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9· [True Ending] 해산식
다음날·
봄이 정말로 오긴 오려는지 슬며시 추위가 가시고 날씨가 포근하게 풀리는 정오의 시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높고 푸른 하늘 위로-
쐐애애애액!
날개를 활짝 편 그리폰들이 화려한 곡예비행을 하며 쏘아졌다·
와아아아아-!
광장에 모여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버밀리온 왕국 국왕 미하일이 이끄는 창공기사단의 에어쇼(Air Show)였다· 그리폰과 그 위에 탄 기사들은 유려하게 서로를 쫓으며 하늘에 선명한 궤적을 남겼다·
“···해산식을 하랬더니·”
쏜살같이 진행되어 어느새 클라이막스에 도달한 에어쇼를 살피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뭐 아주 축제를 준비해 놨네·”
이제 미하일과 그 아내들은 공중 3회전 편대비행을 하고 있다· 저거 옛~날에 내가 요청했던 건데 설마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울면서 헤어지는 것도 전통적인 맛이 있지만!”
이번 해산식을 기획 총괄한 에반젤린이 음핫핫 웃으며 팔짱을 낀 채 내 옆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웃으면서 헤어지고 싶어서요!”
“호오····”
“세계수호전선은 그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했으니까 행복하게 해산해야 마땅하지 않겠어요?”
웃으며 안녕 인가·
하긴 서로 미소하며 헤어질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해산식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전에 본 적 없는 화려한 그리폰 에어쇼도 어느새 마무리 단계였다· 미하일과 그리폰 라이더들은 공중에서 핑그르르 회전하더니 그대로 지상으로 내리꽂히듯 착륙했다·
펑! 퍼버버벙!
그리폰 라이더들의 착지와 동시에 정오의 하늘 위로 폭죽이 치솟았다·
미하일이 멋들어진 포즈와 함께 인사했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환호했다· 미하일이 잘 생겨서 그런지 특히 여성 관객들의 환호가 엄청나다····
미하일은 눈치 없이 싱글벙글했고 어쩐지 분노한 표정이 된 다섯 아내가 그런 미하일을 질질 끌고 사라졌다· 너는 제명에 죽으려면 눈치를 좀 더 키워야겠다 야·
웃으며 그 모습을 보던 에반젤린이 내게 찡긋 눈짓했다·
“우리 세계수호전선의 마지막이니까요· 재밌게 즐겨봅시다!”
나는 말없이 웃으며 손짓해 주었다· 얼른 가봐·
에반젤린은 그대로 중앙광장 무대 위로 쪼르르 달려 올라가더니 힘차게 소리쳤다·
“자아 이 자리에 모여주신 세계수호전선의 레이디스 앤 젠틀맨! 신사 숙녀 여러분!”
그리고는 팔을 빙글빙글 돌리며 기를 모으듯이 목소리를 끌어당겼다·
“기다려 오신 해산식을 시자아아아아아악~”
폐활량을 뽐내듯 한참 그렇게 말을 잇더니····
“-하겠습니다!”
뻥 하고 외쳤다·
동시에 하늘로 폭죽이 연달아 솟구쳤고 사람들은 광장이 떠나가라 비명 섞인 환호를 내질렀다·
“젊다 젊어····”
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펄떡펄떡 뛰어다니는 신임 영주를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큭큭 웃고 말았다·
내 옆에서 같이 웃으며 이 광경을 보던 루카스가 문득 덤덤하게 내뱉었다·
“끝나가는군요·”
“···그러게·”
이곳 크로스로드에서의 날들이 끝나가고 있다·
우리는 잠시 가만히 광장의 풍경을 살폈다·
봄의 햇살 아래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 모두가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에 그림자는 없다·
한 손에는 요리를 한 손에는 음료와 술이 든 잔을 들고·
한데 웃으며··· 사람들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 해산식이 끝나고 나면 헤어질 전우들을 향한·
작별 인사였다·
“····”
헤어짐을 기념하는 축제·
이 즐겁고 시끌벅적한 풍경 사이에서··· 어째서인지 나는 조금 서글퍼졌다·
하지만 그 감정을 속으로 욱여넣고 루카스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너는 이제 어쩔 테냐?”
