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화
‘나도 선배로서의 역할을 조금이나마 한 건가·’
이한은 뿌듯함을 느꼈다·
자기 자신도 에인로가드의 선배들로부터 도움을 받은만큼 후배들에게 그 도움을 똑같이 전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뿌듯했다·
눈을 감고서 이한은 자신에게 도움을 줬었던 선배들을 떠올렸다·
디레트 선배 그리고···
‘···음·안 떠오르지만 분명 더 있을 거다·’
요즘 워낙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름이 안 떠오르는 게 분명했다· 이한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제 시험을 보시죠·”
“여기 있다·”
볼라디 교수는 탁자 위로 흰 종이를 올린 뒤 잉크병과 깃펜을 밀어줬다·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잉크병과 깃펜으로 싸우란 소리신가?’
무기치고는 조금 열악해보였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이한은 빠르게 계산했다·
‘안에 든 잉크를 솟구치게 한다음 소형 수옥탄을 완성할 수 있겠군· 기화 속성을 익혀놨으면 시야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깃펜은 역시 변환 마법인가? 변환시켜도 너무
작고 가벼워서 위협적인 무기가 되기 힘들 것 같은데· 염동력을 사용해서 암기처럼 쓰면··· 그러면 너무 원거리 공격에만 밸런스가 치중되는데·’
이한이 언제 잉크병과 깃펜으로 덤벼들지 타이밍을 계산하는 사이 볼라디 교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서명하도록·”
“?”
흑시 흰 종이 위에 투명한 글씨로 ‘나는 이 싸움에서 중상을 입어도 에인로가드를 고발하는 투서를 쓰지 않겠습니다’가 적혀 있나 확인해봤지만 종이 위에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서명 말입니까?”
“”기말고사 시험을 치렸다는 서명·”
“···아니 교수님도?!”
뒤늦게 볼라디 교수의 말뜻을 알아차린 이한은 깜짝 놀랐다· 어찌나 놀랐는지 펄쩍 튈 뻔했다·
가르시아 교수나 디레트 선배는 이해가 갔다· 워낙 선량한 영혼을 갖고 있는 만큼 이한을 위해 시험을 통과시켜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볼라디 교수도 그냥 통과시켜주려 하다니!
“이렇게 그냥 통과해도 됩니까?”
“부탁해도 시험은 없다·”
볼라디 교수는 눈썹 끝을 살짝 위로 올리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계산해도 현재 제자는 조금 더 휴식을 취해야 했다·
본인이야 휠씬 더 난이도 높은 마법 전투를 원하고 있겠지만 스승으로서 그걸 들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 그런 뜻으로 한 소리가 아니었··· 에이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여하튼 감사합니다·”
이한은 설득하려다 포기했다
이제 와서 설득해봤자 볼라디 교수는 어차피 ‘제자가 쑥스러워서 아닌 척을 하는군’하고 생각할 테니까·
그보다는 시험 하나를 이렇게 통과시켜주는 배려에 감사할 뿐이었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배그렉 교수님은 의외로 친절하신 부분이 있다·’
“참· 교수님· 교장 선생님과 같이 채권자들을 설득해야하는데 조언해주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이한의 질문에 볼라디 교수는 생각에 잠졌다·
“흠·”
그런 뒤 다시 한 번 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한은 괜히 물었다고 후회했다·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물어본 건 아닙니다· 조언 안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기다리도록·”
볼라디 교수는 재촉하는 제자를 기다리게 한 다음 마지막으로 생각에 잠겼다·
한참 지나고 난 뒤에야(지루함을 참지 못한 이한은 새끼 바실리스크를 꺼내서 놀고 있었다) 교수는 입을 열었다·
“제국의 유력가들을 납치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지·”
‘설득 물어본 건데요·’
이한은 왜 해골 교장이 볼라디 교수를 데리고 채권자들을 만나러 가지 않는지 즉시 이해할 수 있었다·
* * *
유크벨티레는 종이 새를 무시하는 못된 친구를 결국 직접 찾아갔다·
“???”
그리고는 당황스러워하는 디레트한테 두툼한 종이 뭉치를 팍 내밀었다· 최근 겪은 불만을 빼곡하게 적은 진정서였다·
친구의 기행에 익숙한 디레트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진정서를 읽던 디레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소세계? 나한테 안 물어봤잖아·”
” ··ユ랬나?”
