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6화
“아니· 이런 편지를 돌리면 어떡한단 말입니까? 널리 알려봤자 사악한 놈들만 전하 근처에 꼬일 겁니다·”
“조우린 전하는 밖에잘안 나가시니 그건 괜찮다· 그리고 ‘널리’까지는 아니지·”
안 그래도 채무 삭제 때문에 행복해진 해골 교장이었다·
그 상태에서 제자가 펄펄 뛰는 걸 보니 조금 더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가문의 가주들 아니고서는 편지를 받지도 못했을 테니까· 황궁의 관료들이야 침묵 서약이 되어 있으니 퍼져나가진 않을 테고·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군·’
귀족 가문 가주들이 알고 관료들이 알면 이미 충분히 신경이 쓰였다·
그쯤 되면 이한이 가는 곳마다 ‘앗! 너는 이번에 새로 용과 계약한 그 마법사 아닌가!’하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숫자였다·
계약하지 않은 용들도 계약자를 지켜준다는 건 감동적이었지만 그보다는···
‘···앞으로 나쁜 일을 할 때에는 꼭 변장하고 가명을 써야겠다·’
스테달 나고의 신분을 앞으로도 계속 쓰게 될 것 같은 예감을 느끼며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주인님께서는 그것까지 계산하신 겁니까? 새로이 나타난 용의 계약자를 감히 관료들이 매몰차게 대하지 못할 거란 걸···
“훗· 이유 중 하나였을 뿐이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신나서 환호하는 죽음의 기사들과 해골 교장의 모습에 이한은 툴툴댔다·
남은 심란한데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뒤에서 한대 치고 싶었다·
* * *
달카드 가문 소속이자 아산의 손윗누이인 하이단은 현재 제국 수도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제국의 여러 귀족 가문에서 찾아온 손님들 때문이었다·
“아무리 고나달테스 공께서 제국을 위해 헌신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과하셨소·”
“맞습니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정확히는 제국의 여러 귀족 가문에서 찾아온 피해자들에 가깝긴 했다·
해골 교장의 폭거에 보물들을 강탈당한 가문들이 서로 힘을 모아 피해액을 정확히 산출하고 청구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각 가문들을 대표해서 찾아온 만큼 그 신분들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몇몇 가문들은 아예 가주가 찾아왔을 정도였다·
이런 만큼 하이단도 동부에서 직접 수도로 올라올 수 밖에 없었다·
“하이단 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달카드 가문도 이번에 피해를 입었으니 부디 엄정히 처리해주십시오·”
여러 귀족들은 하이단에게 기대 섞인 눈빛을 보냈다·
달카드 가문 출신의 하이단은 동부의 청동 드워프 은행 소속으로서 그 까다로운 드워프들에게 인정받은 수재였다·
그런 하이단이라면 이번에 해골 교장에게 입은 피해액을 냉정하고 정확하게 계산해낼 수있으리라·
워낙 갑작스럽게 뜯긴 만큼 각 가문들은 정확히 얼마를 청구해야 할지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하이단 님의 동생 분께서 에인로가드 소속 아니신가?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닐텐데···”
가문의 대변인으로 참가한 귀족 한 명이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시했다·
에인로가드에서 수학하는 가족을 둔 사람이라면 해골 교장의 편을 들지도 몰랐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은 오히려 의문을 제시한 사람을 타박했다·
“말씀 조심하십시오· 하이단 님은 가족이라 하더라도 절대 사정을 봐주실 분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달카드 가문 소속의 다이할 님께서 청동 드워프 은행을 찾아갔을 때 하이단 님께서는 얼굴도 보지 않고 쫓아냈습니다· 가족이라 하더라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비정하게 잘라내실 겁니다·”
약간 욕처럼 들렸지만 하이단은 오히려 뿌듯해했다·
다이할과 하이단 이 두 쌍둥이들은 언제나 냉정과 이성의 추구자였다·
둘에게 가문과 혈육의 정으로 일을 그르치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하이단이 다이할의 부탁을 거절했지만 다이할은 조금도 불쾌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수락했다면 하이단을 경멸했을지도 몰랐다·
“칭찬에 감사드리겠습니다·”
“참· 동생분인 아산 님도 꽤 훌륭한 마법사의 자질을 갖고 계시더군요·”
“아직 멀었습니다· 친구의 절반이라도 닮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실로 겸손하시군·’
하이단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주변 귀족들은 단순히 겸양의 뜻으로 알아들었다·
에인로가드에 입학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는데 아산은 그 중에서도 꽤 높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하이단이 학년 수석 친구와 비교하고 있다고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면 각자 대여해주신 보물들과 시약들의 목록을 제출해주십시오· 피해액을 산출해보겠습니다·”
하이단이 여러 귀족들에게 목록을 받는 동안 요아넨은 귀찮아 죽겠다는 듯이 크라하 부인에게 속삭였다·
가이난도의 어머니인 크라하 부인은 본인의 동생이 메이킨 가문 출신과 결혼한 만큼 요아넨과 친분이 있었다·
“이걸 왜 저희가 해야 하는 거지요?”
