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종의 낙인 (3)
시간이 흐른 뒤, 이루키가 말했다.
“울티마인가?”
“뭐?”
“순위 시스템으로 멸망하지는 않을 거야. 굴종의 낙인만 찍지 않았을 뿐 사회는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당장은 소요가 크겠지만 또 적응하게 되겠지. 늘 하던 대로.”
힘의 논리에 의해.
“하지만 굴종의 낙인은 심각해. 더 높은 순위를 얻기 위해, 혹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낙인을 찍은 자는 제르비스에게 굴종하기로 마음을 먹은 거야. 지금의 시스템하에서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고.”
“어, 어라?”
네이드도 깨달았다.
“그럼 제르비스라는 놈이 울티마를 갖게 된다는 거야? 고작 이 정도로?”
“울티마는 이론상 어렵지는 않아. 모두가 조금만 양보하면 된다는 그 사실 하나, 그걸 해내지 못해서 여태까지 인류가 이 지경으로 사는 거지. 하지만 놈은 그걸 관철시켰어. 자신이 만든 시스템으로.”
네이드는 이루키의 말을 곱씹었다.
다른 생각을 해 보려고 해도 이게 맞았다.
“…천재적인데?”
“전혀.”
이루키는 책상에서 벗어났다.
“악의 방법론이 그만큼 쉽고 빠르고 효율적인 것뿐이야. 시로네는 인정하지 않을 거야. 어쨌거나 상황이 어려워졌어. 내가 1등을 했어야 했는데. 제길! 2등이라니.”
“그래서 화가 난 거였냐?”
얘기를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괴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2등도 엄청난 거야. 그러고 보니 너, 대체 얼마나 빨리 낙인을 찍은 거야?”
“어제 단테가 왔어.”
이루키가 말했다.
“심각한 안건을 들고 왔는데,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었지. 긴장 상태였고, 생각의 속도도 내가 더 빨랐을 거야. 그런데도 2등. 따라서 현재 1등은 평생 이 순간만을 망상하며 살아온 놈이 아니면 설명이 안 돼. 즉,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놈이야.”
네이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놈.’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제 인류는 절대로 그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 것이다.***“미카.”
시로네가 읊조렸다.
-네.
“현재 낙인을 찍은 자들의 숫자는?”
-8억 9,331만 7,432명입니다.
“후우.”
식은땀이 흘렀다.
‘벌써 70퍼센트를 넘겼다. 남방의 엘리키아를 빌린다고 해도 상대가 안 돼.’
제르비스의 신호에 인류가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대략 상상이 갔다.
‘주위의 누군가가 선택하면, 자신도 선택할 수밖에 없어. 한 단계라도 더 높은 순위를 받기 위해. 그런 경쟁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거야.’
낙인을 찍은 자들이 충분히 많아지면 남은 건 불가촉천민뿐이다.
‘제르비스에게 굴종하지 않은 자들. 낙인을 찍은 자들의 입장에서는 곱게 보일 리가 없어. 지배하려 들겠지. 그렇게 사냥이 시작되고….’
불가촉천민 중에서 살기 위해 낙인을 찍는 자들이 다시 추가된다.
‘그런 현상이 반복되면….’
울티마는 완성된다.
시로네는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었다.
악의적인 시스템도 그렇지만 인간 심리를 다루는 정교함에 더 짜증이 났다.
제르비스가 물었다.
“억울한가?”
현재 그의 육체에서는 보랏빛 오라가 엄청난 크기로 승천하고 있었다.
“야훼의 기분이 궁금해서 말이야. 이거 하나 때문에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잖아?”
“오래갈 수 있을 것 같아?”
통합적 정신 체계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시로네가 가장 잘 알았다.
“상관없어, 통합 따위. 내가 필요한 건 힘이니까. 죽이고 싶은 만큼 실컷 죽이면 인류도 별로 안 남겠지. 그때는 다시 넘겨줄 수도?”
시로네의 눈이 부릅떠졌다. 수천 개의 포톤 캐논이 주위에서 발광했다.
제르비스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안 돼.”
포톤 캐논의 숫자만큼 많은 문어의 다리가 시로네를 향해 날아들었다.
“울티마는 나에게 있거든.”
두 사람의 능력이 충돌하고, 천지를 뒤흔드는 충격파가 구름을 흩날렸다.
