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7화
‘하지만 적에게도 배울 건 배워야 하는 법이지·’
뛰어난 에인로가드 학생은 흉악한 적에게서도 교훈을 얻는 법·
앞으로 악한 자들을 만나면 바로 이간질부터 시도해봐야겠다고 이한은 굳게 다짐했다·
“제가 놈들을 속여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라?’
동료 탐사대원들이 너무 순순히 허락해주자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아직 이르다고 말하거나 말릴 줄 알았던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제가 실수라도 한다면 다들 위험해질 수도···”
“그럴 리 있겠습니까·”
“마법사 님을 믿습니다·”
탐사대원들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즉답했다· 이한 뒤에 업혀 있던 알시클이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워다나즈 니가 활약하는 걸 봤는데 의심하는 놈이 있으면 애초에 지능 문제로 탐사대에 탈락했겠지···”
“···조용히 하십쇼·”
* * *
“뭔가 이상하다·”
키타렌아눔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인 혼혈 전사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물었다·
“또 괴물 놈들이 올라오고 있냐?”
“아니· 뭔가 다른··· 불길하군·”
“점을 쳐봐라·”
전사의 말에 키타렌아눔은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런 종류의 마법사가 아니다· 마법사가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나·”
모든 학파의 마법에 능통한 마법사가 오히려 지극히 드물었다· 마법사라면 취약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었고 키타렌아눔에게는 그게 예지 마법이었다·
정확도 낮은 예지를 시도하느니 마법사는 휴식을 취하는 걸 선택했다·
화르륵!
마법사는 살아 움직이는 사람 형태의 작은 인형을 꺼내더니 불태웠다·
간이 인신공양이었지만 마력을 회복하고 마법을 채워 넣기에는 충분했다·
‘남은 마법은··· 더 위력 강한 걸로 채워넣긴 해야겠군· 혹시 모르니·’
키타렌아눔은 자신의 팔을 구성하고 있는 마법을 더 강력한 것으로 갈아 끼웠다·
마법 자체를 신체의 형태로 응축시킨 이 비술은 키타렌아눔이 자랑하는 장기였다· 강력한 마법을 즉시 섬세하게 시전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준비가 필요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키타렌아눔은 추가 인신공양을 준비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지면 남은 제물들을 바쳐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킬 생각이었다·
“적이다·”
“!”
전사의 말에 놀란 키타렌아눔이 물었다·
“얼마나 접근했지?”
“작은 계단 위쪽으로 오십 걸음 정도· 괴물들과 진동이 다르군·”
“놈들이 덤빌 거 같나?”
“글쎄· 적의는 없는 것 같은데 제국의 목줄 매인 애완견 놈들은 워낙 멍청해서···”
-협상을 요청한다!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키타렌아눔은 즉시 준비했던 인신공양부터 시전하려고 했다·
바로 그 때 방해가 들어왔다·
마법사가 다른 마법사의 마법을 파악하고 견제할 때 사용하는 기예 역마법!
파지직!
“???!!!”
키타렌아눔은 자신의 인신공양이 아직 계단 위쪽에 얼굴도 드러내지 않은 마법사한테 막히자 경악했다·
‘뭐냐?!?!?’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서로 얼굴을 대면한 상황에서 상대에게 마법을 시전하는 걸 보여줘도 역마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남의 마법이 시전도 되기 전에 정확히 간섭해서 훼방 놓기 위해서는 어떻게 보면 상대보다 더 높은 이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얼굴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둔 상황에서 마력의 기척만으로 역마법을 성공시키다니· 키타렌아눔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뭐야? 왜 그래?”
“탐사대 중에··· 대마법사가 있었나?”
“없었지·”
키타렌아눔은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주의해야 할 이름은 없었었다· 펭에린 가문 마법사나 녹휘석 마탑 마법사 정도였는데···
그 중에 자신의 마법을 이렇게 농락할 수준의 마법사가 있었다고?
