 걱정되어서 물었다·
1학년 때는 상관없었지만 2학년으로 올라온 지금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에인로가드의 금고가 작아지면 학생들에게도 직격타가 온다는 것을!
걱정할 것 없다· 남은 건 자질구레한 설명 정도니까·
“아하· 그래서 왕궁에 오신 거군요·”
아니· 지금 왕궁에 온 건 볼라디 교수 때문이다· 혹시라도 왕궁에 잠입해서 고발하는 걸 막아야 하거든·
“????”
‘뭔 소리야?’
학생들은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해골 교장은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이 턱뼈를 흔들었다·
너희들도 볼라디 교수 보면 너무 토라지지 말라고 한 마디씩 해주거라· 제자를 가르치는 일이란 게 원래 상처가 예정된 일인데···
“저희가 많이 다치긴 해요·”
너희 말고· 요 뻔뻔한 녀석 같으니·
가이난도를 거꾸로 매달아버린 뒤 해골 교장은 다시 둥둥 떠날 준비를 했다·
웅성거리며 외곽으로 이한을 찾으러 가려는 학생들의 모습에 해골 교장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다·
“예?”
너희가 들고 있는 종이뭉치들은 뭐지?
“···”
* * *
“알시클 님· 왜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십니까?”
이한은 주문 한 번 외우고 주변 두 번 확인하는 알시클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지금 인근의 마법사들은 모두 다 차원 침식 현상 뒷정리에 참가하고 있었다·
안의 이물질들은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세계와 차원들이 중첩되고 침식되면 자연스레 불안정해지기 마련·
또다른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확인하고 안정화 작업을 해놔야 했다·
“볼라디 배그렉 없지?”
“아니· 배그렉 교수님이 여기 왜 계시겠습니까?”
“네가 몰라서 그래·”
알시클은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우고 주변을 세 번 확인했다·
하필이면 볼라디 교수는 전투 마법사라서 더욱 두려웠다· 전투가 전문이 아닌 알시클 입장에서는 상성이 좋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두려우면 그냥 저택으로 돌아가서 쉬시죠? 남은 일은 별로 안 위험하니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이한은 그렇게 말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이런 차원 안정화 작업은 감각과 마력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이한과 잘 맞았다·
주변을 걸어 다니며 감각적으로 뒤틀린 곳을 찾은 뒤 그런 곳이 나타나면 다른 마법사를 부른···
“공간이여· 굳어라·”
···심지어 부를 필요도 없었다·
가르시아 교수에게서 기초 시공간 마법을 배운 덕분에 이한은 혼자서 다른 마법사의 네다섯배 정도 되는 분량의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저택은 더 위험하거든? 무조건 붙어 있는 게 낫지·”
알시클은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부리를 부르르 떨었다·
그나마 알시클이 믿고 있는 건 볼라디 교수의 제자였다·
제자 앞에서 설마 유혈낭자한 심문을 벌이지는 않을 것 아닌가·
“에이· 너무 걱정이 과하신 거라니까요·”
“흥· 너는 제자니까 그렇겠지·”
“저도 많이 공격당했거든요?”
이한은 툴툴대는 펭귄 수인 마법사를 옆으로 밀어낸 뒤 공간의 균열에 접근했다·
“공간이여· 굳어라·”
“저 저기···”
제국에서 제일 미안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과 함께 대마법사 에린다르벨이 접근했다·
“···잠깐 괜찮겠습니까?”
“아· 네· 무슨 일이시죠?”
“이번 실수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를···”
둘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한은 상대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에린다르벨 님은 대마법사이신데 왜 저렇게 선하신 겁니까?”
“대마법사라고 다 사악하지는··· 아니다· 사악하긴 한데··· 어쨌든 좀 특이하시긴 하지·”
둘이 속삭이는 사이 에린다르벨은 주섬주섬 공간에서 물건을 꺼냈다·
이번에 끼친 피해를 조금이나마 보상하기 위해 갖고 온 선물이었다·
“이 유물은 <아센의 지팡이> 입니다· 빛 원소와 연관된 마력을 빠르게 회복시켜주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이걸 선물로···”
“어 에린다르벨 님· 근데 워다나즈는 마력이 많아서 별 쓸모가···”
“!”
알시클의 지적에 에린다르벨은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니 여기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끝이 없는 마력량을 갖고 있었다· 빛 원소 계열 마력만 한정적으로 회복시켜주는 유물은 아무리 좋더라도 의미가 없었다·
‘또 이런 실수를!’
에린다르벨이 다시 고개를 푹 숙이자 이한은 알시클의 푹신한 옆구리를 푹 찔렀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아 아니· 미안···”
알시클은 사과했다·
마법사로서 아는 게 나오면 자동적으로 부리가 열리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네가 받아서 쓰는 건데 필요 없는 걸 받을 순 없잖냐· 대마법사한테 받는 거라고·”
“받아서 팔면 되죠· 상대의 마음도 좀 생각해주십시오·”
“?”
알시클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그러면 팔면 안 ㄷ···”
“하여간 다음 선물은 무조건 좋다고 해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알 알겠어·”
에린다르벨은 지팡이를 집어넣은 뒤 다시 공간을 한참 뒤적거렸다·
긴 고민 끝에 나온 건 둥그런 알이었다·
“이건 히포그리프의 알입니다·”
“그건 안 됩니다!”
이한은 다급하게 외쳤다· 알을 소개하려던 에린다르벨은 멈칫했다·
어째서?
소매 안에서 버리지 말아달라는 듯이 팔을 꽉 휘감는 새끼 바실리스크를 달래며 이한은 재빨리 설명했다·
“제가 사실 그리폰을 하나 기르고 있어서요· 크게 질투할 겁니다·”
“그 그렇군요···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
에린다르벨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번에는 알시클이 이한의 옆구리를 찌를 차례였다·
“그냥 받자며!”
“죄 죄송합니다· 그리폰이 자주 삐져서···”
“진짜? 그리폰이 질투가 심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아마 제 그리폰이 좀 특이한 모양입니다·”
-···
새끼 바실리스크는 이 자리에 없는 폰리그를 안타까워하며 꼬물거렸다·
이 대화를 듣는다면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계속 공간 뒤적거리는 대마법사의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알시클이 조언했다·
“저 에린다르벨 님· 워다나즈는 그냥 금화로 줘도 기뻐할 텐데요·”
“터무니없는 말 하지 마십시오· 펭에린 님·”
“···”
에린다르벨의 단호한 거절에 알시클은 부리를 삐죽였다·
진짜인데!
고민이 길어지자 에린다르벨은 그냥 공간 안에 있는 내용물을 바닥에 쏟았다· 그리고는 하나씩 중얼거리며 치워나갔다·
“순금으로 된 천사 동상··· 너무 무난합니다· 저번에 얻은 3층짜리 수도 마법사 별장··· 이것도 별로 쓸모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알시클 님· 제발 저 중에 하나 고르라고 조언 좀 해주십시오·”
이한이 진심 가득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만약 저 선물들을 그냥 넘어가고 이상한 지팡이나 히포그리프 알을 받게 된다면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