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5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즉시 수락하는 마법사의 모습에 우만은 깊이 감동했다·
역시 위대한 손윗누이 조우린이 크게 칭찬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실로 훌륭한 마법사로다· 필시 대의가 무엇인지 잘 알고있음이 분명해·’
우드득!
격한 감정 때문에 우만의 머리가 원래 형태 칠흑색 비늘을 가진 드래곤의 머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아차· 이런 실수를!”
우만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인간 형태로 폴리모프했지만 천장에는 벌써 흠집이 난 상태였다·
그 모습에 우만은 깊이 슬퍼했다·
“우만은 아직도 멀었군! 정신의 수양이 이렇게 부족하다니!”
“아 아니· 실수로 변신 풀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네는 너그러운 마음까지 가지고 있군· 고나달테스 공의 제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일세!”
이한은 슬슬 해골 교장과 눈앞의 드래곤이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제국에는 해골 교장과 사이좋은 인물이 오히려 드물었으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오히려 신뢰가 간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해골 교장과 사이가 안 좋다는 점은 오히려 장점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꼭 막대한 황금을 받아서가 아니라 말하는 것만 봐도 우만은 불의와 타협하길 싫어하는 정의로운 성격의 드래곤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해골 교장과 사이가 안 좋다는 점은 그저 장점일 뿐·
“그럼 우만은 이만 가보겠네· 누님을 잘 부탁하네! 다른 용족들도 자네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다네!”
“···예···”
이미 조우린과 계약했을 때부터 들어서 알고 있긴 했지만 다른 드래곤의 입으로 다시 들으니 새삼 압박이 됐다·
한 드래곤과 계약한 계약자는 다른 드래곤들에게도 다 소식이 전해지는 것이다·
이한은 부디 다른 드래곤들이 게으름을 피우다 이 사실도 잊어버리길 기도했다·
‘드래곤들의 성격을 보면 가능성 있다· ···내가 먼저 늙어죽을 수도 있긴 하지만·’
“참! 혹시 마법사를 묶어놓는 방법에 대해 추천해줄 게 있나?”
성큼성큼 걸어가려던 우만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물었다·
“마법사를 묶어놓는 방법 말입니까?”
“그렇다네· 실은 누님께서 부탁을 하셨거든!”
우만이 지금 서두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조우린이 직접 한 부탁이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를 꽁꽁 묶어놓을 방법을 준비해달라고!
우만 본인도 드래곤인 만큼 마법에 대해 조예가 깊었지만 마법사를 묶어놓는 방법에 대해서라면 어쩌면 마법사 본인이 더 잘 알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에인로가드의 학생이자 그 해골 교장의 제자 아닌가·
‘교장 선생님을 공격하려는 건가?’
이한은 의아해했다·
조우린은 딱히 외부 활동을 활발히 하지 않는 만큼 공격할 마법사도 별로 없었다·
착한 조우린의 성격이라면 명예욕의 분신을 승천시킨 해골 교장의 악행에 분노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한은 살짝 감동했다·
‘선물 예산 늘려야겠군·’
“제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햄스터로 변신시키는 거지만 아무래도 그건 좀 너무 어렵지요· 순수한 마력 충격에 대한 대비는 하셨습니까?”
“마력 충격? 듣고 싶군· 고견을 들려주게!”
이한은 최선을 다해 조언했다·
생각보다 많은 마법사들이 ‘무식하게 마력을 휘둘러서 마법째로 으깨버리는 놈이 제국에 어딨겠어 하하 마력이 썩어나는 것도 아니고’같은 안일한 생각을 했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해골 교장 같은 대마법사라면 손가락 하나 튕기는 것만으로도 다른 곳에 저장된 막대한 양의 마력을 불러올 수 있을 터·
기껏 촘촘하게 준비한 마법들이 형편없이 찢겨나가는 것보다는 미리 대비하는 게 맞았다·
“···과연! 홀륭하군· 이 우만 하나 배웠네! 이것도 같이 대비해서 누님께 바쳐야겠어!”