유크벨티레는 멈칫했다·
진정서에는 ‘디레트는 유크벨티레 본인에게 후배의 소세계 마법을 은닉했음’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유크벨티레가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버두스 교수의 제자답게 유크벨티레는 뻔뻔하게 말했다·
“안 물어봤어도 나한테 이야기해줬어야지·”
“아냐· 너 불렀는데?”
“뭐?”
“너 불렀어· 그 때 지하 구역에서 나오면서 불렀잖아· 후배가 소세계 물어보길래 불렀는데·”
-유크벨티레· 마법 관련해서 후배가 물어볼 게 있다는데·
-네가 대답해줘· 난 할 일이 있어서·
-뭐가 그렇게 바쁜데? 그냥 대답해주는 거잖아·
“···”
생각해보니 소세계 마법을 남몰래 관찰해보겠다고 둘이 부르는 걸 무시하고 뒤에서 지켜봤던 기억이 났다·
유크벨티레는 한결 시무룩해진 얼굴로 진정서를 회수하더니 소세계 마법 은닉 부분을 찣었다·
디레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후배들한테 잘 해주라고 내가 몇 번이고 말했었잖아·”
“이런 기회를 틈타서 논리적이지 않은 비약은 하지 말도록· 그보다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는 어디 있지?”
후배가 찾아와서 말했을 때는 디레트가 사실을 숨겼다는 오해 때문에 충격을 받아 놓쳤지만 소세계를 직접 시전했다면 그 확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디레트가 사실을 숨긴 것도 아니고 둘이 유크벨티레 본인의 지혜를 구했었다면 더더욱 그랬다·
유크벨티레는 매우 관대했다· 마법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랬다·
진정서의 ‘왜 디레트는 유크벨티레한테 화를 내면 안 되는가?’부분을 읽고 있던 디레트는 고개를 들었다·
“후배? 지금 학교에 없을 텐데·”
“···무슨 소리지? 아직 방학까지는 1주일이 남았을 텐데·”
내일부터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혹독한 기말고사 주간을 거친 뒤 심심하고 따분한 여름방학 기간을 가지게 됐다·
유크벨티레는 디레트가 자신을 속이는 게 아닌가 싶어 의심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또 날 속이려는 건 아니겠지· 저번처럼·”
“···그거 3년 전 일이잖아···”
디레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둘이 2학년이었을 때 일이었다·
유크벨티레가 하도 방에 틀어박혀서 식음도 전페하고 마법만 연구하길래(가르시아 교수가 보다 못해 디레트한테 부탁했을 정도였다) 보다 못해 ‘유크벨티레 이번 주는 마시멜로 사탕 축제 기간이니까 너도 품위 있게 참가해야 해’라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선량한 선배들은 가짜 마시멜로와 가짜 사탕을 들고 축제 분위기를 연출해줬고 그 탓에 유크벨티레는 1주일 가량 연구 진도가 늦어졌다·
유크벨티레 본인이 관대하지 않았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았을 극악무도한 범죄였다·
“녹인 마시멜로는 맛있게 잘 먹어놓고···”
“뭐?”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후배는 진짜 학교 밖으로 나갔어· 기말고사 다 끝내고 교장 선생님 일 돕기로 했거든·’
“···”
친구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유크벨티레의 안색이 평소보다 조금 더 창백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 위험한 일이 아니라 그냥 설득을 보조하는··· 아· 너 지금 후배가 아니라 네 연구 격정하고 있구나·”
“응·”
디레트는 심술궂은 만족감을 느끼며 말했다·
“뭐 어쩌겠어· 방학 때 못 도와주겠네· 교장 선생님한테 따지면 되겠다·”
“맞는 말이야· 충고 고마워·”
빠르게 계산과 결심을 끝낸 푸른 용의 탑 5학년 학생은 획 돌아섰다·
그 모습에 디레트는 아차 싶었다·
“···잠깐! 유크벨티레!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해! 안 좋은 생각일 거야! 돌아와!”
