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종의 낙인 (2)
***시로네는 괴형체에게 접근했다.
수만 개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광경은 가히 형태만으로도 폭력적이었다.
‘보고 있다.’
무언가를 정의하고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야훼라는 개념이 부정당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따라서 위험 요소였다.
포톤 캐논을 시전하자 섬광으로 뻗어 나간 구체가 괴형체의 눈에 처박혔다.
퍼…어…엉….
안구의 표면에 수면처럼 파문이 일며 포톤 캐논이 맥없이 흩어졌다.
“아, 그래?”
시로네는 팔을 들었다.
허공에 핸드 오브 갓이 탄생하고, 그 위로 직경 200미터의 포톤 캐논이 떠올랐다.
“소용없어.”
시로네는 고개를 돌렸다.
연녹색 머리를 기르고 입술에 피어싱을 한 남자가 허공에 떠 있었다.
눈썹이 없는 것보다도 눈에 여러 개의 동공이 박힌 다중안이 더 섬뜩했다.
“누구야, 당신?”
“제르비스.”
시로네는 오메가의 기록을 검색했다. 그리고 곧바로 양자 신호를 전송했다.토르미아 마법협회.
루피스트와 플루, 알비노가 대책을 강구하는 곳에 빛이 응집하기 시작했다.
“동시 사건?”
모습을 드러낸 시로네가 말했다.
“주동자를 찾았어요. 이름은 제르비스. 오메가의 기록에 없어요. 저보다 늦게 태어났거나, 최근에 신원을 바꾼 것 같아요. 그걸 토대로 추적해 주세요.”
플루가 물었다.
“주동자? 어떻게 찾았는데?”
“지금 저랑 대치 중이에요. 바이덴 왕국 상공입니다. 그런데 기질이 좀….”
뭐라고 해야 하지?
“기괴해요.”
루피스트가 말했다.
“바이덴뿐만이 아니야. 괴형체는 7기. 세계 각지에 출몰했어. 의도가 뭘까?”
“괴형체는 천사의 위상을 가지고 있어요. 7기의 천사로 관철시키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야훼를 부정하는 강도로 보건대 마(魔)의 성향일 겁니다.”
알비노가 말했다.
“그렇다면 제거 대상이군. 자네의 앞에 있다면 처리해 버리면 되지 않나?”
“그게 좀….”
뭐라고 해야 할까?
“기괴해요.”바이덴 상공.
핸드 오브 갓의 포톤 캐논이 장전된 가운데 시로네가 제르비스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런 환영을 만들었지?”
에이미가 물었다.
“환영?”
“저 괴형체는 실체가 아니야. 다만 우리가 실체와 구별할 수 없을 뿐이지. 아마도 전자를 준동시켜 착각을 일으키는 능력일 거야.”
진짜라는 착각.
“그래? 그럼 싸우면 되겠네.”
“싸울 방법이 없어.”
울티마까지 가지 않아도 제9감, 초인지를 가진 시로네는 느낄 수 있었다.
“전자를 준동시킨다는 것은 율법적 인과를 그대로 구현시킬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진짜와 구별하지 못하는 거지. 아마 저 녀석도 실체가 아닐 거야.”
제르비스가 비소를 지었다.
“준동경계의 핵심을 간파하다니, 역시 야훼로군. 부처를 꺾은 것도 요행이 아니야. 물론 엄밀히 따지면 울티마 시스템이 한 거지만.”
“….”
“아, 미안하군. 폄하하는 건 아니야.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넌 대단한 놈이니까.”
시로네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원하는 게 뭐야?”
“글쎄? 이를테면….”
제르비스가 화신술을 발동하자 문어의 다리처럼 생긴 것들이 꿈틀거렸다.
시로네는 화신을 분석했다.
‘축축하다. 미끄럽다.’
빨아들인다, 흐물거린다, 파고든다, 조인다, 팽창한다, 비벼진다, 쫄깃하다, 휘감는다 등.
‘따라서….’
완벽한 마(魔)의 성향을 가진 화신이었다.
“충동적인 살의랄까?”
허공에서 튀어나온 문어의 다리가 에이미를 휘감더니 꾸득 소리를 내며 조여들었다.
“흥.”
피닉스의 불꽃.
불의 화신이 된 그녀가 문어의 다리를 녹여 버리며 제르비스에게 돌진했다.
