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준동자 (3)
단테가 말했다.
“7개국이 담합해서 성명문을 낼 것 같아. 핵심은 사후 세계. 한마디로 우리가 죽으면, 여전히 바깥 세계에서 깨어날 수 있느냐는 거지.”
최후의 전쟁을 치르면서 알게 된 정보는 성전 소속 국가들이 공유했다.
이면 세계나 아포칼립스를 포함한 5대 시스템, 관리자의 존재, 바깥 세계까지.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어. 각국 수뇌부가 정보 유출을 막았으니까. 1차적으로는 권력 변동을 막기 위해서고, 2차적으로는 어쨌거나 우리는 한순간이라도 울티마에 도달한 문명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6년 전, 리퍼라는 변호사가 최초의 살인을 저지른 이후 상황이 변했다.
“얼마 전부터 각국 언론사를 통해 고급 정보들이 조금씩 대중에게 풀리기 시작했어. 당시 전장에 있었던 사람들만 아는 내용까지. 이를테면….”
“관리자의 마지막 전언이로군.”
단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테는 이렇게 말했다. 관리자는 사라지지만 시스템은 유지된다고. 실제로 5대 시스템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어. 문제는 그다음이야. 이곳은 더 이상 바깥 세계와 연결되지 않은 독립적인 우주. 그렇다면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지? 여전히 바깥 세계에서 깨어날 수 있는 건가? 아니면 그저 사라질 뿐인가.”
이루키가 말했다.
“누구도 모르지,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은 이상은. 유일하게 답을 알고 있는 건….”
시로네.
“그 녀석뿐이니까.”
“그래. 인류를 신으로부터 독립시킨 장본인. 하지만 시로네도 어떤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어. 따라서 성전 가입국은 이번 종전 10주년 기념행사에서 그 내용을 밝혀야 한다는 성명서를 낼 거야. 세계지도국인 토르미아에.”
단테의 고민이 이해가 되었다.
“포니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애초에 그런 설계를 위해 대중에게 정보를 흘린 것일 테니까. 이번에도 함구한다면 전 세계적으로 폭동이 일어날걸.”
“아니, 공개를 해도 토르미아는 타격을 입어. 시로네가 어떤 사실을 말하든, 인류의 삶은 여태까지와 전혀 다른 양상이 될 테니까.”
이루키는 허탈하게 웃었다.
“10년 동안 재건한 것을 다 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밀어붙이겠다는 거군. 토르미아를 끌어내고 자신이 세계지도국의 왕이 되기 위해.”
“그게 인간이니까.”
단테가 말을 이었다.
“지각변동은 이미 생겼어. 인류를 구원한 야훼는 이제 자신의 생각만으로 사후 세계를 없애 버린 파렴치한 놈이 될지도 모른다고.”
“….”
이루키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괴었다.
‘나네가 옳았을까?’
당연히 시로네의 편이다.
그럼에도 의문하는 이유는, 지금 이루키 또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후의 비밀을 알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바이덴 왕국.
예술의 성지라 불리는 헤로디카에 도착한 시로네와 에이미는 호텔을 잡았다.
야훼의 방문은 엄청난 홍보가 되기에 이미 직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알칸토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숙박 기간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지배인이 앞서 인사를 했다.
“저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짐은 주시지요. 저희들이 방으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가벼운데요.”
그렇게 입구 앞에서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제는 유명 인사이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모두의 눈빛이 전과 달랐다.
“야훼시여!”
젊은 여자가 경비를 피해 달려왔다.
“우리 아이가 세상을 떠났어요. 그 불쌍한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바깥 세계로 갈 수 있는 거지요? 그곳에서 살아가는 거지요?”
반대편에서 노파가 팔을 잡았다.
“야훼님, 저는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꼭 듣고 싶어요. 바깥 세계는 있는 건가요? 저는 이대로 죽어 흙이 되는 겁니까?”
시로네는 침묵했다.
직원들이 곧바로 막지 않은 이유는 그들 또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다가 시로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뒤늦게 끼어들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물러서세요!”