“전하께서 기뻐하시겠습니다· 하하·”
우만이 뛸듯이 기뻐하자 이한도 뿌듯함을 느꼈다·
조우린의 계약자로서 미약하나마 도움이 된 것이다·
* * *
해골 교장은 감정 표현이 풍부한 마법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 감정 표현이 풍부해질 때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제자가 관료들을 쓸어버리고 올 때였다·
“다들 듣도록 ㅎ···”
이한은 재빨리 해골 교장을 끌어당겼다·
저번처럼 카페 전체에 ‘제국 관료들을 쓸어버린 이 녀석이 내 제자다!’라고 외치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창피하시지도 않으십니까!”
“창피 같은 소리 하고 있군· 내게 창피함이 있다면 감히 그런 허섭스레기 같은 연구주제를 싸들고 관료들을 찾아갈 수 있겠느냐?”
해골 교장의 말에 이한은 말문이 막혔다· 너무나도 맞는 말이었던 것이다
‘하긴 그건 그래·’
“하지만 네가 원하니 조용히 넘어가도록 하지·”
해골 교장은 작년 이후로 보여준 적 없던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제자가 에인로가드에 불을 질러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애의 눈빛이었다·
‘··고대 시절에서나 봤었던 것 같은데·’
“훌륭하다! 물론 당연히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예?”
이한은 황당해했다·
당연히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니·
저게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장 우만이 오지 않았다면 대신 지불을 떠나 유예도 힘들었을 것 아닌가·
“···아예 채무를 지워버리고 올 줄이야· 나날이 그 기술이 느는구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차를 지키고 있던 죽음의 기사 중 한명이 의문을 제시했다·
-물론 제자 님께서 대악마도 속일 화술의 소유자라는건 알고 있습니다·
“예??”
이한은 더욱 황당해했다·
-하지만 제국의 관료들은 대악마 수백 마리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한 구두쇠 아닙니까? 그런 자들이 지불을 유예해준 것도 아니라 아예 지워버리다니요?
기사들의 의문은 타당했다·
그들도 이한이 설득에 성공하리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채무를 지워버리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제국 동화 한 푼도 두툼한 보고서 없이는 내주지 않는 그 비열하고 잔인무도한 작자들이 이렇게 선뜻?
“제자의 설득이 경지에 오른 거지·”
그러나 모처럼 기분이 좋아진 해골 교장은 부하들의 의문을 간과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봐라· 박쥐나즈 녀석이 사념체를 설득해서 소세계까지 배울 거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겠느냐?”
“저 옆에 있습니다·”
이한이 투덜댔지만 해골 교장은 무시했다· 죽음의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니 초인의 행적은 범인의 사고방식으로는 감히 예측하기도 어려운 법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후계자는 여러 면에서 초인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실로 특출난 능력은 바로 화술·
어느 누가 명예욕의 분신과 사제 관계를 맺고 소세계까지 전수받았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맞는 말씀이야· 부끄럽군· 내가 제자님을 얕봤어·
-하지만 어떻게 설득하신 거지? 관료들을 쓰러뜨리는 소세계라도 만드신 건가?
-채무 삭제에 관한 언령 마법을 익히신 걸지도···
기사들이 어떻게 채무를 삭제했는지 수군거리는 동안 해골 교장은 뒤늦게 기억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참· 조우린 전하 말인데·”
“···예!”
“왜 놀라지?”
혹시 그 사이 또 탈주하셨나 싶었습니다·
이한은 재빨리 둘러댔다· 다행히 해골 교장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하께서 그렇게 자주 나가시진 않는다니까··· 여하튼 네가 전하와 계약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
“!!!”
