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화
이한은 혼란스러웠다·
해골 교장의 말이 너무나도 뜬금없었던 것이다·
“배그렉 교수님이 도착한 것과 제가 여기 없었다는 게 무슨 상관입니까?”
아주··· 상관이 있지·
말하면서 해골 교장은 옆의 대마법사를 한 번 더 노려보았다· 유크벨티레와 아덴아르트를 낳은 제국의 대마법사는 안절부절 못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알다시피 볼라디 교수가 쓸데없이 과보호하는 측면이 있지 않느냐·
“예???!”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말에 이한은 순간 무슨 개소리냐고 말할 뻔했다·
주변의 시선만 없었다면 정말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볼라디 교수가 사람을 과보호한다니·
저번 사건 때 볼라디 교수가 그래도 제자라고 이한의 편을 들어준 것에 감동받긴 했지만 세상에는 양보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여기 에린다르벨이 아주 완벽하고 엄밀하게 계산해서 초대했다지만 볼라디 교수가 듣는다면 오해할 수도 있겠지· 괜히 걱정시킬 필요는 없지 않느냐·
‘뭔가 이상한데·’
이한은 에인로가드의 학생이자 해골 교장의 현 수제자로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무언가 사악한 계략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훌륭하다· 쓸데없이 더한 가르침을 받을 필요 없다· 그럴수록 폭주의 위험성만 커질 뿐이다·”
옆에 있던 악신숭배자 엘프가 냉큼 대답했다·
엘프 입장에서는 이한이 볼라디 교수를 자극해서 더한 가르침을 받고 성장하는 것보다는 최대한 느긋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를 원했다·
지금도 이미 충분히 위험한 괴물이었던 것이다·
···이 악신숭배자 같지만 지껄이는 말은 제법 타당한 놈은 대체 누구인가? 탐사대는 아닌 것 같은데?
해골 교장의 당연한 질문에 탐사대원들은 즉시 대답했다·
“악신숭배자 맞습니다·”
“크삭사리골 교단의 숭배자인데 스스로 항복하고 잡혔습니다·”
그 미치광이들? 왜? 아· 알겠군· 워다나즈 녀석이 폭주하면 이것저것 예지하기 힘들어진다 이건가·
해골 교장은 보고를 듣기도 전에 상대가 왜 이한 옆에서 재잘대는지 짐작했다·
예지에 집착하는 광신도 입장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제자는 언제든 예지를 찢어발길지 모르는 괴물처럼 느껴졌으리라·
“그렇다· 너 마법사여· 괴물을 그만 살찌우게 하라· 위대한 예언자의 예지가 틀어지면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엘프는 과연 미치광이답게 해골 교장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준엄한 훈계를 내렸다·
해골 교장이 제자를 지나치게 강하게 키운 탓에 이 모든 혼란의 씨앗이 탄생한 것 아니겠는가?
물론 해골 교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혼란이 뭔지도 모르는 애송이 주제에 어디서 같잖게 설교질이냐? 꺼져라·
튕기는 소리와 함께 엘프가 사라졌다· 이한은 상대가 어디로 갔을지 짐작했다·
‘심층 징벌방에 죄수 한 명 추가됐겠군·’
옛날부터 저 놈들은 도움 하나 안 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헛소리만 주절주절··· 여하튼 알겠느냐? 넌 오늘 여기 없었던 거다·
“아 예· 알겠습니다·”
이한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마친 해골 교장이 새로운 대마법을 꺼냈다·
순간 해골 교장이 몰고 다니던 리치 특유의 어둠이 사라지더니 성스러운 빛으로 변했다·
그 빛은 처음에는 후광으로 시작했지만 순식간에 주변을 채우고 저 아래 깊숙한 차원 침식 공간까지 가득 메꿔버렸다·
화생삼매(火生三昧)!
해골 교장의 선언과 함께 빛은 화염으로 변했다· 놀랍게도 그 화염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빛의 성질을 유지하고 있었다·
탐사대원 중 마법을 쓸 줄 아는 이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고유세계를 응시했다· 마법사라면 감히 시선을 돌릴 수가 없는 지고한 광경이었다·
마찬가지로 응시하던 이한은 빛이 발하는 힘에서 친숙함을 느꼈다·
‘구산팔해!’