* * *
통계적으로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가장 마법에 몰두하는 시험이 시작되는 새로운 한 주의 새벽·
한 대의 마차가 조용히 학교를 빠져나갔다·
“···”
인간 형태의 해골 교장은 앞에 앉은 이한을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집중한 상태였다· 종이와 편지지 인장용 봉랍(封蠟) 깃펜과 잉크병들이 정신없이 둥둥 떠다니며 마차 안을 휘저었다·
“교장 선생님·”
“···”
“교장 선생님!!”
“듣고 있다· 듣고 있어·”
해골 교장은 별로 듣고 있지 않은 태도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연신 편지 내용을 중얼거렸다·
“그 분노는 마땅히 이해하네·· 버두스 교수는 의도적으로 작품을 완성하지 않는 계 아니라 현재 제자들을 가르치느라 너무 바빠서 그런 것일세··· 내 엄히 책망할 테니 부디 이해해주게나·· 이번에 투자한 금화는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내 반드시···”
‘아니· 저렇게 번뻔하게 거짓말을 해도 되나?’
이한은 당황했다
아무리 거짓말을 한다 쳐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버두스 교수가 제자들 때문에 바빠서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니· 너무나도 들키기 쉬운 거짓말이었다·
30분 정도 지나자 해골 교장의 정신이 마침내 돌아왔다·
교장은 이한을 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기말고사는 다 봤느냐?”
“예·”
“개인적으로는 5서클 마법들을 더 익히고 기반을 다진 뒤 정석적인 소세계에 입문하길 원했지만··· 어찌되었든 입문하긴 했으니 잘 했다·”
소세계 바실리오스 같은 마법들은 일반적인 소세계 마법과는 그 궤가 달랐다·
고대 마법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주인과 자격 조건을 까다롭게 다루는 계승식 마법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디레트가 익힌 소세계 펜타그라마톤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극명히 드러났다·
펜타그라마톤은 다섯 고위 악마만 봉인하면 어느 흑마법사든 익힐 수 있는 소세계였지만 바실리오스는 분신의 제자가 아니라면 물려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해골 교장은 이러한 샛길보다는 이한이 다른 5학년 학생들처럼 마법 실력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킨 뒤 현재 제국에서 유행하는 소세계 마법을 익히는 걸 기대했었다·
그게 휠씬 안정적이고 범용성도 높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쩌겠는가·
“5서클 마법들은 2학기 때 마저 배우면 되겠지·”
“···”
이한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은 수긍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웬일이냐? 투덜댈 줄 알았는데·”
“스승님에게 약속했으니 이 정도는 해봐야죠·”
“···마부석으로 나가라·”
해골 교장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이한을 마부석으로 쫓아냈다· 말들을 몰고 있던 죽음의 기사가 안쓰럽다는 듯이 제자를 쳐다보았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나가란다고 나가? 빨리 들어오지 못해?”
마차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한은 다시 돌아왔다· 해골 교장은 툴툴댔다·
“내가 시킨 건 하기 싫어 죽겠다는 듯이 하는 녀석이···”
밖에서 죽음의 기사들이 수군거렸다·
그러자 해골 교장은 기사들을 징벌방으로 보내버렸다·
“뭐라고 하셨길래 역소환을 하신 겁니까?”
“나도 승천하면 박쥐나즈 네가 시킨 걸 열심히 하지 않겠냐고 농지거리를 던지더군·”
이한은 죽음의 기사들이 가진 배짱에 감탄했다·
정말 보통 대담함이 아니었다·
“왜· 너도 농담 하고 싶나?”
인간 형태의 해골 교장이 ‘할 거면 어서 해봐라’의 눈빛을 보냈다·
이한은 재빨리 주제를 바꿨다·
“설득해야 하는 채권자 분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몇 부류로 나뉘지·”
해골 교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만 해도 질색하는 게 느껴졌다·
“먼저 관료들이 있다· 이 관료들이 제국의 황금을 꺼내서 지원해줬지·”
“오·”
“문제는 내가 이 자들을 좀 거칠게 협박했다는 점이다·”
“오···”
“다음은 귀족 가문들이 있다· 이 가문들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줬지·”
“아하· 에인로가드에 입학한 가문 핏줄이 여럿 있어서입니까?”
“아니· 내가 거칠게 협박했다·”
“···”
이한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다 협박으로 해결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