마법범죄자는 분노보다는 굴욕과 공포를 느꼈다·
마치 예전에 다른 마법범죄자이자 대마법사인 안타곤달스를 직접 대면했을 때처럼·
-정신 차려라· 마법사·
-닥쳐라! 악마! 네놈은 이게 얼마나 대단한지도 모르겠지·
이 정도라면 거의 상대가 자신을 갖고 놀 만큼의 차이라고 봐야 했다·
대마법사만 제외한다면 제국의 비교적 젊은 마법사들 중에는 자신의 상대가 없을 거라고 나름 자신했던 키타렌아눔에게는 지독한 충격이었다·
설마 키타렌아눔은 상대가 이미 마법범죄자를 여럿 만난 탓에 인신공양의 비술을 파훼하는 비전을 미리 철저히 연습해뒀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 *
“···어 잘못 선택했나?”
“아냐· 잘한 거다·”
알시클은 이한이 당황스러워하자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인신공양의 마법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막을 수 있다면 막는 게 무조건 맞았다·
“그보다 용케 이 거리에서 역마법을 걸었다?”
“교장 선생님이 익히라고 괴롭히셨거든요·”
“알 만하다· 이번 학기 진짜 힘들었겠는데·”
“작년에 익혔는데요·”
“···”
알시클은 부리를 다물었다· 그 사이 적이 먼저 외쳤다·
“목적이 뭐냐! 지금 여긴 차원 침식이 일어나서 괴물들이 들끓는다· 같이 죽기라도 하자는 거냐? 응?”
‘저 놈이 거인 피가 섞인 전사라는 그 놈인가 보군·’
속으로 생각하며 알시클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난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이다· 옆에 다른 마법사는 있나?”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 기억해두지·”
키타렌아눔은 이를 갈았다·
오늘 이 느낀 좌절과 굴욕을 반드시 설욕하리라·
“솔직히 인정하지· 네놈이 이렇게 뛰어난 마법사일 줄은 몰랐다·”
“뭐? ···아니· 네놈의 인신공양 마법을 막은 건 내가 아니라 여기 내 후배인데·”
알시클의 말에 거인 혼혈 전사와 마법범죄자는 시선을 교환했다·
전사가 바로 말했다·
“개수작이군· 네놈을 흔들려는 거다·”
-저런 수작에 속지 마라·
“나도 알고 있다·”
키타렌아눔은 알시클에 대한 평가를 한층 높였다· 이 상황에서 흔들려고 하다니 보통 놈이 아니었다·
팽팽한 대치에 바시르맥은 초조함을 느꼈다· 괴물들이 언제 몰려들지 몰랐던 것이다·
“이봐! 너희 주문쟁이들끼리는 서로 친하지 않나! 이 상황에서 싸우느니 잠깐 협력하지 않겠나? 여기 이 마법사 놈도 제국 마법학교 출신이다! 네놈들의 선배일 수도 있다고!”
“쓸데없는 소리를···”
키타렌아눔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는 거인 혼혈 전사의 태도에 눈썹을 찡그렸지만 효과는 매우 강렬했다·
이한이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워 워다나즈· 진정해· 에인로가드 출신이라고 확정된 건 아니잖아·”
알시클은 당황해서 이한을 진정시키려 속삭였다· 그러나 역효과였다·
“알시클 님도 솔직히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러니까 에인로가드 이름도 안 나왔는데 에인로가드가 아니라고 말하신 거죠!”
“···그렇긴 한데 확정은 아니잖냐!”
이한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마법학교 출신으로서 수치스럽고 괴로웠지만 지금 이런 감정에 흔들릴 때가 아니었다·
‘그래· 상대가 에인로가드 출신이든 아니든 뭐가 중요하겠어·’
앞으로 살다 보면 에인로가드 출신 마법범죄자들을 바구니에 담긴 달걀만큼이나 많이 만나게 될 텐데 흔들려서는 안 됐다·
“같은 에인로가드 출신이라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봐주는 건 없다!”
“발드로가드다·”
“뭐?”
“에인로가드가 아니라 발드로가드라고· 난 발드로가드 출신이다· 애송이들·”
“···”
“···”
세 마법사 사이에 어색하고 미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주문쟁이들만의 섬세한 문화를 모르는 바시르맥만 의아해했다·
“뭐냐? 뭔데?”
“닥쳐라· 머저리 같은 자식· 이래서 말하기 싫었는데·”
제국의 마법사들을 상대할 때 가장 짜증스러운 반응은 적의도 경멸도 비난도 아니었다·
발드로가드 출신인 걸 밝혔을 때 나오는 그 어색하고 미묘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에인로가드 출신 마법사들이 특히 심했다·
-뭐? 발드로가드 출신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마법범죄자가 됐지?
