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7화
좌중에 있던 귀족들은 방금보다 더욱 경악했다·
하이단까지는 그렇다 쳐도 크라하 부인까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귀족 중 한 명이 정신을 차리려고 뜨거운 차를 벌킥벌킥 들이킨 뒤(별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질문을 던졌다·
“크··· 크라하 님· 분명히 말씀하셨잖습니까· 고나달테스 각하께서 아무리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분이라 하더라도 이번에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으실 것이라고요·”
“너무하는군·”
해골 교장이 옆에서 짐짓 서운하다는 듯 말했지만 귀족들 중 어느 누구도 반응하지 않고 무시했다·
“그랬었죠·”
“그런데 어째서?!”
“그게··· 여기 워다나즈 군에게 워낙 신세를 많이 졌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어요·”
‘워다나즈 가문?’
귀족들은 그제야 해골 교장의 제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하이단과 크라하 부인의 발언 때문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렇지 원래 해골 교장이 제자를 소개하는 일은 그냥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에인로가드의 수많은 학생들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광기 번뜩이는 사실상 미래의 대마법사를 소개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더군다나 그 제자가 워다나즈 가문의 핏줄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귀족들은 방금 들은 정보를 소화하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워다나즈 가문이면···”
“작년에 구울의 왕을 토벌했다고 들었는데? 난 당연히 졸업생인 줄···”
“바실리스크나 씨 서펜트 토벌도 들었던 것 같은데 잠깐· 지금 2학년이면 작년에는 1학년이었단 소리잖습니까?”
해골 교장은 죽음의 기사들에게 재빨리 신호를 보냈다·
귀족들이 에인로가드의 사악한 비밀을 깨닫기 전에 빨리 화제를 돌리라는 신호였다·
“잠깐 이번에 드래곤들이 말한 사람이 분ㅁ···”
“드래곤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반응하는 귀족들 중에는 심지어 드래곤이 보낸 편지를 받은 가주도 있었다·
가주는 기억을 떠올리자 즉시 납득했다·
‘과연·’
하이단이나 크라하 부인 같은 뛰어난 계산가가 왜 저렇게 무르게 반응한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해골 교장의 제자라서가 아니었다·
물론 해골 교장의 제자라는 점도 충분히 대단하긴 했지만 사실 이건 멀리 해야 할 이유였지 가까이 할 이유는 아니었다·
해골 교장이나 그 제자나 가까이 지내서 좋을 게 정말 드물었던 것이다·
가까이 지내봤자 이런 일 생기면 물자나 약탈당하고 강제로 기부금이나 낼 뿐·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서는 거리를 두는 게 맞았다·
하지만 용과 계약한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 오랜 기간 동안 나오지 않았던 계약자라면 아무리 해골 교장의 제자라 하더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호의를 베풀 이유가 됬다·
‘역시 둘 다 보통이 아니군·’
“저도 제자 분의 부탁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도 그렇게 하겠소·”
워다나즈 가문의 막내에 대한 소문을 여럿 듣고 투자할 생각을 가진 귀족이나 혹은 드래곤들이 보낸 편지를 받은 가주들 아니면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고 눈치껏 돌아선 자들이 차례대로 동조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도 아직 꽤 남아있었다·
소문에 어둡거나 욕심이 많은 귀족들 혹은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금화 대신 버두스 교수를 받아내고 싶은 귀족들은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매달렸다·
“크라하 님·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십시오· 신세를 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거액을 미뤄주시는 건···”
‘어리석군· 크라하 부인께서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에 그랬을까·’
눈치 빠른 귀족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전적으로 그런 이유 때문이 맞았지만 귀족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신세를 진 게 아니라 가이난도가 신세를 졌답니다·”
“자제분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요?”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크라하 부인의 설명에도 귀족들은 잘 납득하지 못했다·
마법학교에 들어가서 다른 친구에게 신세질 게 그리 있겠는가·
식사나 청소는 노예나 하인들이 해줄 것이고 마법도 교수가 가르쳐줄텐데·
납득 안 되는 설명을 하는 건 하이단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의 변화를 생각해보면 전혀 아쉽지 않습니다· 달카드 가문의 금화를 몇 배로 투자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입니다·”
“?!?!?!”