제르비스가 모습을 감추자 에이미가 다가왔다.
“쫓아갈까?”
“몇 번을 죽여도 마찬가지야. 울티마가 저쪽에 넘어갔으니 우리도 시스템에서 자유롭지 않아. 일단 굴종의 낙인부터 대책을 세워야지.”
“순위 경쟁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거네. 우리 쪽에 상위권이 얼마나 있을까?”
아예 없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그보다 먼저 확인을 해야 할 게 있었다.
“미카.”
-네.
“1등이 누구야? 지금 어디 있지?”
-굴종의 낙인으로 1번을 받은 자는 스톡 리퍼입니다. 6년 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지금은 갈론 왕국의 모스코 감옥에 수감 중입니다.
‘스톡 리퍼?’
듣는 순간 시로네는 눈을 감아 버렸다.
‘하아, 스트레스.’
오메가의 역사가 끝나고, 공식적으로 사람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였다.***갈론 왕국.
사상 최악의 흉악범들이 모인 모스코 감옥은 온갖 소리로 아수라장이었다.
“열어! 죽여 버리기 전에!”
“드디어 우리의 시대가 왔다! 오오! 신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거야!”
굴종의 낙인으로 결정되는 힘의 균형은 간수보다 수감자들이 높았다.
잃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차마 철창을 열지 못하는 간수들은 한데 모여 어금니를 깨물고 있었다.
‘빌어먹을! 두들겨 팰 수도 없고.’
처음에는 멋모르고 철창을 열고 들어가 몽둥이찜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충격은 없었고, 오히려 의식불명이 되도록 얻어맞았을 뿐이다.
만약 동료 간수의 순위가 높지 않았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터였다.
수감자가 철창을 치며 외쳤다.
“너희들 각오해 둬! 나중에 내가 나가는 날에는 전부 목을 따 버릴 테니까!”
우오오오. 우오오오.
벽과 파이프를 타고 독방으로 전해지는 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과 흡사했다.
독방 301호를 지키는 간수가 몸을 떨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그의 낙인은 8억 번대.
한 달 전 독방에 홀로 배치된 탓에 애매하게 결정할 타이밍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억울해! 억울하다고! 왜 하필 지금이야? 내가 비번인 날 해도 되잖아!’
무섭다.
지금 당장 저 문을 나서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이 넘친다는 사실이.
독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끝났어. 시스템이 바뀌었다고.”
통칭 최초의 살인자.
울티마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인류의 노력을 처참하게 박살 내 버린 인간.
“닥쳐. 한마디도 하지 마.”
간수는 강하게 쏘아붙였으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가족들은 괜찮을 것 같아?”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알잖아. 가장 위험한 건 주변 사람이지. 몇 등일까? 어쩌면 불가촉천민 아니야? 당장 가 보는 게 어때? 아니, 달라질 것은 없겠군. 어차피 너도 순위가 높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 어떤 일을 겪을까?”
간수는 좌절했다.
12억이 넘는 인구 중에서 상위권을 차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 그런 엄청난 일 따위는 나에게….’
“지켜 줄까?”
간수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창살 틈으로 직사각형 무테안경을 쓴 남자가 보였다.
스톡 리퍼.
오른쪽 손등에 찍혀 있는 1이라는 숫자를 검지로 두들기며 그가 말했다.
“너와 가족의 안전. 확실히 보장하지.”
“….”
그로부터 20분 후, 모스코 감옥에 남아 있는 죄수는 한 명도 없었다.***단테는 용뢰로 들어갔다.
네이드 가족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그는 곧바로 이루키에게 물었다.
“진짜야?”
이미 연락을 주고받은 상태였으나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었다.
이루키가 손목에 있는 2를 보여 주자 단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정에 긴급 성전이 열려. 불가촉천민을 보호하는 방안을 검토하겠지. 각국 실무진이 공간 이동 포털을 타고 올 거야. 너도 참석해야 돼. 1등을 뺏긴 건 아쉽지만, 회담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을 테니까.”
이루키는 납득했다.
“왕국이 국민을 보호한다는 입장을 확실히 하면 혼란도 조금은 줄어들겠지. 하지만 알잖아? 세력을 만드는 건 우리만이 아니야. 이 시스템을 파괴할 방법이 필요해. 시로네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신혼여행이 문제가 아닌 만큼, 이미 성전에 도착했어야 하는 시간대였다.