“저는 늘 그래왔듯이 주군의 곁을 지킬 겁니다·”
정답자판기 루 선생다운 각 잡힌 대답이 칼같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 직후·
“···하지만·”
루카스는 머뭇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는 잠깐 휴가를 청해볼까·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조금 놀라서 그런 루카스를 보았다·
이윽고 루카스는 결심을 굳힌 듯 가슴을 펴고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도에 돌아가 그동안 외면했던 제 과거를··· 저의 가문 맥그리거를· 완전히 깨끗하게 정리하고자 합니다·”
“····”
“허락해 주시렵니까 주군?”
“당연하지·”
나는 옆의 테이블에 놓여 있던 맥주잔을 쥐고 루카스를 향해 내밀었다·
“얼마든지 세상을 돌아보고 와도 좋아· 다시 내 기사가 되어 주기만 한다면·”
루카스 역시 자신의 잔을 쥐고 조심스럽게 내 잔에 부딪혔다·
챙-
가볍게 건배한 뒤 우리는 각자의 잔을 느릿하게 삼켰다·
“그나저나 너도 참 바쁘구나· 황도 가서 가문 정리해야 하지· 공국으로 떠날 나 보러 와야 하지· 게다가····”
무대 위에서 인근 국가의 장들과 바쁘게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는 신임 영주 에반젤린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에반젤린이랑도 그렇게 자주 보진 못할 텐데·”
“····”
두 기사 사이의 기류가 심상찮다는 것은 아무리 연애고자인 나라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 걱정되었다· 언제나 바짝 붙어 지내던 지난 3년과 달리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자리에서 바쁘게 살아가야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루카스는 자신으로 가득 찬 그야말로 주인공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테니까요·”
“····”
“제가 바라는 대로 살기로 결심했으니 그 결심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할 겁니다·”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한 번 더 맥주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잘 컸구나 요 녀석·”
마주 잔을 부딪치며 루카스는 능글맞게 눈짓했다·
“최고의 남자에게 배웠으니까요·”
이 자식 이거 술만 마시면 혓바닥 매끄러워지는 게 예술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맥주잔을 삼켰다· 루카스는 스스로 말하고도 웃긴지 큭큭거리며 맥주잔을 머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조용히 미소한 채 광장을 바라보며 함께 술을 마셨다·
***
나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자 도시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헤어지고 나면 다시 만나는 건 언제일지 모른다· 나는 가능한 많은 사람과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렇게 거리를 걷다가····
“우왓!”
갑자기 분위기가 음울칙칙하기 그지없는 한 장소에 도착했다! 뭐야?!
온 도시가 축제 분위기였는데 유독 이 소광장만 분위기가 음울했다· 시커멓고 축축한 공기만 봐서는 어제 장례식장보다 더 슬픈 느낌이었다· 뭔 일이여!
“앗 전하!”
소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 중 나를 알아본 누군가가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다름 아닌 쥬니어였다·
“어서 오세요!”
“어 쥬니어· 반갑다· 그런데 이 모임은···?”
로브를 뒤집어쓴 일련의 사람들이 죄다 죽을상을 한 채로 각자의 손에 들린 유리잔에 와인을 콸콸 따라 물처럼 마시고 있다· 뭐냐 이 지켜보기만 해도 괴로운 분위기는!
그러자 쥬니어가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것이 마법사들의 모임··· 입니다····”
“아·”
과연 자세히 살피자 각국에서 모여든 마법사들이었다· 다들 표정이 너무 거무죽죽해서 한 번에 못 알아봤을 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중 유난히 익숙한 긴 하얀 수염의 노마법사- 디어뮈딘이 나를 발견하고 팟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네 이노옴 애쉬! 잘 왔소!”
