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화
선배가 불합리함에 분노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한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사실 유크벨티레가 화낸 사실은 이한의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에인로가드의 몇몇 마법사들은 이한의 <투덜대거나 불평하더라도 무시해도 되는 인간들> 리스트에 올라가 있었는데, 이 황족의 피를 이은 선배도 당당히 그 이름이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어!? 벌써 움직여도 돼?!”
흑암관 2층, 시체안치실에서 방부처리를 진행하던 디레트는(라파드엘은 울기 직전이었다) 공방에 들어온 후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며칠은 더 쉬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이제 괜찮습니다. 기말고사 먼저 보려고 왔는데.”
“그래? 그러면 남은 건 모르툼 교수님한테 부탁해야겠다.”
디레트는 단지에 폐를 마저 담은 뒤 마법으로 봉인했다.
요 며칠 동안 모르툼 교수는 해골 교장을 도와 에인로가드 영지 근처의 마법을 재조정하고 사악하게 오염된 마력의 흐름을 정화했다.
상당히 힘든 노역이었던 만큼 모르툼 교수는 지금 골골대며 누워 있었다.
하지만 원래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은 골골 앓더라도 해야 하는 일은 해야 하는 법.
학파의 제자도 쉬지 않고 나왔는데 교수도 마땅히 나와서 일을 해야 했다. 디레트는 이런 부분에서는 엄격했다.
“모르툼 교수님 불러와.”
“저, 선배님. 교수님은 그… 아까 쓰리지셨잖습니까?”
“응. 근데 물약 먹이면 괜찮아. 저기 위에 물약 갖고 가서 입에 부어드려.”
“…예!”
라파드엘은 아까보다 한층 더 공포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안치실을 두려워하는 건지 아니면 앞에 있는 선배를 두려워하는 건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정말 괜찮겠어?”
디레트는 기말고사를 보기 위해 후배와 같이 계단을 내려가며 질문했다.
직접 목격하진 못했지만 이런저런 소문이나 증언으로 디레트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더 인기가 좋은 분신에게 위기감을 느낀 교장 선생님이 드디어 토벌하려고 나서자, 그 말도 안 되는 폭거에 분노한 후배는 반대 쪽에 참가했다…
해골 교장과 맞붙었는데 멀쩡할 리 없었다. 지금 저렇게 보여도 속의 마력 흐름은 아직 크게 뒤틀려 있을…
‘엇. 멀쩡하네.’
삼각형 형태의 뼈 부적으로 후배의 마력 흐름을 확인한 디레트는 당황했다.
생각보다 정말 멀쩡했던 것이다.
“그럼 <까마귀의 사안> 시전하고 스켈레톤 골렘 소환, 그리고 나머지는… 여기 목록에 있는 독하고 물약 정도만 제조해보면 되겠네. 할 수 있지?”
“!”
이한은 깜짝 놀랐다.
시험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쉬워서였다. 이건 이번 학기 동안 배웠던 내용들의 복습 아닌가.
“선배.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응? 뭐가?”
“제가 쓰러졌다고 일부러 쉽게 내신 거잖습니까.”
이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시험을 쉽게 봐서 나쁠 건 없었지만, 자신의 욕심 때문에 존경하는 선배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유크벨티레도 아니고 디레트 아닌가.
“사실 선배, 제가 앞으로 시험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으려고…”
“아닌데?”
“예?”
“아니라고.”
디레트는 황당하다는 듯이 후배를 쳐다보았다. 후배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험을 이렇게 낸 이유는 후배 네가 이번 학기 동안 알아서 진도를 다 나가서야. 더 이상 나갈 필요 없으니까 점검하는 거지.”
“…아. 그렇군요.”
어색한 공기가 둘 사이에 흘렀다.
후배의 머쓱함을 알아차린 디레트는 상냥하게 말했다.
“그러면 시험 시작할까?”
“네!”
* * *
시험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디레트는 만점을 기록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시험에 집착 안 한다고 하지 않았나?’
“후배. 곧 방학인데 뭐할 거야?”
