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화
“거칠게 협박하지 않은 채권자들은 없습니까?”
“부드럽게 협박한 놈들도 몇 있긴 하지·”
“···협박하지 않은 채권자들은 없습니까?”
해골 교장은 그 말에 천천히 어깨를 으쏙했다·
“마법은 많이 늘었는데 여전히 멍청한 질문을 하는구나· 그 상황에서 어느 누가 순순히 황금을 내놓고 협조하겠느냐·”
제국의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무리 해골 교장이 황제의 마령관이자 제국을 지키는 마도방벽의 수호자라 하더라도 그냥 황금을 바치진 않았다·
특히 에인로가드 영지에 해골 교장의 사념체가 나타났는데 이 사념체를 역소환시키는 대신 영원히 차원에 유폐시키려 한다는 목적은 호응을 사기 힘들었다·
차라리 버두스 교수의 새로운 아티팩트에 투자하려는 사람을 찾기가 쉬웠지···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사실이다· 비블레는 그 품성과 별개로 제국에서 명성이 드높은 아티팩트 장인이니까· 걸작을 원하는 사람에게 장인의 인성이 괴팍한들 무슨 상관이겠느냐· 오히려 그 가치를 더 높이면 높였지·”
“큭! 이 멍청한 사람들 같으니!”
제자가 제국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분노하자 해골 교장은 모처럼 흡족해했다·
뛰어난 마법사라면 누구나 제국 사람들에게 의분을 가지게 마련·
지금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마땅히 거쳐야 하는 길을 지나오고 있는 셈이었다·
“제가 활자를 만들어 책을 뿌리겠습니다· 버두스 교수님에게 속지 말라고!”
“···그건 나중에 너 알아서 하고 일단은 채권자들부터 생각하자꾸나·”
“아· 그랬었죠·”
이한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흠· 귀족 가문들은 어떻게 안 되려나·’
학연(學緣)이란 말이 왜 있겠는가·
다행히 에인로가드에는 이한과 친분이 있는 여러 귀족 가문 출신 학생들이 있었다·
물론 이 가문들이 해골 교장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이한이어도 그랬을 것 같았다·
‘나였어도 그런 부탁은 거절했을 것 같긴 해·’
평소에도 수상하게 후원과 투자를 부탁하던 해골 교장이 날아와서 사념체 영구 유폐를 위해 금화 달라고 하면 이한도 꺼림칙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하려는 건 추가 금화 요청이 아니라 기간 연장 아닌가·
휠씬 더 설득할 만한 상황이었다·
···해골 교장이 거칠게 협박하긴 했지만···
“귀족 가문들을 설득하는 건 네 능력을 믿고 있다·”
“!”
해골 교장의 말에 이한은 둘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할 수있을까요?”
“하하·”
제자의 질문에 스승은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할 수 있냐 없냐가 아니라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네 선배들은 다음 학기 때 진흙과 돌멩이 나뭇가지만으로 마법 연구를 하게 될 테니까·”
이한은 어깨 위를 짓누르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
그리고는 멈칫했다·
“어 근데 다른 선배님은 왜 아무도···?”
원래 에인로가드에서 높은 학년에는 높은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왜 2학년인 이한한테만 이런 책임이?
해골 교장은 친절히 대답해줬다·
“유크벨티레를 불러올까 캐튼을 불러올까? 원하는 선배를 말해봐라· 필요하면 불러다주마·”
“···디레트 선배나 일레그 선배님은 그래도···”
비열하게 도움 안 되는 선배들만 말하는 해골 교장의 태도에 이한은 투덜댔다·
그러나 해골 교장은 고개를 저었다·
“둘은 선량한 성품 때문에 설득은 잘 맞지 않는다·”
“과연··· 잠깐만요·”
이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럼 난?
“그리고 둘은 이번 사태를 정리하는 데에 필요하지·”
“하긴 그렇겠군요· 교수님들도 다 바쁘실 테니·”
확실히 따지고 보니 부를 사람이 없긴 했다·
교수나 5학년들은 바쁘거나 도움이 되지 않았고 4학년 선배들은 지금 가장 바쁜 학년이었으니···
“귀족 가문들을 설득해보는 건 제가 한다 치고··· 관료들은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요?”
