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종의 낙인 (4)
페르미가 칩을 내밀었다.
“어때, 해 볼래?”
“어떻게 하는 건데?”
“감가상각의 거래와 똑같아. 이걸 삼키면 뇌에 칩이 장착되지. 그러면 의식을 유지한 상태에서도 언더 코더에 접속할 수 있어.”
이번에는 시로네도 놀랐다.
“그게 가능해?”
“처음에는 좀 생소할 거야. 뇌 기능이 분할되는 거니까. 평범한 사람도 걸으면서 대화를 나눈다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물론 그 정도로 쉽지는 않지만 적응하면 괜찮아질 거야.”
시로네는 이해했다. 또한 동시 사건이 어려운 지금 최적의 방식이었다.
“줘 봐.”
페르미가 건넨 칩을 삼키자 머릿속에 언더 코더의 정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왜곡시킬 수 없는 상상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가상의 공간에 페르미가 걸어왔다.
“어때?”
“어, 그게….”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동시에 계산해야 하기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힘들어. 일단 걸어 봐. 언더 코더에서는 이쪽으로, 현실에서는 저쪽으로.”
현실의 시로네는 비틀거렸다.
그때 에이미와 세리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로네, 뭐 해? 술 마셨어?”
“응? 아, 잠시만.”
한동안 움직이는 연습을 하자 두 세계의 신경이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언더 코더의 페르미가 말했다.
“확실히 빠르군. 다른 팀원들은 한동안 걷는 것도 힘들었는데. 그럼 다음 단계로 가 볼까?”
“다음 단계?”
“드림 스타는 수면파를 사용했기 때문에 현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었지. 반면에 뉴럴링크는 각성파를 이용하는 방식이야. 의식의 속도에 따라 정보처리 속도가 달라진다는 거지. 지금 나는 엄청 느리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고. 너에게 맞추기 위해서 말이야. 만약 내 속도대로 정보를 처리하면….”
페르미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잔상이 수십 개나 겹칠 정도였고,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지만 너무 빨라서 그냥 노이즈처럼 들렸다.
시로네는 해결법을 찾았다.
‘그렇구나.’
두 세계로 나누는 게 아니라 하나의 세계처럼 생각하고 처리하는 것이다.
개념이 통합되자 페르미의 말이 들렸다.
“하여튼 싸가지가 없다니까. 다짜고짜 찾아와서 사람 귀찮게 하고 말이야. 학창 시절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이번 기회에 바가지를 엄청 씌워서….”
“다 들리거든?”
페르미가 멋쩍게 웃었다.
“어, 벌써? 역시 빠른데? 그냥 테스트야, 테스트. 원래 자기 욕은 더 잘 들리잖아.”
시로네는 말려들기 싫었다.
“적응 다 했어. 다음은 뭐야?”
“일단 그 정도면 충분해. 다른 멤버들은 뉴럴링크에만 집중해도 되지만 너는 그럴 수 없을 테니까. 하다 보면 점점 기능이 강화될 거야.”
시로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편리하다.’
일상생활 중에도 언더 코더라는 무궁무진한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아예 이쪽으로 간 거야?”
“요즘 세상에 정보는 돈이야. 특히 미래 정보의 가치는 차원이 다르거든.”
금화륜이 공식적으로 정보를 매매한 적은 없지만 페르미는 세계 최고의 부호였다.
“내려가지. 보여 줄 게 있어.”
시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미가 손을 땅으로 향하며 키워드를 읊었다.
“가상회로, 디 어비스.”
발밑에 거울이 생기더니 이면이 역전되면서 아포칼립스의 세계가 펼쳐졌다.
현실의 배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굴종의 낙인을 찍은 자들이 흉악한 무기를 들고 순위가 낮은 자들을 붙잡아 죽이고 있었다.
“으하하! 피, 피다! 뜨거운 피!”
“살려 줘! 으아아아!”
이미 죽어 시체가 된 자에게 칼질을 이어 가는 살인자를 보며 시로네는 깨달았다.
‘완전히 망가졌다.’
페르미가 말했다.