생각해보니 실바스도 우만의 등장에 놀랐지 이한이 조우린과 계약했다는 사실에 놀라지는 않았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았다면 믿기 힘든 반응이었다·
“귀족들도 알만한 놈들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괜한 부탁 받지 않도록 주의해라· 잘못하면 귀찮아질 수 있다·”
현재 제국 귀족들은 황족을 지지하는 충성파들과 대립하는 귀족파들로 나뉜 상태였다·
그 충성파 파벌 안을 살퍼보면 각자 황제의 후계자로 지지하는 황족들에 따라 또 한 번 세력이 잘게 나뉘었지만 이런 이들을 한 데 묶는 건 물론이고 귀족파들까지 끌어들
일 수 있는 충격적인 방법이 있었다·
바로 황제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 받은 아홉 순혈 자식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후계자의 능력에 대해 회의적인 귀족파나 중립파 세력도 아홉 순혈 자식 중 단 한 명이라도 진지하게 ‘내가 황제 후계자 하겠다’고 나선다면 전향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만큼 능력치가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그럴 분이 있다면 진작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당장 폐하께서도 빨리 후계자 찾아서 넘기고 싶어하시는 것 같았는데···”
“그랬지· 애초에 드래곤은 황제에 어울리는 종족이 아니니·”
지금 황제만 봐도 알 수있듯이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개인주의적인 경향성이 매우 강한 편이었다·
그런 종족에게 거대한 땅덩어리와 그 위를 살아가는 수많은 종족을 책임지라고 해봤자 와닿을 리 없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맹세였다·
“귀족들 중에는 널 설득해서 조우린 전하를 끌어들여보려는 놈들도 있을 거다· 물론 전하께서 황제 자리에 앉는 것도 재밌긴 하겠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이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한 드래곤이 고통 받아야 한다면 황제가 고통 받는 게 맞았지 아직 어린 조우린이 고통 받는 건 맞지 않았다·
‘음· 너무 비열한 발상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한은 조우린의 계약자지 황제의 계약자가 아니었으니까·
“잠깐· 그보다 소문이 왜 난 겁니까? 혹시···”
이한이 범인을 찾는 눈빛으로 기사들을 쳐다보자 데스 나이트들은 깜짝 놀라 팔을 휘저었다·
-저 아닙니다!
-명예로운 기사로서 그렇게 입이 가벼울 리가 있겠나!
-믿어주십시오!
“기사들이 낸 게 아니다·”
“?”
해골 교장의 말에 이한은 기사들을 쳐다보던 걸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누가?
“드래곤들이 냈다· 정확히는 낸 게 아니라 편지를 보냈지·”
“????”
“직접 보는 게 이해가 빠르겠군·”
해골 교장은 편지를 하나 꺼내 던졌다· 고풍스러운 양피지로 되어 있는 편지에는 이한이 모르는 문자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바뀌어라·”
교장이 선언하자 편지의 내용이 표준 제국 문자로 바뀌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메이킨 가문께 삼가 알리고자 합니다· 이번에 새로운 용의 계약자가 나타났습니다··· 계약자에 관해 고발할 내용이 있다면 밑의 인장 위로 세 개의 선을 긋고 글을 적어주
시길 바랍니다·· 혹시라도 계약자를 위협하거나 다치게 할 경우 그 시첨에서 의욕이 남아 있는 용들의 보복을 받게 될 점이라는 것을 미리 경고 드리겠습니다···
“참 친절하지?”
“···이게 뭡니까?!”
이한은 경악해서 편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메이킨 가문에 온 걸 보니 적어도 대귀족 가문에는 다 온 것 같았다·
죽음의 기사가 친절하게 부연설명을 했다·
-옛날에는 종족 차이 때문에 쓸데없는 유혈이 많았습니다· 제자 님·
평범한 사람이 드래곤의 문화를 알기는 힘든 법이었다·
누군가 드래곤과 계약한 사람을 겁없이 건드렸다가 보복으로 주변이 초토화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드래곤들은 조금 더 친절하게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제국에서 일정 수준 되는 세력에게 미리 경고를 보내놓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같이 휘말려서 쓸려나가기 싫은 자들은 알아서 문제를 막아주게 되어 있었다·
-다른 종족과의 차이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드래곤의 지혜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안 느껴지는데요·”
-?!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제자의 시큰둥한 반응에 죽음의 기사들은 당황했다·
어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