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화
“그럼 난 간다·”
이한은 양손이 모두 묶인 만큼 어쩔 수 없이 햄스터 우리를 든 손을 인사용으로 흔들었다·
안에 들어 있는 햄스터가 분노의 찍찍소리를 내뱉었다·
“잠··· 잠깐· 워다나즈!”
지젤은 보기 드물게 당황해서 이한을 불렀다·
“여기 이 멍청이들한테 채찍질 안 하냐!?”
‘말이 너무 심하잖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시무룩해졌다·
아무리 그들이 푸른 용의 탑 학생들보다 평균 성적이 낮다지만···
“말이 너무 심하잖아!”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발끈했다·
아무리 그들이 부족하다지만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
“??”
두 탑 학생들은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앗·’
“너희를 말한 게 아니라···”
“모라디·”
인상을 찌푸린 채 푸른 용의 탑 멍청이들에게 해명하려던 지젤은 이한의 말에 멈칫했다·
놀랍게도 워다나즈는 잔잔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내가 시험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말했었지?”
“···어··· 어어·”
지젤은 본 적 없는 친구의 모습에 그대로 압도되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어떤 반응도 할 수 없다는 게 정말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너희들을 너무 몰아붙인 것 같다· 꼭 억지로 몰아붙이는 게 답은 아닌데도 말이지· 너희들도 너희들만의 길이 있겠지·”
“····”
“····”
지젤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차례대로 굳어버렸다·
마치 바실리스크가 석화의 사안을 쓴 것마냥 모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석화 상태에 빠지거나 말거나 이한은 상냥하게 말했다·
“다들 무리하지 마라· 그럼 난 이만·”
이한이 사라진 뒤에도 친구들은 바로 돌아오지 못했다· 몇 분은 지나고 나서야 누군가가 외쳤다·
“워다나즈가 망가졌다!!!!!!!”
* * *
“감사합니다· 버드나무 교수님·”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 꼬마야·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지·”
버드나무 교수는 껄껄 웃으며 종이를 내밀었다· 각 귀퉁이에 제국 원예가 클럽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종이에는 클럽에서 진행하는 경매의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경매 품목에는 이한이 키운 만드라고라가 당당히 올라가있었다·
원래 이 만드라고라는 기말고사까지 키워서 제출하는 <식물과 함께하는 마법사의 삶> 강의의 한 학기 과제였다·
하지만 어느 짓궂은 용과 바실리스크의···
-····
새끼 바실리스크는 시무룩해졌다·
이건 자기 잘못이 아니었는데!
···행동으로 이한의 만드라고라는 중간고사 때 이미 다 자라버린 것이다·
어찌나 잘 자랐는지 버드나무 교수는 자신이 소속된 제국 원예가 클럽 경매에 제출해보라고 권했을 정도였다·
“이거 팔리면 너하고 전하 선물 사줄게·”
-!
새끼 바실리스크의 꼬리가 기쁨으로 흔들거렸다·
“자· 여기 초대장이다· 방학 때 진행되니 직접 참가해볼 수 있겠구나·”
제국 원예가 클럽은 아무나 가입할 수 없었다· 뛰어난 업적을 세운 원예가만 가입할 수 있는 명예로운 클럽이었다·
즉 이한이 제출한 만드라고라가 클럽 내부 경매에 올라가 본인이 참가할 수 있게 됐다는 건 이한 또한 이 클럽에 가입을 허락받았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만드라고라를 팔아서 얻을 금화보다 이게 더 값진 보상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꼬마야· 잊으면 안 되는 게···”
“제국 원예가 클럽 저널· 맞습니까?”
“그래!”