“요아넨· 너무 불평하지 마세요· 누군가는 맡아서 해야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각 가문이 강탈당한 물건들의 목록을 제시하고 그 가격을 정하는 일은 사실 그렇게 높은 지능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실무는 달카드 가문에서 나온 사람이 다 맡아서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책임이 필요 없는 일은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서로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리는만큼 사실상의 전권이 필요했다·
가주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문의 직계 정도는 와야 결정이 쉬운 것이다·
크라하 부인은 우아한 태도로 말했다·
“메이킨 가문도 패 귀한 보물들을 여럿 빌려줬다고 들었습니다·”
“어차피 제 보물 아니라서 상관없네요·”
요아넨은 시큰둥했다·
가문에 대한 소속감이 강한 귀족이면 모를까 높은 경지의 마법사가 가문의 자존심에 집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가문의 보물이 해골 교장한테 털리든 말든 자신이 내일 쓸 공방의 시약 관리가 휠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보다 크라하 님은 고나달테스 님에게 관대하셨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요?”
요아넨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제국에서 부(富)를 이야기하면 언제나 언급되는 크라하 가문을 이끄는 이 부인은 예전부터 에인로가드의 가장 관대한 후원자였다·
예전에 요아넨은 해골 교장이 크라하 가문을 모욕한 귀족 한 명을 개구리로 만들어서 늪 깊숙이 처박아버리는 것도 본 적 있었다· 어지간한 기부금 없이는 그런 애정이 오지 않았다·
“맞습니다· 하지만 고나달테스 님께서는 분명히 갚겠다고 하시고 빌려가셨지요·”
크라하 부인은 딱 선을 그었다
제국을 위한 헌신 때문에 꾸준히 해골 교장에게 후원금을 보냈지만(크라하 부인은 아직도 가이난도 입학에 후원금 영향이 있는 게 아닌가 조금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괴팍한 행동을 다 편들어줄 만큼 부인이 호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받아가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이건 제 계산이긴 한데 고나달테스 님이 제 때 못 갚을 것 같거든요·”
뛰어난 연금술사답게 요아넨은 날카로운 예측을 선보였다·
에인로가드의 미치광이들이 한 해에 물쓰듯 낭비하는 금화·
거기에 제국에서 지원하는 금화와 곳곳에서 후원받는 금화를 대충 계산해보면···
···해골 교장의 금고는 절대 넉넉할 수가 없었다· 이번 사태처럼 예상외의 과격한 지출은 특히 치명적이었다·
“그것 또한 고나달테스 님께서 감안하고 하신 일이겠지요· 요아넨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랍니다· 어떤 대책이든 준비하셔서 올 테니까요·”
“···오래 머물러야 할까봐 그렇죠···”
요아넨은 답답함이 담긴 한숨을 열게 내쉬었다·
부인의 말대로 분명 해골 교장은 이런저런 대책을 갖고 올 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당장 옆에 있는 크라하 부인도 그렇고 저 달카드 가문의 피도눈물도없는금화회수자도 그렇고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해골 교장이 관대하게 퍼주는 사람도 아닌 만큼 협상은 지루하게 밀고당길 가능성이 높았다·
이 무슨 시간 낭비란 말인가·
‘에인로가드가 방학이었다면 요네르한테 부탁했을 텐데·’
요아넨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메이킨 가문에서 요네르를 믿어준다 하더라도 이런 일에 가장 어린 동생을 보내지는 않았던 것이다·
‘고나달테스 님이 부디 쓸만한 대책을 갖고 오기를···’
“다들 안녕한가!”