차원의 첨단에서 발하던 빛·
지금 주변을 휩쓸어버리는 광염에서는 그와 같은 힘이 느껴졌다·
해골 교장은 제자의 반응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설명해줬다·
야차놈의 궁전에 방문했으니 이 빛도 본 적 있겠군· 맞다· 깨달은 자만이 불러올 수 있는 영원한 진리의 염광(焰光)이지·
고유세계는 빛이자 화염이 되어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이제까지 어떤 두려움도 없이 돌격해오던 거미 괴물들도 무언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는지 허둥지둥 지하로 후퇴하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광염은 멈추지 않고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벽과 천장 수로로 이뤄진 복잡한 장애물들도 파도를 막지 못했다· 파도는 세차게 너울지며 장애물을 관통해 적을 불살랐다·
이 불은 내 깨달음이다· 네 불에는 네 깨달음을 담도록 하거라·
“감사합니다·”
예전이었다면 무슨 말이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소세계에 발을 디딘 지금은 어렴풋이나마 해골 교장이 전하려고 한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마법사끼리 공유가 가능한 소세계만 하더라도 마법사 개인의 차이에 따라 그 발현이 크게 달라졌다·
완성된 세계에 자신을 맞추는 방식인 소세계도 이 정도인데 자신이 직접 세계를 만들어 확장해야 하는 고유세계는 다른 이의 마법을 모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해골 교장이 굳이 말해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 대마법의 위력에 취해 쓸데없는 모방을 하는 대신 자신만의 마법을 만들라고·
감사하다고?
“예? 예·”
그럼 넌 오늘 정말로 여기 없었던 거다·
“···솔직하게 말해보십시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 * *
녹휘석 마탑의 후계자 지논은 뛰어나고 영특한 두뇌를 갖고 있었다·
그런 만큼 편지가 엇갈렸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에린다르벨 님의 편지를 받고 왔습니다만···
-어서 오십시오· 에인로가드 학생이십니까?
-아닙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여기 아티팩트들을 둘러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걸 고르시면··· 잠깐·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저는 녹휘석 마탑 출신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분명 대마법사께서는 에인로가드 학생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음· 제 생각에는 그만큼 좋은 아티팩트라는 뜻으로 에인로가드 학생이란 표현을 쓴 게 아닌가 싶···
-아! 알겠습니다· 혹시 편지가 엇갈린 거 아닐까요?
-!!!!!
뛰어나고 영특한 두뇌를 가진 지논은 서둘러 귀환했다·
만약 편지가 엇갈린 거라면 얼굴을 모르는 에인로가드 학생은 지금쯤 지논 대신 난이도 높은 탐사에 참가했을 것 아닌가·
-큰일났습니다! 편지가 엇갈린 모양입니다· 바로 탐사대 쪽으로 움직여야겠습니다·
-허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대체 어째서···
녹휘석 마탑의 마법사들은 새파랗게 질린 후계자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태연함을 유지했다·
-생각해보시오· 지논· 만약 에인로가드 학생이 잘못 받은 편지를 들고서 탐사대 쪽으로 갔다면 탐사대가 호락호락 받아주었겠소?
-···아!
-그랬다면 진작 깨닫고 여기 마탑으로 연락이 왔을 것이오· 아마 엇갈린 편지는 이쪽에만 도착했겠지·
마법사들의 조언에 지논은 다시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과연 녹휘석 마탑의 노련한 마법사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지논보다 훨씬 시야가 넓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생각이 좁았습니다·
-허허· 아닙니다· 젊은 혈기라는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일이지?
-앗 배그렉 교수님 아니십니까!
