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화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펭에린 님과 워다나즈 님은 만약 마법이 계산을 벗어날 경우 상황에 맞춰서 보조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마법사들은 지하 하수도 깊숙한 곳에 가려진 위장의 장막을 완전히 벗기기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지금도 1/3 이상 벗겨진 상태라 현실에 침식된 차원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이제 탐사대의 준비가 끝난 만큼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나게 할 때였다·
“깨어나라 모습을 드러내라!”
“발동되어라!”
우드득!
이한은 작년 서리거인 왕이 강림한 구역을 방문했던 일을 떠올렸다·
현실이 원래라면 일어날 수 없는 법칙으로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현상·
지금 구역 아래쪽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허억···!”
“생각보다 훨씬 더 지독한데·”
탐사대원들은 술렁거렸다·
원래 타 차원의 모습이란 게 대륙의 종족들에게는 낯설고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눈앞의 광경은 보통이 아니었다·
시야가 가릴 만큼 빽빽하게 펼쳐진 거미줄들과 통로 곳곳에 고인 산성액·
원래는 깨끗한 물이 흘렀을 수로를 타고 산성액이 흐르자 암석이 녹는 소리가 났다· 이 괴물이 살던 차원이 어떤 차원인지 즉시 느껴졌다·
“괜찮으시겠···”
혹시 몰라 괜찮냐고 물으려던 탐사대원은 옆에 있던 이한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니 이한은 알시클과 함께 이미 산성액 웅덩이 앞까지 걸어간 상태였다·
“이거 해독 가능할까요?”
“글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해독하기보다는 그냥 피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야! 그걸 왜 찍어서 먹어봐!!”
“아· 독성의 강도를 확인해보고 싶어서요· 괜찮습니다·”
‘···에린다르벨 님께서 보내주신 이유를 알 것 같군!’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과 행동을 본 탐사대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대마법사의 안목은 틀린 게 없었다·
* * *
마법범죄자 키타렌아눔은 자리에 모인 자들의 면면들을 확인하며 속으로 경멸어린 평가를 내뱉었다·
‘제국에서 버림 받은 잡놈들만 모아놨군·’
마법범죄자 주제에 무슨 말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런 경멸을 들을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다·
왼쪽에 있는 엘프는 악신숭배자였다· 눈을 포함한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은 이 엘프의 드러난 살갗에는 마법범죄자도 눈을 찌푸릴 만한 모독적인 문양이 가득했다·
오른쪽에 있는 거인 혼혈은 분리주의자였다· 제국에서 거인들을 이끌고 나와 수많은 노예 종족 위에 군림하는 왕국을 세우고 싶어하는 이 전사는 성(城) 한 채 정도는 될 법한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앞에 있는 마법사는 키타렌아눔도 정말 엮이고 싶지 않은 마법사였다·
마법범죄자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이고 끔찍한 족속들 바로 종말주의자였다·
마법의 길을 걷다가 미쳐버린 탓에 현실에 종말을 강림시키고 싶어하는 미치광이들!
마법범죄자들이 제국에서 악명이 높다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목표를 위해 조금 더 효율적인 지름길을 달릴 뿐이었다· 종말주의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키타렌아눔은 이들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키타렌아눔과 협력했을 마법범죄자 세력 안타곤달스 파벌이 갑자기 와해된 것이다·
-그 말은 분명 사실이겠지?