경비대까지 출동해서 인파를 밀어내자 술에 취한 무리가 삿대질을 했다.
“이 사기꾼! 다 엉터리야!”
“그래! 이미 신문에 다 나왔다고! 너는 어차피 바깥 세계에 가지도 못한다면서?”
시로네는 호텔로 들어갔다. 지배인이 에스코트할 때까지도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야훼님. 경비를 보강하겠습니다. 호텔로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첫날밤이었기에 시로네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에이미가 침대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어딜 가나 이 난리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극비 서류를 유출시킨 거야?”
시로네는 씁쓸하게 웃었다.
“정치적인 이유가 있겠지.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이제는 익숙하잖아.”
“네가 걱정되어서 그러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데 얼마나 답답하겠어? 바깥 세계에서 깨어난다고 말하면 당장 목숨을 끊는 자들도 있을 텐데. 바보들. 그래서 나한테도 말 안 해 주는 거잖아.”
대답은 없었다. 에이미가 슬그머니 눈을 돌리자 시로네가 웃고 있었다.
“알고 싶어?”
에이미는 황급히 침대로 쓰러졌다.
“미안, 방금 말 취소! 절대로 말하지 마! 난 안 들을 거니까. 알았지?”
물론 시로네가 밝히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오해와 의심, 불신이 생길 수 있었다.
“과연 그럴까?”
시로네는 창으로 걸어갔다. 야경 속에 다시 일어서는 에이미가 보였다.
“난 이렇게 생각해. 바깥 세계에서 깨어난다고 해도, 인류가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을 거라고. 목숨을 끊기보다는 더 열심히 사는 쪽을 선택하겠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럼 좋은 거 아냐? 차라리 그냥 밝히는 것도….”
에이미는 말을 멈췄다. 공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 하지만 만약….”
시로네는 천천히 돌아섰다.
“만약 인류가 바깥 세계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일까?”10년 전.
우주의 끝에서 나네를 붙잡은 시로네는 아르망이 약속한 마지막 기회를 발동했다.
소세계창유.
그들은 서로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동시에 광자계를 이탈했다.
“여긴?”
도착한 곳은 어둠 속에서 푸른 선들이 느리게 질주하는 공간이었다.
“신.”
나네가 말했다.
“다중 우주 연산장치의 메인 시스템이지. 이곳에서 바깥 세계와 네 세계를 분리시킬 수 있다. 더 이상 통제받지 않는, 독립적인 우주가 되는 거지.”
“방법은?”
“알고 있잖아.”
이모탈 펑션.
신의 메인 시스템을 장악해서 하나의 우주를 독립시키면 되는 것이었다.
나네가 말했다.
“하지만 너는 소멸하겠지. 우린 광자계를 이탈했어. 네가 돌아갈 우주는 존재하지 않아. 네가 가게 될 곳은 무한을 넘은 무한무, 즉 초공(超空)이다.”
“돌아갈 거야.”
에이미와 약속했으니까.
“불가능이란 말은 하지 않으마. 애초에 이 우주가 탄생한 것 자체가 기적의 확률이니까. 하지만 정말 그 확률을 기대하는 거냐? 흩어졌다가 모이는 게 아니야. 정말로 무가 되었다가 다시 유가 되는 거다. 그리고 그 유가 온전히 너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
“고마워, 나네.”
무한무로 사라지는 것은 나네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부처의 길을 택한 것이다.
“바깥 세계로 갈 수 있는데도 날 여기 데려다주었잖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게. 네가 구하고자 했던 사람들, 내가 반드시 지킬 거야.”
“뜻이 그렇다면.”
지그시 미소를 지은 나네는 가부좌를 틀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괴었다.
시간을 끌 필요 없는 건 시로네도 마찬가지였기에 이모탈 펑션을 준비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나네가 물었다.