마법사들과 훈훈하게 대화를 마치던 도중 지논은 반가운 손님을 발견했다·
녹휘석 마탑의 중요 고객이자 든든한 친구 볼라디 교수였다·
-별 일 아닙니다· 편지가 엇갈렸는데 제가 괜한 걱정을 한 모양입니다·
-흠·
볼라디 교수는 엇갈린 편지를 한 번 읽더니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리고는 신중한 태도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읽더니 바로 종이새를 만들어서 날려보냈다·
-가봐야겠군·
-탐사대 말씀이십니까? 그런 거라면 같이 가시죠! 저희도 관련된 일인데 혼자 보내드리면 저희가 죄송하지 않겠습···
그러나 이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볼라디 교수는 저 멀리 움직이고 있었다·
녹휘석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 모습에 의아해했다·
설마 에인로가드 학생이 편지를 받았다 하더라도 탐사대에 참가했을 가능성은 없을 텐데 왜 저렇게 서두르는 것일까?
* * *
“!”
수도 외곽에 도착한 볼라디 교수는 밖에 나와 있는 탐사대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탐사대가 왜 벌써 나왔는지 고민했겠지만 볼라디 교수는 뛰어난 전투 마법사답게 가장 의심스러운 점부터 먼저 확인했다·
역시 우려했던 대로 제자가 탐사대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멀쩡하단 점이었다·
볼라디 교수! 이런 우연이 있나! 하하하! 나는 여기 이 기특한 제자와 계속 수도를 누비고 있었지· 그러던 도중 공허에서 넘어온 괴물 소식을 듣고 돕기 위해 달려왔다네·
“···그냥 제가 말할까요?”
쉿· 조용히 해라·
해골 교장은 제자에게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이한은 편지가 엇갈렸다는 것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황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탐사대 참가한 걸 숨기고 싶어하시는군·’
솔직히 볼라디 교수가 듣는다고 놀라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오히려 자기도 위험한 곳에 보내겠다고 한 술 더 뜰 것 같았다) 원래 세상 일은 조심해서 나쁠 것 없었다·
만약 볼라디 교수가 경쟁심이라도 불태운다면 자신만 손해일 것 아닌가·
알시클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배그렉 교수께서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볼라디 교수가 제자를 아껴서 그런 거지· 자꾸 묻지 말게· 아부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니 이게 무슨 아부···”
쾅!
볼라디 교수보다 한 발 늦게 지논이 도착했다· 가속과 강화 마법을 해제하며 지논은 외쳤다·
“교수님! 그렇게 서두르실 필요가··· 잠깐 다들 왜 나와계십니까?”
“녹휘석 마탑에서는 왜 온 겁니까?”
알시클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아 먼저 물었다·
선량하게 생긴 녹휘석 마탑의 차기 후계자는 살짝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실은 편지가 엇갈렸습니다·”
“···엇갈렸다니?”
지논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다행이라는 듯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역시 괜찮았던 모양이군요· 배그렉 교수님께서는 걱정이 되셨는지 이렇게 직접 방문하셨지만 저는 탐사대 여러분들을 믿고 있었습니다! 설마 여기 모인 분들께서 아직 학생인 마법사를 위험한 탐사에 참가시키셨겠습니까? 아무리 에인로가드 출신이라도 그건 말도 안 되죠·”
“···”
“···”
알시클을 포함한 탐사대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가 가신 듯 창백해졌다·
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이한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지금···
‘아니· 욕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구부터 욕해야 할지 모르겠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대마법사 에린다르벨부터 욕해야 할지 아니면 편지 직접 안 읽고 괜찮다고 호언장담한 해골 교장을 욕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어 워다나즈냐? 같이 가자!’하면서 손 잡고 끌고 간 알시클을 욕해야 할지···
“잠깐· 혹시 그쪽이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맞습니까? 이번에 마탑의 마법사들이 모두 관심을 가진?”
“아· 예· 맞습니다·”
“이런 우연이! 하긴 생각해보니 에린다르벨 님께서 아무리 후학을 챙겨주신다 하더라도 이렇게 따로 편지를 써주실 정도의 에인로가드 학생이 많지는 않겠죠! 정말 다행입니다· 만약 실수로 탐사대에 참가라도 했다면 우리 마탑은 물론이고 다른 마탑의 마법사들이 얼마나 원망했겠습니까?”
···
해골 교장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에린다르벨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화를 내려다가도 마음이 약해지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