“!”
넓은 홀에 모여 있던 귀족들은 유쾌한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인간 형태의 해골 교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몇몇 귀족은 그 모습에 희망 섞인 표정을 지었다·
“각하께서 저러시는 길 보니 긍정적인 징조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보상을 확보하신 모양입니다!”
평소의 해골 교장은 언제나 기분이 적당히 나쁜 상태였다·
게다가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욱 더 나빠도 이상하지않았다· 그런데 저런 유쾌한 태도라니·
그럴 만한 일이 있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말이 안 되는데···”
“소문을 듣자하니 관료들한테도 금화를 빌려갔다고 하더군요· 목이 잘리면 잘렸지 설득될 이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회의적인 귀족들도 있었다·
다들 각자 수군거리는 사이 해골 교장이 입을 열었다·
“다들 이번에 있었던 사념체 봉인에 힘을 빌려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지·”
“···”
“예··· 뭐···”
자리에 있던 귀족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해골 교장이 찾아와서 지팡이 들고 협박한 것에 가까웠지만 이미 다 지나간 일 아닌가·
귀족들 입장에서도 자의적으로 나섰다는 표현이 더 듣기 좋았다·
“빌려 가신 물품들에 대해 보상은 준비되었습니까?”
해골 교장이 유쾌하거나 불쾌하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하이단이 입을 열었다·
언제나 대대로 자신을 괴롭혀 온 달카드 가문의 핏줄이 화살을 조준해오자 해골 교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상· 보상 말이지···”
“저는 고나달테스 님을 믿고 있답니다·”
크라하 부인까지 가세하자 해골 교장은 더더욱 압도되었다·
“물론 자네들이 나한테 조금의 불만이 있다는 건 알고있네·”
‘조금?’
귀족들은 속으로 움찔했지만 입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상대는 채무자였지만 동시에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대마법사였으니까·
괜히 말꼬리 잡고 시비 걸었다가는 제국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었다·
“내가 자네들을 실망시킨 적이 한두번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고나달테스 각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버두스 그 작자만 내놓으면 어떤 대가도 성(城) 한 채도 기꺼이 지불할 수 있···”
가주 중 한 명이 이를 갈며 말했지만 해골 교장은 못 들은 척했다·
정말 안타깝지만 저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여기 내 제자의 부탁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지 않을까? 응?”
다시 문이 열리더니 죽음의 기사들이 제자를 데리고 우르르 들어왔다·
짠!
이한은 스승이 창피해 죽겠다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심지어 좌중에는 아는 얼굴들도 몇 있어서 더더욱 괴로웠다·
“여기 내 제자의 얼굴을 봐서라도 자비를 베풀어줄 수 없겠나?”
귀족 중 한 명이 황당해했다·
“각하··· 각하의 제자 분이 부탁한다고 들어줄 리 없지 않습니까? 저희를 우롱하시는 겁니까?”
당연한 의문이었다·
해골 교장이 빌어도 들어줄까 말까인데 제자가 부탁한다고 들어준다니·
비슷한 생각을 한 다른 귀족들도 하이단을 쳐다보았다·
달카드 가문의 핏줄이 그 명성에 걸맞게 따끔하게 지적해주리라!
“제자 분의 부탁이라면 알겠습니다· 납득이 가는군요·”
“????!??!?!”
자리에 있던 귀족들은 뒤로 쓰러질 뻔했다
혹시 저기 있는 게 하이단이 아니라 하이단으로 변장한 에인로가드의 교수인가?
믿었던 기둥이 무너지자 귀족들은 본능적으로 크라하 부인을 쳐다보았다·
지금 믿을 사람은 크라하 가문을 이끄는 이 부인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라하 부인은 미안한 표정으로(베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표정이 보이진 않았다) 말했다·
“이거 어쩌죠? 저도 제자 분이 하는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 밖에 없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