“관료들을 설득하는 건 네 능력을 믿고 있다·”
“···”
이한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러나 해골 교장은 진지했다·
“아무리 철혈의 잡놈들이라 하더라도 제국을 지탱할 어린 동량이 와서 부탁하는데 매몰차게 굴지는 않겠지·”
“···일단 알겠습니다·”
약간 어이없긴 했지만 이것도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당장 작년에도 관료들을 상대하는 건 이한이 맡지 않았던가·
기본적으로 제국의 관료들은 해골 교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에인로가드를 위해서라면 제국의 기둥뿌리도 서슴잖게 뽑아가는 대마법사를 어떻게 좋아하겠는가·
협박당한 적이 없더라도 보는 것만으로 거품 물고 쓰러지는 관료들이 여럿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이런 관료들도 학생들에게는 관대했다·
사악한 해골 교장과 달리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졸업 이후 제국 곳곳에서 활약하는 인재들이었던 것이다·
“귀족 가문들 설득··· 제가 하고 관료들 설득··· 제가 하는군요· 또 누구를 협박하셨습니까?”
“마탑하고 마법사 길드 몇 군데 정도 더 돌았던 것 같군· 일손이 필요했었거든·”
대마법은 단순히 황금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었다· 필요한 시약이 전부 준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생각보다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괜히 마법사들이 서로 모여서 마탑을 세우고 길드를 세워 절차탁마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모은 놈들은 따로 마법을 준비했다· 그 중에서도 실력 있는 자들은 선별해서 에인로가드에 데려왔고·”
“어· 본 적이 없는데요?”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었지· 분신하고 직접 대결시킬 이유가 없었으니까·”
“아하· 제가 쓰러져 있는 동안 돌아가신 모양이군요·”
“아주 틀린 셈은 아니다·”
죽음의 기사는 주인을 힐끔거렸다·
정확히는 싸움이 끝나고 나서 마법사들이 ‘왜 저희가 준비한 마법 안 씁니까?’하고 자꾸 캐묻자 해골 교장이 꺼지라고 쫓아낸 것에 가까웠던 것이다·
저걸 저렇게 포장하시다니?
“···잠깐· 틀린 셈은 아니라니· 뭔가 이상한데요· 말 안해주신 게 있는 거 아닙니까?”
‘역시 제자님이시다·’
기사는 속으로 흐믓해했다·
마법사란 원래 무질서한 혼란 속에서도 단서를 찾을 줄 알아야 하는 법!
* * *
제국 수도에 도착할 때쯤 되자 이한도 이번 사태에 관련된 채권자들의 정보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다·
먼저 제국 관료들·
해골 교장이 거칠게 협박한 덕분에 재무관과 휘하 관료들이 결국 금고를 열고 금화를 내주었다·
이들은 이한이 설득해야 했다·
그 다음은 여러 귀족 가문들·
해골 교장이 거칠게 협박한 덕분에 가주들이 결국 금고를 열고 필요한 시약을 내주었다·
이들도 이한이 설득해야 했다·
마지막으로는 제국 곳곳의 마탑과 마법사 길드들·
해골 교장이 거칠게 협박한 덕분에 하던 연구와 마법들을 멈추고 전부 나서주었다·
이들도 이한이 설득해야···
“···”
정리를 끝낸 이한은 해골 교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일 분배가 좀 이상하지 않나?’
셋 중 하나 정도는 해골 교장이 나서줘야 하지 않나 싶었다·
“왜 그러지?”
“마법사들은 교장 선생님이 설득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에인로가드 학생들에게나 공포와 포악의 영주였지 바깥 마법사들에게 해골 교장은 가장 존경 받는 대마법사였다·
지금 제국에서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이들 중 가장 지혜롭고 사악 아니 현명한 자·
이런 이들한테는 차라리 해골 교장이 접근해서 권위로 설득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말이냐?”
“옛날에 실전된 비전을 알려주시거나 진전이 없는 마법에 조언을 해주신다거나···”
“이미 예전에 다 사용한 방법이라서 안 통한다·”
“···”
해골 교장의 긴 역사만큼이나 사용한 수법들도 바닥이 난 상태였다·
이제 마탑이나 길드들도 대마법사의 현명한 조언에 존경심을 갖고 넘어가기에는 이골이 난 상태인 것이다·
“그보다는 뛰어난 마법사를 소개해주는 게 휠씬 유효하지· 예전에도 가르시아 교수를 데리고 간 적이 있다·”
해골 교장은 옛날 일을 떠올렸다·
적우(積雨) 마탑이나 원추리 마탑 녹휘석 마탑 등등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어린 가르시아 교수를 보자 사탕을 발견한 에인로가드 학생마냥 눈빛을 번뜩였었다·
전 학파를 수강하는 천재를 탐내지 않는다면 마탑의 마법사로서 자격이 없는 법·
-···각하! 부디 킴 학생이 졸업하면 저희 마탑에···! 강요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저희 적우 마탑에 대해 몇 마디 좋은 말씀만 해주십시오!