“예상은 했잖아. 순위는 상대적이야. 밑에서 받쳐 주는 자들이 사라지면 그다음 순번이 타깃이 되지. 그런 세상을 모두가 원한다면 울티마일 테지만, 어차피 그 끝은 이렇게 될 뿐이라고.”
시로네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현실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이지?”
“그래. 아포칼립스 시간으로는 꽤 오래됐지만, 현실을 기준으로는 불과 3일 전이야.”
시로네가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뒤틀렸네.”
“그래. 형세 판단이 먼저라 엠바고를 걸었어. 뭔가 좀 이상했거든. 태풍이 생겨도 그 이전에 수많은 인자의 결합이 있어야 하지. 그런데 아포칼립스는 3일 만에 이 지경이 됐다. 내가 내린 결론은….”
“충동.”
시로네가 말했다.
“현실에서 원자폭탄이 생겼다고 해서 아포칼립스가 멸망하지는 않아. 하지만 누군가가 그걸 사용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면, 미래는 급격히 변한다.”
“그래. 이건 누군가의 의지다, 그렇게 생각했지. 게다가 제르비스는….”
순간 시로네는 아찔했다.
죽고 죽이는 풍경이 기억으로 빨려들더니 새로운 살육의 현장이 펼쳐졌다.
페르미가 말을 이었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죽거나 죽이는 기억이 수천 번 누적되었을 거야. 그래서 미쳐 버렸고, 살의의 충동만 남았어.”
사건이 새롭게 변하자 굴종의 낙인을 찍은 자들이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저기야! 싱싱한 먹잇감이다!”
“내가 죽일 거야!”
페르미가 윈드 커터를 만들었다.
“물러서. 현실의 낙인은 여기서도 적용된다. 불가촉천민인 너는 싸울 수 없어.”
거칠게 회전하는 공기 칼날을 보고서도 사람들은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죽일 수 있어. 또, 또 죽일 수 있어!”
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거대한 드릴을 장착한 장갑차가 땅에서 튀어나와 사람들을 깔아 버렸다.
“크아아악!”
시로네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장갑차의 해치가 덜컹 열리더니 머리를 쇼트커트로 자른 여성이 올라왔다.
“이야, 시로네.”
시로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마르샤 누나!”***텅! 텅!
앞을 가로막는 인파를 장갑차가 치받자 사람들이 바퀴에 깔려 으스러졌다.
진동이 사뭇 으스스했다.
하이 기어의 운영자인 넘버세븐이 운전대를 급하게 꺾으며 말했다.
“젠장! 끝이 없네!”
오퍼레이터가 쏘아붙였다.
“좀 천천히 몰아. 오빠 300번대잖아. 더 높은 순위랑 부딪치면 우리가 다쳐. 하여튼 만드는 것만 잘하지 운전은 진짜 못한다니까.”
“헹, 그러면 네가 하든가. 700번대 주제에.”
“저게 진짜!”
앵무 용병단과 마찬가지로 하이 기어 운영 팀도 금화륜의 멤버로 활동 중이었다.
‘다들 여전하구나.’
시로네는 문득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여러 사람이 대형 장비에 탔을 때는 판정이 어떻게 되지?”
막대 사탕이 말했다.
“운전자의 순위로 결정이 돼요. 즉, 판정의 기준이 거시 물리학이 아니라는 거죠.”
오퍼레이터가 말했다.
“5대 시스템은 전부 장악되었다고 봐야 해. 계란이 바위에 깨지는 게 자연스럽듯이, 순위에 따라 힘의 강도가 정해지는 세계가 되어 버린 거야.”
넘버세븐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도 굴종의 낙인을 찍은 거야. 불가촉천민으로는 탐사가 무리니까. 마르샤 씨만 빼고.”
“마르샤 누나가?”
프리먼이 말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더군. 죽으면 죽었지 너에게 쪽팔릴 짓은 못 하겠다던데.”
‘그랬구나.’
그녀는 시로네의 울티마였다.
고개를 돌리자 마르샤가 씩 하고 웃었다. 그리고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결혼식 못 가서 미안해. 진짜 가려고 했는데, 보다시피 상황이 이래서.”
