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 [True Ending] 해산식 (2)
“···3년 전에 저와 해주신 약속· 아직 기억하시나요?”
데미안의 말에 퍼뜩 오랜 기억이 스쳤다·
3년 전· 전진기지·
튜토리얼 스테이지를 치렀던 그날·
– 약속하지· 이곳을 살아 나간다면 언제가 되더라도 기필코 네 손에 죽어 주겠다·
나는 데미안에게 약속했었다·
당시 친구였던 반을 잃고 실의에 빠져 모든 것을 놓아버린 데미안을 움직이기 위해서· 언젠가 내 목숨을 주겠노라 선언했다·
그때 데미안은 나를 증오하고 있었으니까· 전진기지로 병력을 출정시켜 친구를 죽게 한 나를 죽이고 싶어 했으니까·
– 언젠가 모든 괴물을 물리치고 이곳 전선에 평화가 오면· 황자님· 그때 다시 제게 물어 주세요·
– 그때 대답해 드릴게요· 황자님을 여전히··· 미워하는지·
이후로 데미안은 나를 따르게 되었고 그날 약속의 이행은 괴수와의 전투 뒤로 미루어졌다·
그리고 3년·
모든 악몽을 물리치고 이곳 전선에 평화가 온 지금·
데미안은 마침내 그 약속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기억하고말고·”
그리고 나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바란다면· 기꺼이 죽어 줄 수 있어·”
3년 전 전진기지에서의 그날·
데미안이 거미 여왕을 저격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나는 그날 그곳에서 죽었을 테니까·
데미안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 3년의 여정을 이겨낼 수 없었을 테니까· 나의 공략은 진작 실패로 끝났을 테니까·
데미안은 지난 3년간 내 공략에 시동을 걸고 효시(嚆矢)를 쏘아준··· 나의 방아쇠였으니까·
“네가 있어서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그날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해·”
빙그레 웃으며 뒤에 선 청년에게 물었다·
“너는 어때 데미안? 3년 전 나를 향했던 너의 증오는 여전히 유효해?”
“····”
“여전히 나를··· 죽이고 싶어?”
오랜 침묵이 흐른 뒤에·
천천히 데미안이 대답했다·
“···사실 완전히 잊고 지냈어요· 황자님에 대한 증오도 그날의 약속도·”
데미안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해산식이 열리는 오늘 앞으로 제가 가야 할 길을 짚으면서··· 그날의 약속이 생각났어요·”
“····”
“그 약속을 없는 척 묻어둘 수 없다는 것도요·”
나는 데미안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데미안은 계속했다·
“여전히 반의 죽음을 잊을 수 없어요· 저를 살리고 대신 죽은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저는 아마도 남은 평생 기억할 거예요·”
“····”
“동시에··· 저는 반의 삶을 기억해요·”
가라앉았던 데미안의 목소리에 온기가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저를 고아원 밖으로 이끌었던 그 아이의 손을 해가 떠오르는 산 위에서 제게 보여주었던 그 아이의 미소를 치열하게 자신의 삶과 맞서 싸웠던 그 아이의 생명을· 기억해요·”
“····”
“죽음이 아니라 삶을 보라고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보라고··· 동전의 양면처럼 악몽 뒤에는 늘 아침이 있다는 것을 황자님께서 알려주셨으니까·”
잠시 숨을 고르고·
데미안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이곳 괴수전선에서의 날들은 제게 아물 수 없는 상처지만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추억이니까· 아프지만 소중한 순간들이었으니까·”
“····”
“그러니까··· 제 결론을 말씀드릴게요·”
어느새 튼튼한 심지가 심어진 그 단단한 목소리를 들으며····
“저는 그날의 황자님을··· 아니· 그날의 무력했던 저 자신을·“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이제 더는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조금 물기가 어린 목소리로 데미안은 힘겹게 토해냈다·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싶어요·”
···아직도 그날의 꿈을 꾼다·
일렁이는 푸른 성화(聖火) 좌우로 늘어선 수천 구의 시신·
언제나 내 마음에 부채(負債)였던 그 전진기지의 풍경·
이후로도 누군가가 내 깃발 아래 스러질 때마다 그날의 풍경은 다시금 내 뇌리에 되살아났다·
“그러니 부디 황자님께서도·”
한 명이라도 더 살리지 못했음을 자책했던 나의 지난 3년·
“그날의 자신을··· 더는 미워하지 마세요·”
나도 더 이상 그때의 나를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때의 나 자신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이게 제 결론이에요·”
