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준동자 (2)
위저드는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쿵 하고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그녀에게 현실감을 강화시켰다.
하비츠가 물었다.
“항상 놀라는군. 10년을 봤는데도.”
“아니야.”
진짜일 리가 없다.
‘내가 죽였어. 이 손으로 직접, 사탄을 부수고, 찢고, 내장을 꺼내서….’
사실은 모른다.
초공 무상신은 이 세계의 5대 시스템에 스며들어 사건의 1프레임을 소실시키지만, 위저드 또한 그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녀가 인지하는 것은 1프레임이 소실되기 전에 촉발시킨 명확한 의지와, 다음 프레임에 나타나는 그 의지의 결과물뿐이었다.
‘아니, 분명 내가 죽였어. 수없이 검증했고, 이면 세계에도 사탄은 나타나지 않았어.’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애초에 사탄의 능력이 배니싱, 모두의 인지에서 사라지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어려운 모양이군. 이건 배니싱일까, 아닐까. 너의 망상일까, 현실일까. 상관없지. 어차피 다시 죽이면 되잖아. 그런데 왜 고민하지?”
하비츠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위저드는 몸을 돌리지 못했다.
거울이 아닌 현실에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정의하고 싶은 거야?”
“닥…쳐.”
“넌 최강의 마법사잖아, 나를 죽인. 지금 너를 두렵게 만드는 건 나인가? 아니면….”
하비츠가 그녀의 어깨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너 자신인가.”
위저드는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죽여 버린다!’
하지만 비로소 세워진 각오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앞에서 허무하게 스러졌다.
“하아. 하아.”
늘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다.
‘망상이야. 정신착란 같은 거겠지. 그래, 내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인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사탄과 온 정신을 뒤섞어야 했던 7살 아이에게 닥친 후폭풍일 뿐이라고.
자신이 정신병에 걸린 것이 하비츠가 살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일 테니까.
일단 그렇게 마음을 먹자 한결 편해졌다.
“후우.”
완전히 맥이 풀린 위저드는 힘없이 걸음을 옮겨 침대에 걸터앉았다.
등 뒤에서 하비츠가 물었다.
“과연 그럴까?”
“허어어억!”
엄청난 공기를 빨아들인 위저드가 이불을 걷으며 상체를 벌떡 세웠다.
동공은 완전히 확장되었고, 온몸에 흐른 식은땀으로 잠옷마저 축축했다.
“허억! 허억!”
아침을 알리는 피아노 연주 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무심하게 느껴졌다.
‘꿈. 꿈.’
확신할 수는 없다.
근래 하비츠를 보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꿈과 현실의 경계마저 흐릿한 기분이었다.
“…짜증 나.”
창밖으로 동이 트고 있었다.
***
크레아스 귀족 구역.
시이나는 스튜를 덜어 식탁에 올려놓았다.
이제 신혼도 아니건만 매일 아침 쿠안의 식사를 준비하고 출근하는 그녀였다.
“여보, 밥 차려 놨어요.”
거실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쿠안이 눈을 떴다.
가정부도 집사도 없는 작은 저택을 고른 이유는 오직 그의 수양을 위해서였다.
“미안합니다. 나도 일을 해야 하는데.”
“또 그 소리.”
시이나가 쿠안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세계 최고의 검사가 10년을 고민한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겠죠. 나는 그렇게 믿어요.”
세계 최고의 검사.
자신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 되짚어 보던 쿠안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강하지 않아요, 시이나. 정말로 강한 검사라면 이미 리안이 있습니다.”
“상관없어요.”
진심이기에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당신이 최고니까.”
쿠안의 볼에 입을 맞춘 그녀는 코트를 걸치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식기 전에 먹어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쿠안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표정이 사라지며 다시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다.
‘무엇을 놓치고 있지?’
요정의 왕 크라운이 쿠안의 뇌를 장악하기 위해 심은 임플란트는 오랜 친구이자 최고의 서저리인 카이나의 손에 의해 말끔하게 제거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느꼈던 초월적인 감각은 여전히 스키마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때 나는….’
테라포스의 함선에서 시이나가 살해당하기 직전, 그는 백치의 극의를 발동했다.
시공간의 루트가 모두 막힌 상황에서 상대의 목을 베어 버린 것이다.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찾아냈어.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또 다른 루트.’
어릿광대 피에로, 백치의 경지는 뇌의 절반을 날리는 것으로 구현된 기술.
하지만 막상 이성을 되찾고 보니 자신이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논리로 분석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닌 거야. 그렇다고 느낌도 아니다.’