“괜찮아요. 덕분에 도움을 받잖아요.”
페르미가 물었다.
“그런데 마중은 왜 온 거죠? 급한 상황이 아니면 랑데부 포인트에서 보면 되는데.”
막대 사탕이 말했다.
“새로운 유물이 발견됐어요. 금속 탐지 드론에 포착된 건데 심상치 않아서요.”
하이 기어 운영자들은 유물을 효율적으로 탐색하기 위해 드론을 띄웠다.
고무, 유리 금속 등 고유 식별 기능을 장착했는데, 이번에는 금속이 걸렸다.
“금속? 그것도 흔하잖아. 식기나 무기….”
“전류가 잡혀요.”
페르미는 입을 다물었다. 랑데부 포인트를 버릴 만한 충분한 이유였다.
“오파츠로군. 채굴은?”
“이미 했어요. 그런데 해독이 안 돼요. 이 세계의 언어 체계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볼게.”
시로네는 단말기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문자의 형태를 뚫어지게 살폈다.
‘모르겠어.’
울티마로도 해독은 불가능.
하지만 문자의 형태만큼은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건 아우터 리포트야.”
아포칼립스의 제트가 목숨을 바쳐 전수했던 제타 함수의 구결과 유사했다.
페르미가 물었다.
“바깥 세계의 기록? 확실해? 그게 어떤 뜻인지 정확히 알고 하는 말이겠지?”
“그래.”
아우터 리포트가 아포칼립스에 퇴적될 경우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누군가… 접속한 거야.”***위상공간.
수치로 측량할 수 없는 어둠 속에 빛이 흘러들더니 무언가를 재구성했다.
-이데아 신호 감지.
-2개의 사용자 코드에 권한 부여. 준동경계에 안정적으로 액세스 했습니다.
마치 더미처럼, 인간의 형태만 가지고 있는 2명의 사용자가 눈을 떴다.
바깥 세계의 요원, 트리니티였다.
“코드 네임을 만들겠다. 1조 7항에 의거한다.”
-승인합니다.
“내 이름은… 이사칼.”
“레온.”
그렇게 한 쌍의 남녀가 탄생했다.
이사칼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또 여자라니. 좀 지겨운데.”
레온이라는 남자가 돌아보았다.
“뭐야, 원래 남자였어? 어디 부서야?”
“알아서 뭐 하게?”
“하긴.”
진짜 신상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조만간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사칼이 말했다.
“독립 우주라서 귀찮기는 하네. 기본부터 다시 설정해야 하잖아.”
“우린 적진 한복판에 온 거라고. 관리자도 없어. 임무 수행에 차질 없도록 해.”
“너나 잘해. 이쪽 세계 놈들은 만만치 않으니까. 그래서 넌 뭘로 할 거야?”
레온은 고개를 들고 생각했다.
“흐음. 기왕 남자로 사는 거니까, 아이돌? 엄청 유명한 연예인이나 되어 볼까. 너는?”
“쾌락 살인마.”
레온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괜찮아? 뭐든 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거 깨어나면 꽤 기분 더러울 텐데.”
“기밀이야. 어차피 임시 사용자잖아. 수명 다하기 전에 돌아갈 거야.”
조만간 바깥 세계의 기록을 망각하는 특성상 임무를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너 알아서 해라.”
레온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이사칼은 실제로 그런 취향일지도 모른다고.
이사칼이 말했다.
“히든 코드 설정. 신상 전부 적용하고 능력 계수는 한계치로 잡아. 7조 3항, 6항에 의거한다.
-승인.
레온도 능력을 설정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돌. 미남으로. 능력은 음… 아이돌 스타로 할까?”
-승인. 9조 3항과 10조 2항에 의거합니다. 5대 시스템에 히든 코드 패치 완료.
모든 준비가 끝나자 이사칼과 레온은 서로를 돌아보며 키워드를 말했다.
“미싱 링크.”
-1조 1항에 의거합니다.
바깥 세계의 기억이 점차 옅어지면서 그들의 육체가 현실로 전송되었다.
레온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렸다.
“다음 생에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