“이미 지나갔어.”
“응?”
“1시 37분경, 음속 7배의 속도로 바슈카 상공을 지나 남쪽으로 간 정황이 포착됐어.”
네이드가 끼어들었다.
“성전은 토르미아에서 열리잖아. 남쪽으로 내려가 봤자 있는 거라고는… 아.”
그 녀석이 있다.
같은 결론에 도달한 이루키가 말했다.
“케시아로군.”***케시아 왕국.
금화륜 미래 연구소.
케시아를 포함해 세계에서 가장 크고 높은 건물 앞에 시로네가 착지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예상했다는 듯 비서진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펜트하우스로 올라가자 페르미와 세리엘이 바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페르미가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이야, 이게 누구야?”
“설명해.”
인사조차 무시하고 지나치자 팔을 내린 페르미가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하긴, 야훼도 급하다는 건가?”
“어서 와, 시로네. 신혼여행 중인데 이래서 어떡해?”
시로네는 웃으며 세리엘의 손을 잡았다.
“어쩔 수 없지 뭐. 결혼식 때 고마웠어. 그렇게 많이 안 해 줘도 되는데.”
“너희들 결혼식인데 어떻게 그래? 대표로 간 것도 있고. 미안해. 나도 몰랐어. 페르미 저 자식이….”
“알아.”
미래 연구소 팀원 중에서 결혼식에 참석한 건 세리엘뿐이었다.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페르미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을 터였다.
“에이미는 오는 데 10분 정도 걸릴 거야. 미리 옷을 좀 준비해 줄래?”
“아, 그렇지.”
에이미의 화신술을 알고 있는 세리엘은 눈치 빠르게 방으로 뛰어갔다.
시로네가 다시 돌아서자 페르미가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뭐?”
페르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 아니야. 일단 확실히 해 두는데, 나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었어. 준동경계가 워낙 가변적이라 매번 정보가 바뀐단 말이야.”
시로네는 페르미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몇 번인데?”
페르미는 입을 다물었다.
“그냥 말해. 화 안 낼게. 너같이 똑똑한 놈이 낙인을 안 찍었을 리가 없잖아.”
악의 울티마에 일조하는 한이 있더라도 경쟁의 우위를 택할 놈이었다.
“높지는 않아.”
페르미는 옆구리를 드러냈다. 13이라는 숫자가 붉게 새겨져 있었다.
시로네의 시선이 다시 올라갔다.
“에라, 인간아.”
최소한 10위권 안에는 들어가 줘야 전략적으로 쓸모가 있을 게 아닌가.
페르미가 항변했다.
“나도 이런 건지 몰랐어. 알았어도 어차피 나노 초 차이였을 거야. 뽑기 운이지.”
과연 그럴까?
‘13위. 굴종의 낙인을 바로 찍은 것은 맞아. 하지만 마음의 여유는 있었다. 이유는….’
이 전쟁의 전면에 나서지 않기 위해.
만약 10위권 안에 들게 되면 좋든 싫든 국가적으로 활용이 될 수밖에 없다.
‘회사를 지킬 정도만 순위를 잡고 정보 분석에 심혈을 기울이겠다는 판단.’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시로네도 이제는 욜가의 아들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당장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아.’
그렇기에 사고는 광역 하고, 물처럼 자유롭게 인과의 흐름을 떠다닌다.
시로네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포칼립스의 상황은 어떻지? 아니, 내가 직접 봐야겠어. 드림 스타를 줘.”
페르미는 피식 웃었다.
“나 참.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그런 약 자주 먹으면 안 좋아. 정력도 감퇴되고.”
시로네는 울컥했다.
‘네가 먹였잖아.’
페르미가 말을 이었다.
“걱정 마. 큰 부작용은 없어. 문제는 중독성이지. 아무래도 뇌에 작용하는 거니까.”
“그럼 채굴은 어떻게 하는데?”
“이렇게.”
페르미가 마법을 시전하자 손바닥 위에 작은 칩 하나가 유유히 맴돌았다.
“뉴럴링크.”
감가상각의 거래를 승화시킨 페르미가 새롭게 개발한 규정외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