-그래· 이 분노공의 수석 부관이자 으뜸가는 전령 에사도지콰의 말을 믿어라·
키타렌아눔은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악마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악한 계약을 맺은 이후 이 악마와 마법범죄자는 서로 상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놈은 악마들 사이에서도 악명 높은 괴물이다· 그 괴물을 붙잡아서 부릴 수만 있다면 너를 쓰러뜨릴 수 있는 자는 이 땅에 없을 것이다·
-믿기진 않지만 믿어보도록 노력하지·
키타렌아눔은 당연히 악마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필멸자와 계약하는 악마는 절대로 그냥 친절을 베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의 10분의 1만 사실이라도 지금 이 괴물을 붙잡을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렇게 강력한 괴물이라니·
-다른 놈들의 이유는 뭔지 모르겠군·
분리주의자 거인 놈은 아마 자신과 비슷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악신숭배자나 종말주의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짐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들의 광기 어린 목적과 계획은 동급의 광기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상관없다· 놈들을 이용해서 괴물을 붙잡은 다음에는 전부 다 쳐내버려라· 이 에사도지콰가 널 도와주겠다·
-알고 있으니 그만 재잘대게나· 악마 친구여·
마법범죄자의 건방진 말에 대악마는 분노에 찬 울음소리를 낮게 그르렁댔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이 대악마의 힘은 아직 온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에사도지콰의 힘이 회복되고 분노공께서 부활한다면···
대악마는 언제나 했던 이야기를 다시 반복했다·
자신의 힘을 회복하고 자신이 섬기던 주인을 부활시키겠다고·
키타렌아눔은 당연히 그러길 바라지 않았다·
악마와 마법범죄자가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건 둘 다 아쉬운 게 많아서였으니까·
“지금이다·”
눈을 가린 악신숭배자 엘프가 입을 열었다·
우드득!
눈앞의 지하 수도가 갑자기 거미줄과 산성액으로 가득 찬 적대 차원으로 변하자 모여 있던 이들은 웅성거렸다·
돈으로 긁어모은 용병들이 웅성거리자 거인 혼혈 전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손에는 키 큰 사람과 맞먹는 크기의 대검이 들려 있었다·
“출발한다· 놈들이 길을 내줬군·”
“위험하지 않은지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다·”
거인 혼혈 전사는 옆에 있던 용병의 머리통을 붙잡더니 앞으로 휙 던졌다·
풍덩!
수로로 던져진 용병은 비명과 함께 녹아내렸다· 처절한 광경에도 불구하고 전사는 멈추지 않고 다른 용병들을 하나씩 더 던졌다·
“숨은 쉴 수 있군· 가자! 그 짐승은 내가 타겠다· 양보다 훨씬 더 좋은 탈것이 되겠군·”
“멍··· 멍청한 양보다는 훨씬 더 도움이 될 겁니다·”
겁에 질린 용병이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아첨하듯 내뱉었다·
그러자 거인 혼혈 전사는 우뚝 멈춰서더니 용병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네? 멍 멍청한 양보다는 훨씬 더 도움이···”
풍덩!
전사는 용병을 수로로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뱉듯이 외쳤다·
“감히 내 양을 모욕해!”
“조용히 해라· 다른 놈들이 들으면 일이 귀찮아진다·”
키타렌아눔은 전사를 말렸다·
원하는 건 조용히 괴물을 생포해서 빠져나오는 것이었지 수도에 있는 제국의 강자들을 전부 다 여기 부르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올 테면 오라고 해라· 전부 다 죽여 버릴 테니·”
-멍청한 짐승 새끼·
악마가 중얼거리자 키타렌아눔은 씩 웃었다· 동감이었다·
“그나마 지하라 다행이군· 고함을 질러도 안 새어나갈 테니·”
“외부에서 안 온다·”
악신숭배자 엘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키타렌아눔은 제법 안심했다·
저 엘프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예지 마법을 자랑했다· 저렇게 말한다면 일은 들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리라·
“괴물을 만난다·”
“더 좋군·”
“좋지 않다·”
“???”
악신숭배자 엘프가 갑자기 돌아섰다·
“나는 돌아간다· 주인님에게 짐승을 바치는 것보다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좋다·”
“뭐 뭐야 저 새끼?”
갑자기 악신숭배자가 떠나버리자 자리의 분위기가 기묘해졌다· 거인 혼혈 전사가 데리고 온 용병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 놈 죽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 위치라도 불어버린다면···”
“내버려 둬· 악신 섬기는 놈이 첩자 짓을 하겠나· 몫 나누지 않아도 되어서 좋겠군·”
전사는 엘프가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보상이 커지는 것에만 주목하며 기뻐했다·
키타렌아눔도 동감했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찜찜했다·
그 탓인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옆의 종말주의자 마법사에게 질문을 던져버렸다·
“어떻게 생각하나?”
“뭘 말이지?”