그럼 대체 무엇인가?
‘조급해하지 말자.’
쿠안은 벽면에 걸린 ‘울티마의 빛’이라는 제목의 액자를 바라보았다.
아르민이 선물한 그림이었다.
‘깨닫게 된다면….’
아마도 저런 느낌일까 하며, 그는 다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들었다.
학교로 출근한 시이나는 졸업반 출석을 확인하기 위해 강철문으로 향했다.
저 앞에서 위저드가 걷고 있었다.
‘몸이 무거워 보이네.’
평소와 달리 어깨가 늘어져 있고 걸음걸이에서도 피로감이 느껴졌다.
“무슨 일 있니?”
뒤에서 들린 시이나의 목소리에 위저드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다.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표정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에요.”
“아니기는. 얼굴이 창백하잖아.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 나에게 상담해도 돼.”
“어, 그게….”
위저드는 눈을 굴렸다.
협회가 주목하고 있는 만큼 사소한 말이라도 파장이 엄청날 터였다.
“그냥 사춘기 소녀의 흔한 고민이죠, 뭐. 애인 문제…라고나 할까?”
시이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시로네인가?’
이제는 위저드도 졸업을 준비하고 있으니 마음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 그런 쪽은 나도 문외한이니까. 하지만 나라도 좋다면 언제든 얘기를 들어 줄게.”
“네. 아, 수업 늦겠다! 저 먼저 갈게요!”
시이나가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위저드는 언덕을 올라 강철문을 지나쳤다.
“후우, 위험했네.”
조금만 삐끗한 모습을 보여도 내일 아침이면 전 세계 신문에 실릴 터였다.
‘그만 생각하자. 고민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괜히 걱정만 끼치잖아.’
사사가 웃으며 다가왔다.
“위저드! 좋은 아침!”
항상 긍정적인 친구의 얼굴을 보자 간밤의 악몽도 잊히는 기분이었다.
“응. 잘 잤어? 오늘따라 텐션이 좋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오늘 졸업반 회식날이잖아. 레스토랑 통째로 빌렸어. 남학생들도 올 거야.”
“아, 그랬지.”
10년 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일이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 마법학교의 방침도 치열한 경쟁보다는 화합을 강조하는 편이었다.
사사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애들이 너도 오는 거냐고 물었는데,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너 요즘 기분 별로잖아.”
“갈게.”
오히려 사사가 놀랐다.
“괜찮겠어? 크리스도 올 건데?”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기숙사에 혼자 남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 어때? 단체 회식인데. 수업 끝나고 강철문에서 보자. 모여서 다 같이 가게.”
“야호! 좋아! 위저드 최고!”
사사가 두 팔을 들고 달려들자 능숙하게 태클을 피한 위저드가 그녀의 목을 휘감았다.
“윽.”
그리고 사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술도 먹는 거지?”
***
토르미아 왕성.
국왕 포니의 집무실에서 단테가 보고했다.
“종전 1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할 각국 VIP 명단입니다. 전년도보다 1.7배 많습니다.”
포니가 말했다.
“벌써 10주년이라. 가혹한 자리가 되겠네요. 슬슬 타국의 불만이 터질 때니까요.”
전쟁 후유증을 극복한 강대국들은 서서히 토르미아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토르미아에 위력 행사를 할 수준은 되지 않습니다. 세계 여론도 그렇고, 미로 씨와 가올드 씨도 적극적으로 활동을 해 주고 있으니까요.”
“정말 이번 행사에 참가할 수 있어요? 미로 씨는 지금 홀몸도 아닌데.”
“네, 임신 14주째입니다. 일정을 조절해서 최대한 휴식을 보장할 겁니다. 걱정 마세요. 정보부에서도 각국 비서실 채널을 통해 미리 서열 정리를 해 두고 있으니까요. 별다른 충돌은 없을 겁니다.”
포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팀장이 수고가 많아요.”
“별말씀을. 그럼.”
단테가 돌아서서 문으로 향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포니가 입을 열었다.
“단테.”
“응?”
팀장이 아닌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허례허식은 집어치우자는 뜻이었다.
“너, 왕 할래?”
단테는 잠시 그녀의 말을 곱씹더니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되물었다.
“왜? 이제 재미없냐?”
“자격이 있나 싶어. 재건의 시대는 지났잖아. 더 이상 토르미아를 따르는 국가는 없어. 어떻게든 꺾으려고 하지. 나보다는 네가 더 잘할 테니까.”