귀족들은 혹시 해골 교장의 제자가 2학년이 아니라 교수인가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작년에 했던 일들도 그렇고···
“워다나즈 군이 부탁하는 거라면 이번 크라하 가문의 채무는 그냥 지워줄 수도 있답니다·”
크라하 부인은 애정을 듬뿍 담아 말했다·
가이난도를 위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해준 일들을 정리해보면 사실 그보다 몇십배는 더 투자해줄 수 있었다·
“그게 정말인가?!”
해골 교장이 놀라서 외쳤다·
마찬가지로 놀라워하던 죽음의 기사들은 그제야 주인의 후계자가 관료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냥 가서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겠구나!
‘내가 믿음이 부족했군!’
‘저게 진정한 마법일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이한은 거절했다·
“아니··· 그건 좀 죄송하죠· 연장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잠깐 이리와봐라·”
해골 교장은 기뻐하려다가 정색했다· 즉시 제자를 데리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왜 이러는 거냐? 혹시 발드로가드 놈들이 남몰래 초대라도 했느냐?”
“예? 발드로가드로 전학도 가능합니까?”
이한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질문했다· 데스 나이트가 대신 대답했다·
-학생이 아니라 교수로 제안 받은 거냐고 하신 겁니다·
“조용히! 부인께서 호의를 베푸시는데 너는 왜 그걸 거절하느냐? 그 또한 무례인 것을!”
“그야 가이난도의 재산이기도 한데 그냥 날리면 안 되죠·”
“···”
죽음의 기사들은 소리 안 나게 박수를 쳤다· 우정에 감동한 것이다·
물론 해골 교장 입장에서는 복장 터지는 소리일 뿐이었다·
“크라하 가문의 금고를 생각해보면 티 하나 나지 않을 금액인데····!”
“그냥 가이난도를 잘 대해주시고 부인에게 따로 부탁드리시는 건 안 됩니까?”
“그건 신성한 에인로가드의 교칙에 어굿나는 짓이지·”
해골 교장은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이한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던졌다·
본인은 평등 때문이라지만 그냥 학생들을 괴롭히고 싶어서 아닌가 의심이 됐던 것이다·
“어쨌든 전 말씀하신 건 해냈습니다· 무기한 연장도 충분히 좋은 것 아닙니까?”
해골 교장은 대답 대신 고대 언어로 투덜거렸다· 미친 분신 밑에서 배운 덕분에 이한은 그 말들 중 ‘제자 키워봤자 쓸모없다’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럼 마저 설득하고 오겠습니다···”
“?”
해골 교장은 제자의 말을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마저 설득한다니?
물론 지금 남아서 고집을 피우는 귀족들이 있긴 했지만 이들은 따로 설득할 수있지 않았다·
그냥 현재 찬성하는 귀족들의 숫자로 밀어붙여서 납득시킬 줄 알았는데···
기사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의아해했다·
-어떻게 설득하려는 거지?
-버두스 교수를 넘기려는 거 아니오?
-설마··· 하지만 정말로 그런 계획이라면 조금 보고 싶을 것 같기도·
“여러분· 교장 선생님께서 무리한 부탁을 하셨는데 저도 그냥 부탁드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
이한의 말에 귀족들은 술렁거렸다·
“그냥 부탁해도 되는데···”
“조용히 하세요· 크라하 님·”
요아넨은 크라하 부인의 입을 막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면?”
“실은 제가 우연히 고대의 언데드를 만나서 여러 가문들의 실전된 옛 묘지 위치를 전해 들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알려드릴 테니 너그럽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수 있···”
“잠깐 이리 와봐라·”
해골 교장은 다시 정색했다· 깜짝 놀란 귀족들은 말을 마저 들으려 했지만 해골 교장이 한 발 더 빨랐다·
“방금 무슨 소리냐 대체? 실전된 옛 묘지 위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시종장 님이 적어주셨는데요·”
‘인타렌달스!’
범인을 깨달은 해골 교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삼왕국 시절 시종장은 명예욕의 사념체에게 한 번 충성을 바친 뒤부터 해골 교장의 속을 뒤집는 데에 탁월한 재주를 선보이고 있었다·
차라리 먼 과거에 받아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해골 교장은 입을 열었다·
“제자야· 흑시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 자기 선조의 고묘(古墓)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과연 그걸 돌볼 권리가 있는가? 이런 생각 말이다·”
“안 해봤는데요·”
“그 안에 든 고대의 사악한 유물들··· 이런 유물들을 책임지고 통제하는 것이 마법사의 책임 아닌가? 이런 생각은?”