-크흑! 제법 강하군···! 어떻게 발드로가드 출신이 이런 마법을?
대결에 패배해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정말 순수한 호기심으로 ‘어떻게 발드로가드 출신이 이런 마법을 쓰냐?’질문을 던지는 모습은 키타렌아눔의 자존심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물론 자존심은 키타렌아눔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주문쟁이 놈· 뒤지고 싶은 거냐? 이 거리에서 네놈이 마법을 빨리 쓸까 내 주먹이 네놈 혓바닥을 먼저 뽑을까?”
둘이 쓸데없이 다투는 사이 이한과 알시클도 쓸데없는 대화를 나눴다·
“발드로가드 출신도 범죄자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아 아니· 그렇긴 한데··· 그렇군요· 그런데··· 그렇죠·”
‘얘 악신숭배자가 궁전 습격했을 때보다 더 놀란 것 같은데·’
이한은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발드로가드 출신도 범죄자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 중 마법범죄자가 있는 것도 또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그렇지·
“좋게 생각하자· 워다나즈· 놈이 에인로가드 출신이었다면 몇 배는 까다로운 적이었을 거야· 발드로가드 출신이니까 이렇게 상대할 수 있는 거지·”
“위로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알시클이 걸어놓은 소음 흡수 마법 덕분에 다행히 둘의 대화는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만약 키타렌아눔이 들었다면 괴물이고 뭐고 사생결단을 시도했으리라·
“일시적인 협력이라면 동의할 생각이 있다!”
이한의 외침에 다투던 둘도 멈칫했다·
“정말인가?”
“그래· 괴물이 생각보다 강하단 건 그쪽도 알고 있잖나·”
“그렇지···”
동의하려던 키타렌아눔은 무언가 번뜩이는 게 있어서 질문을 던졌다·
“잠깐· 네놈들이 뭘 건드렸나? 혹시 괴물의 귀중한 무언가라도 훔쳤다면···”
처음에는 괴물들이 갑자기 우선순위를 바꾼 게 더 새로운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발견해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바꿨을 것 같지는 않았다·
키타렌아눔이나 바시르맥도 충분히 탐나는 먹잇감이었던 것이다·
“무슨 소리지?”
알시클이 의아해하며 묻자 키타렌아눔은 아까 일어난 현상을 설명했다·
‘놈들을 떠본다·’
만약 탐사대원들이 괴물의 알이라도 훔쳐서 확보하고 있다면 그건 반드시 그들이 다시 강탈해야 했다·
“???”
“그런 거 없었잖습니까?”
물론 그런 건 없었던 만큼 이한과 알시클 둘은 혼란스러워했다·
“음·”
알시클은 뛰어난 마법사답게 주어진 단서만 가지고 추리에 들어갔다·
언제나 든든한 선배 마법사의 모습에 이한은 살짝 기대 섞인 눈빛을 던졌다·
“떠오르는 가능성이 하나 있긴 한데·”
“무슨 가능성입니까?”
“저놈들이 겪은 현상이 일어난 시간 있잖아· 따져보면 우리가 괴물들을 만났을 때거든·”
“우리 일행 중에 괴물의 알을 몰래 훔친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같이 움직였는데 그게 어떻게 되냐· 그리고 그랬으면 훨씬 더 빨리 왔겠지·”
“그럼 뭡니까?”
알시클은 이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마법범죄자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가장 가능성 높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괴물이 이한을 탐내고 있다는 것·
공허에서 온 놈의 사고방식을 알시클이 어떻게 완전히 짐작하겠냐만은 이한의 마력을 생각해보면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저 말입니까? 유독 저한테 많이 덤벼들긴 했는데 저는 그게 하도 짜증나게 행동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만난 적도 없는 괴물이 자신을 탐내고 있다는 말에 이한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숨죽이고 듣고 있던 새끼 바실리스크가 단호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주인님·
“응?”
-제 생각에도 저 말이 맞는 거 같아요···!
“···혹시 어떻게 생각을 했길래 맞다고 느꼈는지 좀 물어봐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