“옷값은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2차로 들어오는 문어의 촉수를 피해 그녀는 제르비스의 등 뒤로 돌아갔다.
“말과 달리 실력은 형편없네.”
“큭!”
목을 끌어안고 피닉스의 불꽃을 일으키자 엄청난 화염이 공간을 불태웠다.
“으아아아!”
동시에 풍경이 구겨지더니 마치 그녀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듯 사라졌다.
전혀 다른 사건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
엄청난 기시감.
불의 화신술을 발동한 상태, 핸드 오브 갓의 포톤 캐논도 그대로였다.
오직 제르비스만이 불에 타기는커녕 멀쩡한 상태로 공중에 떠 있었다.
시로네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우리는 구별할 수 없다. 이거, 진짜 위험한데.’
제르비스의 사망은 가짜가 될 수 있지만, 만약 누군가가 죽는다면 준동경계가 풀리지 않는 이상 이 세계의 유일한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제르비스가 말했다.
“파트너도 깨달은 모양이군. 그만 포기해. 너희들은 절대로 나에게 닿을 수 없어.”
“과연 그럴까?”
시로네의 말이 끝나는 순간 핸드 오브 갓에 떠 있는 포톤 캐논이 끝없이 커졌다.
“너무 여유 부린 거 아냐?”
굵은 섬광이 천사를 강타했다. 주변 대기 온도가 올라갈 정도의 속도였다.
“크…!”
반응은 그보다 느렸다.
천사의 눈동자에 거품이 부글부글 일어나더니 세 쌍의 날개가 흔들렸다.
깃털이 닭털처럼 뽑히고, 급기야 형체가 뒤틀리더니 폭발이 일어났다.
지상의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파였다.
그와 동시에, 그 모든 장면을 담은 사건이 구겨지듯 기억으로 빨려 들어갔다.
“쯧.”
시로네는 혀를 찼다.
태양이 떠 있는 곳 아래에 여전히 준동경계중천사가 부유하고 있었다.
“확실히 쉽지는 않네.”
고개를 돌리자 한쪽 눈을 찡그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제르비스가 보였다.
“그래도 충격은 줄 수 있어.”
“…굉장하군.”
위력으로 뚫었다.
제르비스는 진짜와 가짜를 결정짓지만, 예측을 초과하는 사건이 발생할 경우 본인의 정신에도 충격이 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작 쇼크다.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야. 그런데도 이 정도 대미지라니.’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시로네가 말했다.
“뭘 하려는지는 모르지만 그만둬. 너도 무적은 아니야. 후회하게 될 거다.”
“크, 크크크.”
제르비스가 고개를 들었다.
“희망 사항인가? 너도 사실 알고 있잖아? 내가 굳이 네 앞에 나타날 이유가 없다는 걸 말이야. 위저드 다음으로 널 찾은 이유가 뭘까?”
‘위저드에게 갔었나?’
그런데 어째서 협회에 보고하지 않았을까.
“보여 주마.”
제르비스가 두 팔을 펼치자 세계 각지에 흩어진 7기의 천사가 작동했다.
도합 수십만 개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며 율법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나는 제르비스다.
인류의 뇌파에 똑같은 신호가 흘렀다.
-이제부터 너희에게 굴종의 낙인을 찍을 것이다. 나에게 굴종하는 의지를 갖는 순간 신체 특정 부위에 숫자가 새겨진다. 그것이 바로 굴종의 징표이며 나에 대한 충성도를 가늠하는 순위가 된다.
모든 인간이 듣고 있었다.
-순위가 낮은 자는 더 높은 순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 어떤 수단으로도 해칠 수 없다는 뜻이다. 칼도, 함정도, 독약도 소용없다.
시로네는 황당하게 듣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짓을 해서….”
미카의 신호가 뇌파에 접속되었다.
-울티마 시스템 가능성 감지.
“뭐?”
육성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굴종의 낙인을 찍은 자들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17.8퍼센트를 넘어섰습니다. 현재 18.7퍼센트. 19.3퍼센트. 19.9퍼센트. 상승 속도만 고려했을 때 대략 36분 뒤에 울티마 시스템에 도달합니다.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사용자 코드가 모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오호, 이런 기분인가?”
시로네가 고개를 들자 제르비스의 몸에서 보랏빛 광채가 커져 가고 있었다.