“저는 교장 선생님하고 같이 채무 상환 연장해달라고 제국 곳곳 돌아다닐 것 같은데요.”
“…으, 으응…”
예상했던 대답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상상초월의 예정에 디레트는 말문이 턱 막혔다.
‘잠깐. 그러고 보니 방학 때 유크벨티레 연구 도와주기로 하지 않았었나?’
생각해보니 이한은 분명 유크벨티레의 인공 차원 연구를 방학 때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유크벨티레 본인이 귀에 못이 박힐 때까지 말했기에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 엇쌍각뿔 부분은 아직도 완성이 안 됐네. 내가 도와줄까?
-그럴 필요 없어.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가 방학 때 참가하기로 했으니 그 때 맡길 거야.
-…아무리 마력이 많아도 그렇지 후배를 그렇게 이용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러면 여기 중첩 마법진은?
-아. 거기도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가 오면 맡길 거야. 마력 소모가 심해서 비워봤거든.
-일정 변경되어서 확 안 오면 좋겠네… 그래. 알겠어.
-뭐라고 말했지?
-아니. 아무것도.
하지만 디레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인로가드를 위해 열 일 하는 후배의 발목을 사사로운 이유로 붙잡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건 유크벨티레가 선배답게 양보해야 하는 일이었다.
퍼드득!
창문 밖에서 종이 새가 날아들자 디레트는 성가시다는 듯이 검은 불로 태워버렸다. 이한은 의아해했다.
‘에인로가드에도 성가신 광고를 하는 종이 새가 있나?’
“누가 보낸 겁니까?”
“유크벨티레. 보나마나 쓸데없는 내용일 게 분명해서 태웠어. 정말 급한 거면 자기가 찾아오겠지.”
“과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 오기 전 나눴던 소세계 대화는 이미 머릿속에서 치워버린 이한이었다.
* * *
시험을 끝내고 흑암관 밖으로 나오며 이한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쉽게 내신 것 같은데, 디레트 선배가 거짓말하신 건 아니겠지?’
괜히 자신 때문에 디레트가 나중에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닐까 싶어서 이한은 걸어가면서도 찜찜해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이한이 <매우 어렵고 난해한 비전 마법의 이해에 대해서> 강의실 문을 열자 가르시아 교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한 학생, 시험 보러 왔죠? 저기 백지 위에 이름 적고 나가면 돼요!”
“……”
가이난도도 만점 받을 수 있는 참신한 시험 내용에 이한은 경악했다.
“아, 아니… 이래도 됩니까?”
“뭐가요?”
가르시아 교수는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바빠 보였다.
이한과 대화를 하면서도 눈과 손은 책상 위의 마법에 고정되어 있었다.
“교장 선생님이 화내실 것 같은데요.”
버두스 교수가 가끔 징벌방으로 사라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에인로가드 교수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자유를 교육이나 시험에 멋대로 사용했다가는 해골 교장의 진노를 살 수 있는 것이다.
“교장 선생님이 이렇게 하라고 한 거예요, 이한 학생! 학기 동안 가르칠 거 다 가르쳤으면 괜히 쓸데없이 시간낭비하지 말라고!”
“…!”
버두스 교수가 들었다면 감격했을 말이었다.
물론 버두스 교수였다면 해골 교장이 아무리 다급하더라도 하지 않았을 소리기도 했다.
현재 가르시아 교수는 두 대마법사가 고유세계까지 동원해가며 싸운 뒤처리의 일부를 맡고 있었다.
마법사의 심상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기존의 세계를 침범했는데 아무 여파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에인로가드 영지 곳곳에서 나타나는 이상 현상이나 차원 균열을 확인하고, 일이 심각해지기 전에 미리 대비한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최대한 저렴하게 해결한다!
거의 불가능처럼 느껴지는 이런 위업들을 매 해마다 해낼 수 있는 사람만이 에인로가드 교수로 불릴 수 있었다.
“이한 학생은 이번 학기 동안 충분히 잘 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넘어가도 되는 거구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방학 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요. 이한 학생. 무리하지말고요!”
가르시아 교수는 여전히 고개를 책상 위로 숙인 채 인사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참. 이한 학생은 방학 때 계획이 있나요?”