새삼 깨달았다·
나의 저격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누군가의 상처를 낫게 하고자 하려는 그런 녀석이었음을·
같은 날 죄책감이라는 상처를 입고 여기까지 걸어온 그 자신뿐만 아니라 나의 상처 또한 치유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것을·
“···고마워 데미안·”
데미안은 반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도 그날의 장례식을 잊지 못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이 흉터를 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리라고 믿고 싶다·
“후우우····”
안도 서린 긴 한숨을 뱉은 뒤·
나는 조심스럽게 데미안에게 물었다·
“저 데미안·”
“네·”
“그럼 내 목뒤에 이··· 총 좀 치워줄래? 솔직히 너무 무섭구나····”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가 여전히 내 뒷목에 닿아 있다·
아니 안 죽일 거면 슬슬 이것 좀 치워줘! 솔직히 개무섭단 말이야! 목 뒤에 이런 게 붙어 있으면 보통 사람은 바로 기절초풍한다고!
“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데미안의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황자님 저는 총을 겨눈 적이 없는데요···?”
“응? 그럼 이건 뭐야?”
나는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쉬륵-
싯누렇게 반짝이는 파충류 생물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회백색 몸에 긴 혀를 날름거리는 뱀·
요르문간드였다····
데미안의 목 주위를 목도리처럼 휘감은 요르문간드가 그 머리를 쭉 뻗어 내 목 뒤를 쿡쿡 누르고 있던 것이었다·
“우와아아아악?!”
기겁한 나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뭐야 얘는 왜 여기 있어?!”
“그게··· 제가 여행을 떠난다니까 따라오려고 하더라고요·”
“여행?”
“네·”
나는 그제야 데미안과 마주하고 설 수 있었다·
애초에 데미안은 완전히 비무장 상태였다· 따뜻해 보이는 코트 위에 두꺼운 목도리···처럼 보이는 뱀을 한 마리 휘감고 있었지만·
손은 텅 비어 있었다·
나를 죽일 생각 따위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데미안은 흘긋 남쪽을 보더니 멋쩍어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남쪽의 끝은 보았으니 이제··· 북쪽 동쪽 서쪽의 끝까지도 가봐야죠·”
“····”
“세상의 끝까지 모험을 떠나는 게 반과의 약속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북쪽 끝까지 가는 그의 여정에 역시 북쪽으로 가고 싶어 하는 요르문간드가 동행하게 된 것이다·
이제 모험가로서 또 다른 세상의 끝을 향해 떠나겠다며 순하게 웃어 보이는 데미안·
그런 데미안을 한참 가만히 보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데미안·”
“네· 황자님·”
“우리 새로운 약속을 하자·”
나는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여행이 끝나면 꼭 나를 찾아와 줘·”
“····”
“그리고 세상의 끝에서 무엇을 봤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네가 무엇을 느꼈는지 꼭 이야기해줘·”
“···그럴게요· 황자님·”
데미안이 마주 손을 내밀었다·
“약속·”
우리는 천천히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황자님의 여정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네가 있어서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었어· 데미안·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워·”
화상과 물집 굳은살로 범벅이 된 데미안의 손은 저격수의 손이었다·
동시에 치유사의 손이었다·
지난 3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그 손을 나는 한동안 꼭 잡고 놓지 못했다·
이윽고 손이 떨어지고·
내게 한 번 더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보인 데미안은 내게서 몇 걸음 물러서다가····
“····”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뒤이어 주먹에서 엄지와 검지만 편 뒤 검지 끝으로 나를 향했다· 마치 손으로 만든 총으로 나를 겨누듯이·
그리고····
