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종의 낙인 (1)
저택에 도착하자 레이나가 허리에 손을 얹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어? 또 싸웠냐?”
“애야? 싸우게.”
리안이 그녀를 지나치며 물었다.
“누나까지 왜 내려온 거야? 시로네 부모님은 내가 모시고 와도 되는데.”
현재 오젠트 저택에는 빈센트와 올리나, 이카엘도 함께 머물고 있었다.
“다 같이 모이면 좋지 뭐. 언제 또 이러겠어? 빨리 들어가기나 해.”
리안과 테스는 몸을 씻고 식탁에 앉았다.
첫째와 셋째를 잃은 뒤로 오랜만에 오젠트 가문의 식탁이 가득 찼다.
레이나의 남편감 찾기가 화두였고, 식사를 끝낸 그들은 거실에서 차를 마셨다.
테스가 물었다.
“이카엘 씨는요? 음식이야 안 드셔도 되지만, 어제부터 안 보이시네요.”
리안의 할아버지 클럼프가 말했다.
“결혼식에 갔다 온 이후로 통 안 나오시는구나. 마음이 허전한 것이겠지.”
“저는 이해가 돼요.”
올리나가 말했다.
“시로네가 짝을 찾아 떠났으니 거핀이라는 분에 대한 그리움이 더할 거예요. 천사는 수명이 없으니, 그리움도 끝이 없지 않을까요? 저라면 못 견딜 것 같아요.”
침묵이 흘렀다.
이카엘의 사랑은 죽음으로 귀결되는 필멸자의 사랑보다 훨씬 가혹했다.
테스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래. 이카엘 씨는 마음을 던진 천사. 결국 스스로 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영원한 고독에 몸부림쳐야 한다.오젠트 가문의 객실에서, 이카엘은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보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이 성광체의 조명 아래 밝게 빛나고 있었다.
‘여보, 시로네가 결혼했어요. 에이미라는 아이와. 정의롭고 용맹한 여성이에요.’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를 낳겠지요. 또 그렇게 이어질 거예요. 그렇게 끝없이 당신의 마음이….’
그녀의 성광체가 흔들렸다.
앞으로 감당해야 할 영겁의 세월이 스치자 엄청난 공포가 밀려들었다.
“아아.”
대체 언제까지?
빛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울 속 모습에서 그녀는 잔인한 사실을 깨달았다.
‘영원히.’
거핀을 만날 수 없다.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난 그녀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참았다.
‘보고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거핀을 끌어안고, 그 사람의 품에서 펑펑 울어 버리고 싶었다.
‘사티엘, 차라리 네가 부럽구나.’
최후의 전쟁에서 앙케 라의 시스템을 교란시키고 소멸한 분해의 대천사.
그녀 덕분에 이카엘은 마음을 이어 갈 수 있게 되었으나 이제는 한계였다.
‘사티엘, 차라리 나도 너처럼….’
성광체가 피를 머금은 듯 붉은빛으로 변하더니 생기를 잃기 시작했다.
“안 돼!”
이카엘은 벌떡 일어났다.
당장 소멸해도 미련은 없지만 시로네가 슬퍼하는 광경이 뇌리를 스쳤다.
‘안 돼. 이카엘, 안 돼.’
아들의 행복한 미래를 떠올리며 그녀는 가까스로 성광체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누가 보듬어 주는가?클럼프가 말했다.
“덮어 두려고 했는데 말이 나온 김에, 며칠 전에 이카엘 씨에게 중매가 들어왔다.”
“네? 뭐가 와요?”
“토르미아 국토공사부의 젊은 차관인데, 아내와 일찍 사별했어. 애도 없고. 저번 착공 행사에 왔다가 이카엘 씨를 보고 반한 모양이야.”
레이나의 표정이 황당하게 변했다.
“무슨 소리예요? 물론 이카엘 씨야 너무 아름답지만, 그 사람, 좀 이상한 거 아니에요?”
리안이 물었다.
“뭐가 문제야? 어차피 둘 다 재혼이잖아.”
테스가 짜증을 냈다.
“너는 신경이라는 게 아예 없니? 이카엘 씨는 천사잖아. 인간이 아니라고.”