“그건 그냥 같이 들어갈 때 참고인으로 같이 가시면 되잖습니까·”
“···”
제자가 똑똑하면 스승의 속을 뒤집는 경우가 많았다·
제자가 똑똑하고 선량하기까지 하면 두 배로 그랬다·
이한은 솔직히 말했다·
“사실 시종장 님이 따로 적어주신 게 있어서 말씀 못 드렸습니다·”
인타렌달스는 미친 분신의 책을 넘기면서 공방 안에 남은 시약이나 아이템들은 따로 정리해서 이한에게 넘겼다·
그 중에는 직접 적은 쪽지도 있었다·
제자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여러 가문의 옛 무덤이나 달카드 가문의 옛 무덤(시종장은 이건 그냥 가져가서 써도 된다고 허락했다) 등등·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각 가문의 후예들에게 돌려줄지언정 에인로가드의 영주에게는 절대 넘겨주지 마십시오···
“···”
해골 교장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기사들에게 물었다·
“내가 인타렌달스한테 그렇게 가혹하게 대했느냐? 대륙 정복을 거절한 게 이렇게 세상 끝날 때까지 보복할 일이란 말이냐?”
-저 저희는 잘···
죽음의 기사들은 시선을 피했다·
이건 정말로 그들이 뭐라고 첨언할 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 * *
원추리 마탑을 이끄는 마탑주이자 대마법사 을랑담은 해골 교장의 방문 요청에 눈을 가늘게 떴다·
“고나달테스 공께서 무슨 이유로 오시는 겁니까?”
“혹시 저번의 무례에 대해 사과하시려는 걸까요?”
사념체 유폐를 위해 원추리 마탑의 마법사들이 에인로가드 영지까지 방문했는데 갑자기 꺼지라고 화를 내며 쫓아낸 것이다·
대마법을 위해 다급히 혹독한 훈련을 끝낸 마법사들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처우였다·
그런데 해골 교장이 제자를 데리고 방문한다니 혹시 사과하려는 건가 싶었다·
“각하께서 그러실 리 있나·”
입고 있는 옷만 제외하면 시골의 촌로(村老)처럼 보이는 을랑담은 얼굴에 패인 주름을 더욱 깊게 잡으며 길쭉한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대마법사답게 을랑담은 휘하 마법사들과는 달리 냉정하게 추측했다·
“아마 빚진 걸 늦추시려는 거겠지· 마법사들은 언제나 쪼들리니 말이야·”
사실 미치광이들은 에인로가드에만 있지 않았다·
마탑의 마법사들도 미치광이들이 많았고 덕분에 늘 예산에 허덕였다·
다만 에인로가드가 그 규모가 압도적으로 클 뿐!
“감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모욕을 주시고 그러실 수는 없습니다!”
“맞는 말이야·”
을랑담은 연기를 뻐끔거렸다· 탁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늙은 대마법사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아무 계략 없이 오실 분은 아닌데 무슨 생각이신지 궁금하긴 하군·”
“제자분하고 같이 방문한다고 하셨는데··· 혹시 킴 교수 때 했던 방법을 다시 쓰려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자리에 있던 마법사들의 안색이 모두 변했다·
가르시아 교수 사건은 모두에게 아픈 기억이었다·
모두 해골 교장의 언변에 넘어가 ‘저 마법사가 우리 마탑에 올지도 몰라!’ 하며 미친놈처럼 퍼줬던 것이다·
“···설마· 각하께서 그런 방법을 두 번 쓰시겠나· 우리를 머저리로 아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런데 제자분이 뛰어난 마법사라고는 하던데요·”
“그만· 조용히 하게· 아예 듣고 싶지도 않으니·”
“죄 죄송합니다·”
을랑담의 경고에 마법사는 고개를 숙였다·
잠깐의 침묵·
고민하던 대마법사는 슬며시 물었다·
“얼마나 뛰어난 마법사지?”
‘···우리는 머저리가 맞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