-고나달테스 공! 킴 학생을 저희 마탑에 보내주신다면 올해 제국에서 지원하는 금화를 전액 밀어드리겠습니다!
아련한 추억에 해골 교장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 때는 덕분에 참 넉넉하게 받아냈었는데 말이지···”
“···잠깐 가르시아 교수님은 에인로가드로 오셨잖습니까? 혹시 오시기 전에 다른 마탑을 도셨나요?”
“아니· 바로 왔지· 똑똑하니까·”
가르시아 교수는 순혈 에인로가드 마법사의 경로를 걸어 온 마법사였다·
에인로가드 입학 졸업 대신 5학년 진학 졸업 대신 교수 진급···
이한은 괜히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 다른 마탑 마법사 분들이 항의 안 하셨습니까?”
“항의야 했지· 그런데 어쩌겠느냐· 가르시아 교수가 선택했는데·”
해골 교장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대마법사라 하더라도 사람의 뜻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었다·
여러 마탑에서 호의를 사기 위해 선물을 보냈다지만 그건 그들이 선택했을 뿐·
실패했을 때 책임도 당연히 그들의 몫이었다·
“···”
이한이 경멸의 시선을 보냈지만 해골 교장은 무시하고 말했다·
“두 번째라 통할 거다· 내 생각에는 세 번까지도 통할걸·”
“제가 가르시아 교수님만큼 할 수 있을지 좀 걱정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교수님보다 많이 부족하잖습니까·”
-?
“?”
죽음의 기사들부터 해골 교장까지 다들 의아해했다·
지금 워다나즈 놈이 어린 가르시아 교수보다 많이 부족한 게 있나?
‘오만함?’
‘무례함인가? 하지만 이미 충분히 무례한데·’
“저는 트롤 혼혈이 아니라 근력이···”
“···그건 신경 쓰지 마라·”
제일 쓸데없는 부분을 걱정하는 제자의 모습에 해골 교장은 황당해했다·
마탑에 방문하는데 무슨 근력을···
“그럼 관료들부터 쓰러ㄸ··· 아니 설득하러 가자·”
성문을 통과한 해골 교장은 마부 노릇을 하는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이한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물었다·
“조우린 전하를 뵐 수 있을까요?”
“그건 안 된다·”
“아· 근신 중이신가 보군요·”
생각해보니 조우린은 황제와 해골 교장 둘을 모두 속이고 탈출한 전대미문의 업적을 세운 상태였다·
그런 만큼 자택에서 근신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닌데?”
“예?”
“근신은 무슨· 어차피 별 일 없으면 밖에 잘 나가지도 않는데· 페하의 순혈 자식들을 제국의 법률로 재단하지 마라·”
“그러면 왜 만나면 안 된다는 겁니까?”
“네가 찾아가면 방학 끝날 때까지 붙잡고 안 놓아줄 테니까·”
“···”
“어쩌면 방학 끝나고도 안 놓아줄 수 있지·”
“에이· 전하가 그렇게 못되게 고집 부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하· 드래곤 전문가 다 났군· 어쨌든 만날 거면 다 하고 만나라· 난 분명히 경고했다· 오른쪽으로 꺾도록· 앞이 막히는군·”
-차라리 날아서 가시겠습니까?
“아니· 이번 달은 겸손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지· 저번에 급하다고 성벽을 잘랐으니·
이한은 그 말에 무심코 마차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수도의 성벽 한 귀퉁이가 날카로운 칼로 자른 것마냥 직선으로 잘려나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로 궁금했지만 이한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견뎌냈다·
‘묻지 말자· 들어서 좋을 거 없다···’
이한은 관료들을 만나면 할 말을 다시 정리했다· 시작은 ‘저희 교장 선생님 때문에 정말 죄송합니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