“교장 선생님하고 채권자들 설득하러 돌아다닐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몸조심… 방금 뭐라고요?!”
가르시아 교수는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충격으로 크게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제자는 인사를 마치고 강의실 밖으로 나선 뒤였다.
마음 같아서는 쫓아가고 싶었지만, 앞에 쌓인 마법들 때문에 가르시아 교수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다.
* * *
‘잠깐. 그러면 배그렉 교수님도 바쁘시려나?’
생각해보니 가르시아 교수도 저렇게 바쁜데, 미친 분신 토벌에 직접적으로 참가한 볼라디 교수는 더더욱 바빠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 에인로가드는 해골 교장이 믿고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투입할 만큼 일손이 부족한 상황처럼 보였다.
“…!”
그러나 놀랍게도 지하 강의실의 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 나타난 건 평소처럼 무덤덤한 볼라디 교수의 모습이었다.
이한은 놀라워하다가 알아차렸다
‘앗. 그렇군.’
원래 마법사마다 각자 자신의 전문 분야가 다른 법이었다.
모르툼 교수는 흑마법, 가르시아 교수는 시공간마법, 버두스 교수는 징벌방…
그리고 볼라디 교수는 마법 전투 전문가.
싸우는 상황이면 모를까 이런 뒤처리 상황에서는 부름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교수님. 괜찮습니다. 교수님은 이미 전투 때 몇 사람 몫을 하셨잖습니까.”
“?”
볼라디 교수는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 제자의 모습에 살짝 의아해했다.
여러 고위 마법을 사용하고 휘말린 것에 대해 후유증은 없나 싶었는데 대뜸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걸 보니 걱정이 됐다.
“상태는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번에 도와주신 것도요.”
볼라디 교수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그 뒤로 교장 선생님이 불이익을 주시거나 징벌방에 보내시거나 추가 지원금을 깎거나 하시진 않았죠?”
만약 그렇다면 장전된 투서가 다시 발사될 수도 있었다.
“지원금은 애초에 없었다.”
“……”
“학파 인원이 늘었으니 내년부터는 나올지도 모르겠군.”
“…제가 꼭 받아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한은 눈시울이 살짝 시큰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말했다.
1명에서 2명으로 늘어난 만큼 받을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었지만, 해골 교장 앞에서 협박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받아올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볼라디 교수가 너무 안타까웠다.
다른 교수들, 심지어 흑마법 학파의 모르툼 교수도 지원금을 받는데…
‘크흑.’
“?”
제자가 얼굴을 가리고 슬퍼하는 모습에 볼라디 교수는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상태가 괜찮나.”
“예? 예. 정말 괜찮습니다. 다른 시험들도 다 보고 왔는걸요. 교수님께서도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십시오. 지원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뒤처리는 참가하면 교수님 손해 아니겠습니까.”
가르시아 교수한테는 미안했지만 이한은 볼라디 교수를 위로하기 위해 말했다.
그러나 볼라디 교수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뒤처리는 시험 끝나고 참가할 생각이다.”
“?!”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한은 더욱 놀랐다.
“교장 선생님이 부르셨습니까?!”
“그래.”
“그런데 왜…?”
“시험 끝날 때까지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이한은 해골 교장의 욕설이 귓가에 환청처럼 들리는 기분이었다.
뻔뻔한 버 모 교수의 이유와는 달리, 강의에 집중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해골 교장 입장에서도 더 화내기 뭐했을 것이다.
…그게 제자 2명인 강의라는 게 좀 어이가 없을 것 같긴 했지만…
‘아니다. 제자의 숫자보다는 그 진심이 중요한 거지. 교수님은 진심이신 거다.’
“교수님. 에안두르데는 마지막 날에 시험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가능한 빨리 끝내라고 하셨는데…”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그보다는 에안두르데가 최대한 열심히 준비할 수 있게 시간을 주시는 게 더 중요하죠.”
“과연. 그렇겠군.”
후배를 챙기는 제자의 든든한 모습에 볼라디 교수는 즉시 설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