“그게 어때서? 애초에 거핀도 가이아인이잖아. 누구나 살아갈 이유는 필요해.”
딴에는 옳은 소리지만 이카엘의 강직한 성품에 상처를 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클럼프가 정리했다.
“그냥 그런 기별만 받았을 뿐이야. 다음에 만날 때 내 선에서 끊으마.”
2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만나 볼게요.”
모두 그곳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이카엘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가주 비쇼프가 말했다.
“굳이 애쓰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혼담이야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니까요.”
“애쓰다니요.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정중히 거절하면 될 일입니다. 호감이란 쉽게 생길 수 없는 것. 일단 마음을 던져야겠지요.”
그것 또한 거핀이 가르쳐 준 것이기에.
“으음, 정 그러시다면….”
클럼프가 턱을 만지면서 말을 하는 그때, 이카엘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뭐지?’
성광체가 청명한 쇳소리를 내며 펼쳐지더니 오색찬란한 아타락시아가 집적되었다.
1층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세요?”
혹시 마음이 상한 게 아닐까 싶었으나, 이카엘의 표정은 충격에 가까웠다.
‘방금, 뭔가 일어났다.’
세계 전체에.
대천사만이 느낄 수 있는 아주 작은 변화는 일종의 ‘떨림’에 가까웠다.
아타락시아로 1만 배 증폭시킨 감각이 떨림의 기질을 정확히 파헤쳤다.
‘진동? 아니, 준동이야.’
이카엘이 빛의 날개를 펼치며 말했다.
“금방 올게요.”
활강하듯 1층으로 내려와 저택을 빠져나간 그녀는 하늘로 솟구쳤다.
구름 위를 음속으로 비행하는 것도 잠시, 빛의 날개가 강한 제동을 걸었다.
너무 거대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독특한 기질에 기시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대륙 표준시 10시 43분.
행성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직경 10킬로미터가 넘는 7개의 괴물체가 출몰했다.***대륙 표준시 10시 11분.
시로네와 에이미는 예술의 성지, 헤로디카의 명물인 길거리 미술관에 도착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벽마다 다양한 화풍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시로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 정말 많다.”
“응. 워낙에 좋은 작품들이 많아서 바이덴 왕국에서 특수 도시로 지정했다나 봐. 유지 보수에 드는 돈이 재건 비용보다 더 높다던데.”
한동안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20미터 길이의 무너진 벽 앞에 멈춰 섰다.
“엄청 큰 그림이네.”
늙은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고함을 치는 그림이었고, 그 앞에 폭 1미터의 검은 물감이 검열하듯 수직으로 진하게 칠해져 있었다.
검은 벽에서 빠져나온 호스 같은 선을 따라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지옥 불에서 타는 아이들, 해골이 된 천사, 꿈의 세계 등 5대 시스템을 모티브로 한 그림이 20미터 길이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머.”
마지막 지점에 도착하자 호스의 끝은 남자의 성기로 표현되어 있었다. 붉은 악마가 쪼그려 앉아 그것을 붙잡고 긴 혀를 날름거리는 게 보였다.<욕망과 회한, 인과의 역전> 포니카 세투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은 몸을 돌려 20미터 앞으로 되돌아갔다.
남자의 표정을 다시 보고 싶었다.
‘쾌락일까, 절규일까?’
그림을 되짚어 보며 돌아가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하늘을 보며 소리쳤다.
“저, 저게 뭐야?”
무심코 몸을 돌린 시로네 또한 충격을 받았다.
높은 고도에 무언가가 떠 있었다.
군인의 직감이 발동한 에이미가 피닉스의 화신을 일으키며 말했다.
“가 보자.”
“잠, 잠깐! 옷 없어!”
요라한의 꿈을 이룬 아르망이 소멸했기에 옷이 타 버리면 낭패였다.
대신 시로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꽉 잡아.”
광익을 한 번 펄럭이는 것으로 하늘로 솟구친 두 사람은 빠르게 비행했다.
‘하필 신혼여행 때.’
고작 그 정도였다.
아내의 알몸이 드러날까 봐 걱정하고,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겨 투덜대는.
가끔 일어나는 해프닝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 어?”
하지만 800미터 앞에서 그것과 마주한 순간 시로네는 착각을 깨달았다.