“저 엘프 놈 말이다·”
“아! 예지 말인가!”
종말주의자의 목소리는 상냥하고 친절해서 오히려 더 오싹한 부분이 있었다·
키타렌아눔은 즉시 괜히 물어봤다고 후회했다·
“일이 헝클어진다 하더라도 별 문제는 없겠지·”
“···어째서지?”
“여기 있는 자들이 전부 죽어나간다면 그 또한 종말을 향한 진전이 될 테니까!”
“···”
-기분 나쁜 주문쟁이 같으니·
악마가 중얼거렸다· 키타렌아눔은 이 말에도 동의했다·
“괴물이다!”
“!”
‘벌써?’
앞서서 정찰하던 용병들의 소리에 자리에 있던 이들은 시선을 돌렸다·
놀랍게도 정말 덩치 큰 거미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이면 안 된다· 놈을 잡아라! 내 탈것으로 만들겠다!”
“비키기나 해라·”
키타렌아눔은 한쪽 팔을 뻗으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팔이 통째로 미리 준비했던 마법으로 변환되었다·
변환 마법의 응용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이고 기괴한 활용법이었다·
마법을 미리 응축시켜서 팔의 형태로 갖고 다니다니·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고밀도로 응축된 마법은 고삐가 풀리자 즉시 사납게 퍼져나갔다·
어떤 차원의 괴물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지독한 속박의 마법·
바콴탈라나의 포박!
콱!
허공에 수십 겹의 그물과 사슬이 그림자처럼 생겨나더니 거미를 단단히 묶었다· 용병들이 숨을 헉 들이쉬었다·
“뭐야 잡았나? 대단한데?”
거인 혼혈 전사가 감탄했지만 키타렌아눔은 웃지 못했다·
무언가 이상했던 것이다·
“너무··· 약한데·”
“뭐? 아·”
무슨 소린지 물어보려던 전사는 그대로 굳었다·
저 멀리 침식된 거미줄 수로 반대편에서 수십 마리로 늘어난 거미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마리가 아니었나!”
“그 사이 숫자를 늘린 거다· 조심해라!”
제국에서 버림 받은 잡놈들은 사납게 고함을 지르며 거미 군단과 격돌했다· 수로 뒤에서 수많은 거미들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 * *
“배그렉 교수님하고는 방학 때 같이 다니신다고요?”
“예· 교수님은 아주 귀중한 고객이시죠·”
탐사대에는 기사 순찰자 석공 연금술사는 물론이고 모험가들도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여기 <황무지 공작새> 파티 소속 모험가들은 볼라디 교수하고도 인연이 있었다·
무려 교수가 방학 때 종종 고용했던 이들이었던 것이다·
“혹시 학생들 시험 상대로 고용··· 아· 아니다· 어차피 없었겠군·”
“?”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통 어떤 의뢰를 하셨습니까?”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모험가들은 어색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약탈? 절도? 강도? 불법 결투? 현상금 사냥? 아니 왜 말할 때마다 놀라시는 겁니까?”
“오··· 오해하시는 겁니다·”
이한은 상대가 말할 때마다 깜짝 놀라자 오히려 더 무서웠다·
설마 다 한 건 아니겠지?
“잠깐· 앞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뭐? 여기 지하에?”
주변에 냉기를 불러와 일행의 호흡기를 보호하던 알시클은 멈칫했다·
다른 이들도 바로 눈빛이 바뀌었다·
“괴물이 아니면 불청객이겠군·”
“준비하겠습니다·”
즉시 전투태세로 들어간 일행은 전의를 불태웠다· 이한도 필요한 마법을 저장한 뒤 강화 마법을 시전했다·
“!”
멀리서 나타난 건 붕대로 기괴하게 얼굴을 가린 엘프였다· 얼핏 보이는 살갗에서 보이는 모독적인 문양에 알시클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부리를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엘프는 대뜸 입을 열었다·
“괴물을 만났군·”
“···?”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 자식이 감히 얕은 속임수를!’
에인로가드 학생으로서 저런 속임수에 당하다니·
아무리 일행이 많다 하더라도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한은 깊게 반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