“설마, 너….”
제르비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쉬운데, 울티마?”***토르미아 마법협회.
“제르비스는 울티마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거예요. 지금 성전에 알려서…!”
시로네의 육체가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자리를 한동안 지켜보던 플루가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동시 사건을 막았어요. 인류가 다시 야훼를 중심으로 뭉칠 가능성 때문이겠죠.”
알비노가 동의했다.
“최후의 전쟁 당시에도 큰 역할을 했지. 준동경계로 사건을 말소시킨 모양이군. 그렇다고 해도 이토록 쉽게 할 수 있다니, 과연 울티마인가?”
루피스트가 말했다.
“문제는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 정도라는 겁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그럼 슬슬 우리도 확인해 볼까?”
알비노는 손등을 내밀었다. 3101이라는 숫자가 낙인으로 찍혀 있었다.
루피스트가 말했다.
“빠르군요.”
“듣자마자 선택했지. 그럼에도 3천 번대라. 생각의 속도도 중요하지만, 굴종이라는 표현에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거야.”
루피스트는 왼쪽 아랫팔을 드러냈다. 43399라는 굴종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알비노 씨와 몇 초 차이 안 났을 겁니다. 그런데도 4만 3천 번대. 심각할 정도로 빨라요.”
플루가 말했다.
“일단 저는 안 찍는 쪽으로 가 볼게요. 어차피 유의미한 순위를 얻기는 늦었으니까요.”
제르비스의 신호가 이어졌다.
-굴종의 낙인을 찍지 않은 자는 불가촉천민이다. 그들은 이단으로 간주, 마음껏 죽여도 좋다. 너희들에게 어떤 보복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플루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정신병자 아냐? 고작 이딴 룰로 사람들이 전부 살인자가 될 줄 아나?”
“상위권의 성향에 달렸지.”
알비노는 낙인을 보았다.
“검증하기 위해 무조건 낙인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나조차도 잠깐 주저했어. 심리적인 장벽. 평범한 사람들은 굴종이라는 단어 앞에 판단을 미룰 거야. 그렇다면 현재 상위권을 이루는 자들의 성향은?”
루피스트가 말했다.
“체제를 전복시킬 마음을 품고 있던, 평범하지 않은 부류라는 거군요.”
날마다 분노를 쌓아 온 자들.
“뭐,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어쨌거나 이런 식이라면….”
알비노는 수염을 꼬았다.
“인류도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군.”***용뢰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루키!”
네이드가 들어오고, 데이지를 품에 안은 리즈가 황급히 문턱을 넘어섰다.
“아.”
도로시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도 혼란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으앙! 도로시 이모.”
엄마의 품에서 빠져나온 데이지가 아장아장 달려가 도로시에게 안겼다.
“무서워요, 이모. 자꾸 무서운 소리가 들려요.”
도로시는 아이의 등을 토닥거렸다.
“괜찮아. 우리 꼬맹이, 많이 놀랐지? 그냥 방송 같은 거야. 누구도 너에게 나쁘게 못 해.”
이루키는 책상을 짚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리즈를 보았다.
“오셨어요.”
“죄송해요, 허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하지만 근처에 안전한 곳이 여기밖에….”
네이드가 말을 끊으며 다가갔다.
“제길! 늦었어! 이것 좀 봐.”
종아리 쪽을 걷어 올리자 354762201라는 굴종의 낙인이 세로로 찍혀 있었다.
“3억 5천만 등이야. 처음에는 무슨 개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불가촉천민에 대한 룰을 듣고 낙인을 찍었어. 이런 식이라면 데이지는 꼼짝없이 당하는 거잖아.”
4살 아이가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리즈가 말했다.
“저도 네이드와 거의 동시에 했어요. 그런데도 3억 9천만 번대. 회사 사람 중 절반이 우리보다 높아요. 아직 심각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이상해서 일단 데이지를 데리고 빠져나온 거예요.”
네이드가 물었다.
“이루키, 너는? 낙인 찍었어?”
“그래.”
“몇 번이야?”
잠시 생각하던 이루키는 소매 단추를 풀고 오른쪽 손목 안쪽을 내밀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
2.
네이드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희열인지 짜증인지 모를 만큼 얼굴이 구겨지고, 시선이 다시 이루키에게 향했다.
“미친…놈.”
이루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