토르미아 정보부 팀장으로 10년 동안 온갖 음지의 일을 도맡아 수행한 단테였다.
단테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네가 토르미아의 국왕인 거야.”
“응?”
“왕이 너무 똑똑하면, 밑에서 어떻게 해 먹겠어?”
“….”
“기계에 기름칠이 필요하듯 인간에게도 불로소득이 필요하거든. 옳다 그르다의 문제를 떠나서, 안 그러면 인간이 제대로 작동하지를 않는다고. 효율이 50퍼센트도 안 나온단 말이야. 한마디로 지금도 네가 왕인 건, 그 자리에 딱 맞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야.”
단테만의 위로 화법이었다.
“그런가?”
“당연하지. 너는 토르미아의 왕으로 잘 기능하고 있어. 도덕적이고, 당당하게. 뭐, 밤이 외로운 거라면 내가 도와줄게. 보안은 철저하니까.”
“헐.”
포니는 혀를 내밀었다.
“담배나 좀 줄여.”
단테는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간다.”
집무실을 나선 그는 서류철에 감춘 한 장의 문서를 다시 확인했다.
결국 보고할 수 없었다.
‘일개 부처가 소화시킬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다. 그렇다고 미리 공표하면 걷잡을 수 없게 돼. 지금 필요한 건 3자 검증. 신뢰할 수 있고 분석력을 갖춘….’
단테의 걸음이 멈췄다.
“아, 씨.”
딱 1명, 있었다.
왕의 자문기관, 용뢰.
책상에 앉아 밀린 서류를 정리하던 이루키는 문득 집무실을 청소하는 도로시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결혼할래?”
도로시의 밀대 자루가 멈췄다.
고개를 들고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답했다.
“싫어.”
“왜?”
“벌써 세 번째잖아. 결혼하자고 해 놓고, 안 되겠다고 하고. 이랬다저랬다. 뭐가 문제야?”
“미지의 세계니까. 시로네 결혼식 끝나고 네이드랑 술 마셨는데, 그 녀석 펑펑 울더라.”
“울어? 왜?”
“사는 게 너무 행복하대.”
“하하! 뭔지는 알겠네.”
책상에서 일어난 이루키는 창문 앞에 서서 정원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결혼할 수 있을까, 나도?”
이루키가 진지하다는 것을 깨달은 도로시도 밀대를 놓고 다가왔다.
“그래, 생각해 보자. 세 번이나 청혼을 받으니까 신선하기는 한데, 이번에는 결혼하고 싶은 이유가 뭐야?”
이루키가 고개를 돌렸다.
“네이드가 놀리니까.”
“맞을래?”
도로시의 살기를 읽은 이루키가 손을 내밀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아니, 널 좋아하는 건 당연히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거지. 그게 청혼이잖아.”
“그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에 나를 좋아하는 비중은 얼마나 되는데?”
“72.8퍼센트. 오차 범위 플러스마이너스 3.4퍼센…!”
“아우, 진짜!”
도로시가 성큼 다가가 복부를 지르자 이루키의 허리가 휘청 숙여졌다.
“장, 장난인데.”
“웃기고 있네. 너는 더 맞아야 돼.”
도로시가 주먹을 만지며 다가가는 그때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열렸다.
“어머, 단테?”
도로시의 말투는 순식간에 바뀌었으나 이루키의 고통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여전히 재밌게들 사는구나.”
“호호. 무슨 소리야? 심각한 얘기 중이었어.”
단테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테이블에 서류철을 던지고 소파에 앉았다.
이루키가 배를 만지며 마주 앉았다.
“예상 밖의 일이네. 똑똑한 팀장님이 용뢰를 다 찾아오고. 정보부 망했냐?”
“너도 밥값은 해야지.”
응접 테이블에 두 다리를 올린 단테는 담배를 꼬나물고 불을 붙였다.
이루키가 말했다.
“아주 담배를 입에 붙이고 사는구먼. 그러다가 그 잘난 얼굴도 훅 갈걸.”
담배 연기가 천장으로 길게 뿜어졌다.
“…좋겠지, 네가 되는 것도.”
“왜 왔냐?”
이루키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테이블에 있는 거, 그거 좀 확인해 봐. 첩보니까 너무 호들갑 떨지는 말고.”
이루키는 서류철을 펼쳤다. 짧은 순간 내용을 파악한 그가 눈동자를 들었다.
“사실이야?”
종전 10주년.
그 명분을 빌미로 타국이 원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