평화롭게 미소했다·
데미안은 그대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검지 끝으로 저 먼 하늘을 겨누고는·
“Bang·”
하늘을 향해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동시에
타아아앙····
가까운 신전에서- 축포 소리가 울렸다·
연달아 신전으로부터 커다란 종소리가 퍼졌다·
뎅···· 뎅···· 뎅····
포성과 종소리에 놀란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솟구쳤다·
골목길 좌우 돌담길과 건물 지붕 위에 늘어서 있던 온갖 새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그림처럼 날아올랐다·
새들의 비행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후련하게 웃어 보인 데미안은 내게 눈인사를 남기고 뒤돌아섰다·
“안녕 데미안·”
멀어지는 나의 방아쇠를 향해 나는 중얼거렸다·
“또 멋진 여행 되기를·”
뒤돌아선 나 또한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더는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새로운 길을 향해·
골목의 그림자를 벗어나 광장에 드리운 환한 햇살 속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
신전에 도착하자 막 예배가 끝난 시점이었다· 축포와 종소리는 예배의 마무리를 알리는 신호였나 보다·
“교단장 로제타 님께서 이곳에서 진행하시는 마지막 예배라서요· 평소보다 더 붐비고 있습니다·”
“아하 과연· 확실히 교단장이 직접 진행하는 예배라니 보기 힘든 기회긴 하지·”
나는 늘 그렇듯 신전 입구를 지키고 선 토르켈과 나란히 서서 대화를 하는 중이다·
“이제 뭘 할 거야 토르켈?”
“감사하게도 여기저기서 많은 제안을 주셨습니다·”
토르켈은 조금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투구 위를 긁적였다·
“이름난 용병단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고 또 여러 나라의 국왕님께서··· 기사 작위 제안도 주셨고요·”
“이야 작위까지? 대단한데?”
토르켈의 성실하고 헌신적인 자세와 맡은 바 임무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몸을 내던지는 모습에 여러 왕이 감명받은 모양이다· 어떻게든 데려가려는 나라가 많다고····
“에반젤린 아가씨··· 아니· 크로스 변경백께서도· 크로스로드 백병대장 자리를 제안해 주셨습니다·”
“이거 또 불꽃 튀는 스토브리그가 펼쳐지고 있군····”
하지만 빼앗길 순 없지· 토르켈은 나도 눈독 들이는 인재다· 구워삶아서 브링어 공국으로 데려갈 테다!
그래서 내 조건도 말하려는 차에 토르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선은 조금 쉬면서··· 고향섬에 가보려 합니다·”
“아· 고향섬?”
“예· 저 같은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살았던··· 그 섬이요·”
투구 속에 보이는 토르켈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나오고 한 번도 돌아가지 않은 곳이지만 이곳 크로스로드에서 깨달았습니다· 그곳 또한 크로스로드처럼 언제나 햇볕 드는 땅이었음을요·”
“····”
“그래서··· 양손에 선물이나 한껏 들고 고향에 돌아가 볼 셈입니다· 그곳에서 이후의 진로를 고민해 볼까 합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런 토르켈의 등을 두들겼다·
“멋진 생각이야 토르켈· 오래 고생했으니 푹 쉬고·”
“예· 전하·”
“그리고 휴식 끝나면 나한테 꼭 좀 연락을····”
어떻게든 차기 시즌 계약을 위해서 말을 더 붙여보려는데·
“토르켈!”
내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뭐야 싶어서 봤더니 신전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사제 무리였다· 그 선두에는 교단장 로제타가 특유의 나긋하···면서도 서슬 퍼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머 황태자 전하께서도 계셨군요·”
“로제타·”
“죄송합니다만 먼저 토르켈과 대화를 해도 괜찮을까요?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로제타는 자연스럽게 나와 토르켈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었다·
내 눈썹이 꿈틀했다· 서 설마 로제타 너도····
“거두절미하고 묻겠습니다· 토르켈 사제가 될 생각 없습니까?”
너도 스카우터냐고-!
내가 토르켈을 데려가려는 것을 알아채고 나를 블록하며 먼저 토르켈에게 영입 제안을 넣은 것이다! 이 능구렁이 같은 사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