“이 세계를 사랑하는 모두의 마음, 그것이 울티마가 되어 나를 밀어냈지. 반박할 여지는 없어.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갈대
같아서 다시 신을 찾게 될지도 몰라. 삶이 조종당하고, 자유의지를 잃게 되더라도 신의 지배 아래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할 거다. 그때는 어떡할 거냐?”
시로네는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나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욕실에서 에이미의 씻는 소리가 들렸다.
회상에서 벗어난 시로네는 뒷짐을 지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미카.”
-네.
보르보르의 유산인 전자기 인격체가 시로네의 의식과 연결되었다.
‘현재 울티마 상황은?’
-신문 기사 이후로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행성 인류 12억 3,784만 7,723명 중에서 8.2퍼센트만이 통합적 정신 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8.2퍼센트.’
울티마는 해체되었다.
‘더 빨라질 거야.’
이미 호텔에 들어오면서도 겪지 않았던가.
‘급격한 변동 사항이 있을 때마다 알려 줘. 성전이 대응하기 편할 거야.’
-네.
초상감이 사라졌다.*** 자정 무렵 졸업반 회식이 끝났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흩어진 가운데 위저드와 사사는 강가를 따라 걸었다.
“좋다, 간만에 나오니까.”
“웬일이야? 네가 술을 다 마시고. 너, 정말 무슨 안 좋은 일 있는 거 아냐?”
위저드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없어, 그런 거. 나도 스트레스 받을 줄 알거든? 간만에 기분 좀 낸 거야.”
구름다리 중간에 멈춰 야경을 보던 위저드가 미간을 찡그리며 돌아섰다.
“너 왜 자꾸 따라와?”
크리스가 멀찍이 서 있었다.
“바람 쐬고 싶다며. 여자들끼리 다니는 건 위험해. 방해하지는 않을 테니까.”
사사가 말했다.
“나 참. 우리 마법학교 졸업반이거든? 게다가 너, 위저드보다 약하잖아.”
“그런 건 상관없어. 심리적인 문제지. 내가 있으니까 든든하긴 하잖아.”
“아니, 전혀.”
“됐어.”
위저드가 돌아섰다.
“그냥 있으라고 해. 저 고집을 누가 말려?”
솔직히 오늘 하루는 혼자 있는 시간이 최대한 적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반면 평소와 다른 태도에 사사는 새삼 놀랐다.
‘혹시?’
어릴 적 짝사랑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다는 신호가 아닐까?
‘그래서 마신 거야? 가엽게도.’
사사는 위저드와 크리스를 번갈아 살폈다. 그리고 갑자기 마려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으, 바람이 차서 그런가? 위저드,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잠깐만 있어.”
“응? 화장실은 아까….”
“좀 걸려!”
사사는 후다닥 도망쳤다. 그리고 크리스의 옆을 지나가면서 입술로 전했다.
내가 기회 한 번 준 거야.
위저드는 멀어지는 친구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크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사사의 속셈이 뻔히 보였다.
크리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나 참. 오버하기는. 그래도 뭐, 고맙기는 하네. 나중에 내가 밥 한번 사야겠어.”
“그러든지.”
위저드는 다시 강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의 옆에 크리스가 나란히 섰다.
“걱정하지 마. 이런 식으로 네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난 당당히 너를 꺾고, 너에게 어울리는 남자라는 걸 증명할 거야.”
“이야, 이번엔 좀 멋지네.”
술이 들어가서인지 크리스의 배려에 솔직하게 화답한 위저드였다.
‘뭐야? 오늘따라 왜 이래?’
다리 밑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본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쁘다.’
그래서 더욱 당당하고 싶지만, 이 기회를 넘긴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크리스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위저드, 사실….”
꺅!
사사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틀고, 크리스가 순간 이동을 시전해 날아갔다.
한 사이클이 끝나기도 전에 위저드의 섬광이 수십 번을 튕기며 멀리 날아갔다.
“큭.”
학교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위저드의 진심이자 전력일 터였다.
정신이 흔들린 탓에 강박이 깨졌지만 크리스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사사!”
또다시 섬광이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