정상적인 인과로 도달할 수 없는 형태만큼이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초형태.’
반경 10킬로미터 구체의 면적 3분의 2를 차지하는 거대한 눈동자였다.
좌우로 세 쌍의 날개가 너울거렸고, 깃털에 박힌 수만 개의 눈동자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안구를 뒤틀며 지상을 분석하고 있었다.
“저게 대체….”준동경계중천사(蠢動境界中天使).
제1식 타락.***대륙표준시 10시 35분.
구스타프 제국의 부동항, 마르바샤.
휴가를 얻은 가올드와 미로는 다국적 쇼핑센터에서 아기용품을 구경했다.
“너무 귀엽다.”
작은 양말을 만지며 미소 짓는 미로를 가올드는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지금도 가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저 여성이 자신을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전쟁이 끝나서 다행이야.’
지금은 많은 자들이 잊고 살지만, 가올드는 본래 지극한 평화주의자였다.
“꺄아아악! 저, 저기! 괴물!”
한 여자의 비명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하늘을 가리키며 고함을 내질렀다.
검은 눈동자, 보랏빛 연기 같은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초형태가 떠 있었다.준동경계중천사.
제2식 질투.“히익! 악마, 저건 악마야!”
전쟁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기에 공포가 전염되는 속도는 빨랐다.
“으아아! 도망쳐! 빨리!”
사람들이 쇼핑센터를 떠나는 와중에도 미로는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올드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 해? 빨리 가야지.”
“하지만….”
시대의 극선으로 수많은 행사에 참석했던 그녀로서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로야!”
일갈에 어깨를 움찔한 그녀가 돌아보자 가올드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신 차려.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니야. 그러니까 일단 나가자. 너….”
그의 시선이 배로 향하자, 얼굴이 창백해진 미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가올드의 손에 이끌려 따라가는 와중에도 미로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확인하지 못했을까?’
사실은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가올드에게 전부 떠넘겨 버린 것이다.
“가올드.”
“아무 말도 하지 마.”
가올드는 미로를 돌아보지 않았다.
“네가 갈등한 이유는 우리 아기이기 때문이야. 네 아기가 아닌, 우리 아기. 비난이든 뭐든 전부 내가 받을 테니까, 넌 너만 신경 쓰면 돼.”
후세를 지키려는 본능.
태초의 암수가 필멸을 대가로 얻은 분업 시스템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응.”***토르미아 마법협회.
“보고해.”
루피스트가 협회장실로 향하는 가운데 플루가 서류철을 펼치고 말했다.
“성전의 브리핑 내용입니다. 대륙표준시 10시 43분경 세계 각국에 초형태의 괴물체가 나타났습니다. 크기는 직경 8킬로미터에서 14킬로미터까지 다양하며, 부속질까지 더하면 30킬로미터가 넘는 것도 있습니다. 개체 수는 총 7기이고 현재까지 특별한 적대 반응은 없습니다.”
협회장실로 들어가자 이미 도착한 알비노가 창문 앞에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오셨군요.”
“어디까지 알아냈지?”
플루가 조금 전의 설명을 다시 반복했다.
“흐음, 7기라. 정확한 장소는?”
“카샨의 모니사, 바이덴의 헤로디카, 구스타프의 마르바샤, 토르미아의 크레아스, 아이론의 부드라, 진천의 황도, 남방의 아루페입니다.”
행성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린 알비노는 출현 지역을 선으로 연결했다.
“인위적인 패턴이군.”
“네?”
“인구 밀집 지역을 피한 것 같지만, 문명권 전체를 커버하는 포석이야.”
루피스트가 말했다.
“어쨌거나 사람이 한 짓이라는 건가요?”
“그렇지. 또한 7기라. 마치 7대 죄악에서 비롯된 7악마가 떠오르는군.”
플루가 말했다.
“그건 좀 비약 아닌가요? 7이라는 숫자에 의미는 많잖아요. 럭키 세븐도 있고.”
루피스트가 물었다.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딱히. 비서실장 말대로 비약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뭐랄까, 7대 죄악이라면 교만, 질투, 분노, 타락, 탐욕, 폭식, 색욕을 뜻하는 게 아니겠나?”
알비노는 조소했다.
“그것만큼 인간적인 것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