버드나무 교수는 나무껍질 얼굴을 움직이며 흥겹게 껄껄 웃었다·
뛰어난 학생과 대화하는 건 나무 본인도 즐겁게 만들었다·
교수는 작은 책자를 꺼냈다· <제국 원예가 클럽 저널>이라고 겉에 적혀 있는 책자였다·
“이걸 받는 걸 잊지 말거라· 이거 하나면 제국 전역의 식물들 정보를 공유할 수 있거든·”
“예· 어디에서 어떤 식물이 유행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서 가격이 등락하고 누구에게서 좋은 식물을 구할 수 있는지 서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제국 원예가 클럽 저널>은 반드시 확보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그래· 잘 알고 있으니 됐다·”
생각보다 너무 잘 알아서 움찔할 정도였다·
“다음 학기부터는 클럽 내에서는 같은 원예가로 만나겠구나· 그렇다고 너무 식물에 푹 빠지진 말거라· 다른 교수들이 날 원망할 테니까·”
식물에 대해 잘 모르는 마법사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식물만큼 매력적이고 중독성 강한 것도 없었다·
버드나무 교수는 식물을 수집하고 기르는 마력에 푹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여럿 알고 있었다·
만약 워다나즈가 만드라고라를 기른 즐거움에 빠져 다른 강의를 소홀히 하면 에인로가드 교수들이 얼마나 서운해 하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일에 몰두하더라도 교수님들이 버드나무 교수님을 원망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식물 때문이 아니라 제가 생각을 바꾼 거거든요·”
“생각을 바꿨다니?”
버드나무 교수는 학년 수석의 말에 의아해했다·
“앞으로는 꼭 시험에만 목매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법의 길에 다른 사람의 평가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흐음· 보통 그런 말은 낙제한 꼬마들이 하는 말인데··· 꼬마 너라면 해도 괜찮겠지·”
원래 ‘스스로가 걷는 마법의 길은 자신만이 알면 된다’같은 말은 에인로가드에서 보통 낙제한 놈들이 징벌방에서 투덜대는 소리였지만 그런 말도 학년 수석이 말하면 좀 더 품위 있게 들리기 마련이었다·
버드나무 교수는 괜한 걱정을 하기보다는 눈앞의 소년을 믿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이번 시험은 적당히 넘어갈 생각이냐?”
“예·”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뭐지?”
이한이 들고 있는 두툼한 보고서를 발견한 버드나무 교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고대 유물과 소환 마법의 비극적 역사> 강의에 제출한 보고서입니다·”
버드나무 교수는 ‘제출할’이 아닌 ‘제출한’에 주목했다·
고개를 옆으로 움직여서 보니 밀레이 교수가 만점이라고 적어놓은 글씨가 보였다·
“···그래· 힘내거라!”
교수는 재수 없는 꼬마 녀석이라고 제자를 구박하는 대신 조용히 칭찬해줬다·
실로 품격 있는 교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태도였다·
* * *
“뭔 헛소리냐?”
우레걸음 교수는 오두막 의자에 앉아 닭국수를 먹다가 제자를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앞으로 시험에 너무 연연하지 않겠다니·
그건 마치 드워프가 오늘까지의 채광을 반성하고 남은 인생 동안 나무를 심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용은 날아다니고 구울은 살점을 탐하듯이 워다나즈는 마법에 미쳐야 했다·
“반성하고 변하기로 마음먹은 거죠·”
“아니··· 반성할 일도 아니고 변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우레걸음 교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한이 제출한 황금빛 물약을 확인했다·
얄밉게도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고작 2학년 학생이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물약이었다·
이런 물약을 만드는 놈이 시험에 연연하지 않겠다니·
혹시 앞으로 색다른 방식으로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을 조롱할 생각인가?
‘무시무시한 놈이다· 저런 식으로 다른 마법사들을 압도할 줄이야·’
“그런데 생각해보니 교수님께서 독약을 만들어주셨군요·”
“···켁 켁켁·”
수염 사이로 국수를 흡입하던 드워프 교수는 켁켁대며 기침했다·
“무··· 무슨··· 아를칸의 영절을 말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었다· 교장 선생님의 분신이 비밀을 지키라고 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흠·”
이한은 우레걸음 교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교수는 괜히 제자한테 새참을 만들어달라고 했나 싶어서 불안해졌다·
예로부터 연금술사의 사망 원인을 따져보면 제자에게 독살당한 연금술사가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이 얼큰한 국물은 독을 숨기기 꽤 적합한 음식이었다·
“···남은 일은 내가 할까?”
“아닙니다· 온 김에 다 하고 가야죠· 빨리 시험 끝내고 교장 선생님도 도와드려야 하는데·”
“아 아니다· 회복한지 얼마나 됐다고 무리를 하고 그러냐· 벤도졸 교수 시키면 되니까 너는 더 쉬어라!”
갑자기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교수가 된 우레걸음 교수는 이한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말렸다·
제자가 다시 자리에 앉자 우레걸음 교수는 눈치를 보며 물었다·
“네가 방금 제출한 물약이 어떤지는 안 궁금하냐?”
그 질문에 이한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교수님· 말씀드렸잖습니까· 앞으로 시험에 너무 연연하지 않겠다고요·”
‘먼저 찾아와서 만점 받아놓고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놈···’
우레걸음 교수는 속으로 수제자를 욕했다·
어떻게 된 게 묘하게 더 재수없어진 것 같았다·
* * *
이한은 평소보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빠르게 시험들을 끝냈다·
이미 기말고사 이전에 시험을 사실상 끝낸 <지팡이 재료와 마법 증폭> 강의나(버두스 교수가 사라져서 유크벨티레 선배가 대신 평가하고 있었다) <미치기 좋은 예지 마법들> 강의 등등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물론 완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시험은 끝냈어도 강의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알아· 사라지셨다고·”
“알고 계셨습니까?”
이한은 유크벨티레가 미친 분신의 승천을 아는 것에 살짝 놀랐다·
“추모비도 세웠잖아·”
“아· 디레트 선배가 시키신 거죠?”
“뭐? 아니···”
“역시 디레트 선배는 참 배려심이 깊으십니다·”
“그게 무슨···”
유크벨티레는 후배의 황당한 말을 지적하려고 했지만 부여 마법 학파의 전통에 따라 이한은 상대를 무시하고 자기 할 말을 했다·
“그보다 선배님· 소세계에 대해 잘 아신다고 들었는데요·”
“전문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이렇게 생긴 왕관 형태의 소세계 마법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번에 우연한 기회로 사용하게 됐는데 제약이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말입니다· 관련된 마도서가 있다면 추천 부탁드리겠습니다· 방학 때 읽어보려고요·”
후배의 말에 유크벨티레는 무슨 마법을 말하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저번에 지하 광산 구역을 돌아다닐 때 머리 위에서 아른거리던 그 흐릿한 왕관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괜한 간섭으로 마법을 망가뜨릴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결국 후배 본인도 알아차린 모양···
“···사용했다고?”
“예? 예·”
“어떻게!?”
“아· 그게 우연이긴 한데 디레트 선배님의 말에 단서가 있었습니다· 선하고 헌신하는 게 조건이 아니었냐고 하셨는데 비슷하더라고요·”
“디레트랑 이야기를 했다고!?!?”
유크벨티레는 더더욱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후배가 소세계를 사용했다는 건 지적도 하지 못하고 넘어갔다·
‘내가 그렇게 관심을 가졌는데?’
왜 자신만 빼놓고 둘이서 이야기를 했단 말인가?
물론 정답은 속으로만 혼자서 생각하고 디레트에게 말하지 않아서였지만 그걸 유크벨티레가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았다·
“못 들으셨습니까?”
“···응·”
“뭐 선배님들은 중요한 마법이 더 많으니까 그러셨던 거겠죠·”
이한의 위로도 유크벨티레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았다·
“···혹시 내가 디레트한테 무슨 잘못을 했나?”
“매일 하시지 않습니까? 뭘 새삼스럽게·”
“그 정도는 아닌데·”
“그 정도 맞는데요·”
후배는 차가웠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 유크벨티레는 일단 후배의 말이 맞다고 가정했다·
“···혹시 디레트한테 가서 비이성적인 분노를 멈춰달라고 전해줄 수 있겠어?”
없던 분노도 생길 법한 마법의 말에 이한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습니다· 선배님이 직접 하세요· 어쨌든 전 <지팡이 재료와 마법 증폭> 강의 끝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ㄲ···!”
매몰차게 나가버리는 후배의 모습에 유크벨티레는 그녀 자신도 모르게 탁자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처음으로 느낀 학파 학풍에 대한 강한 분노였다·
부여 마법 학파는 대체 뭐가 문제길래 이렇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