“디 디어뮈딘님?!”
어지간히 퍼마셨는지 항상 기품을 잃지 않던 디어뮈딘의 얼굴은 취기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 심장도 안 좋으신 분이 이렇게 과음하시고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내 심장이 문제야?! 마법이 마법이····”
뒤이어 디어뮈딘은 아이처럼 빼애액 울며 자리에 무너졌다·
“마법이 모조리 사라졌는데 술을 안 마시고 버티겠냐는 말이오오오!”
“····”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영계를 폐쇄하고 소멸시키면서 이 세상에서는 모든 마법 기적 신비가 사라졌다·
마력사용자 대부분이 힘을 잃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마력을 이용한 재능을 발휘하던 사람들이 그 특별함을 잃었다·
사회는 한동안 혼란을 겪을 것이다· 적지 않은 진통을 겪어야겠지·
그중에서도 마법사들은 이번 사태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직종이었다· 아예 모든 기반을 잃었으니까·
쉽게 말해서 나는 이 사람들을 단체로 실직자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세계를 위한 일이니까! 다들 이해했지! 이해했어! 이해하긴 했는데!”
마법사들의 총의를 모아 영계 폐쇄에 동의한 디어뮈딘은 이제 꺼이꺼이 통곡했다·
“아무리 그래도 평생 일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다니 아이고···!”
“그··· 죄송합니다 제가··· 앞으로 마법사분들의 고용 문제에 대해서는····”
“고용이나 돈벌이는 문제가 아니야! 어차피 마력이 사라진 이상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한동안 함께 고생할 일이니까!”
디어뮈딘은 손수건에 코를 팽! 풀더니·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를 냈다·
“문제는 우리가 일궈온 마학(魔學)이오·”
“마학···이요·”
“학문으로서 지난 천 년간 이어져 온 마법이 소실되었다는 말이오· 까마득한 스승들로부터 이 학문을 물려받아 이어온 학자로서 원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야····”
이해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순수한 학자로서도·
자신의 학문을 잃게 된 디어뮈딘과 마법사들은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냥 절망하며 술이나 퍼먹고 있었는데 이런 젠장 이런 우리를 구한 것도 애쉬! 바로 그대였소!”
“예··· 예?”
영문을 모르겠어서 눈을 깜빡였다·
내가 구했다고? 그건 또 뭔 소리야?
“쥬니어 양에게서 그대가 만들고자 하는 역사 재단··· ‘쥬피터 재단’ 이야기를 들었소·”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쥬니어가 머쓱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쥬피터 재단·
진영별로 사건을 교차 검증하여 가능한 한 중립적인 진실만을 가감 없이 기록하는 역사 재단·
서로의 과오를 인정하고 청산한 뒤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내가 에버블랙 제국의 황제가 된다면 가장 먼저 시행할 사관(史官) 육성 사업·
나는 이 프로젝트의 적임자로 쥬니어를 눈여겨보았고 스카우트 제의도 진작 해 둔 상태였다·
“아직 제가 그런 중요한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쥬니어는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려고요· 해서 이번에 해산식이 끝나면 황도로 올라가 사관 수업을 받을 거라는 말씀을 디어뮈딘님께 드렸더니····”
“역사 재단이라니! 마법사 맙소사! 정말 좋은 생각이오 애쉬 황자!”
쥬니어의 말을 끊고 들어온 디어뮈딘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고 힌트를 얻었지· 그래서 우리 상아탑도 지난 천 년 마법의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상아탑 역사 재단’으로 새로이 태어나려 하오!”
“상아탑 역사 재단····”
놀라서 되뇌자 디어뮈딘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의 역사는 곧 지난 천 년간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오· 하지만 우리 세대가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세상에 마법을 기억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게 되오·”
“····”
“손으로 만질 수 있던 그 기적들이 정말로 기억 속에서조차 남지 않게 된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기록하겠소·”
디어뮈딘의 이야기를 듣고 거무죽죽하게 표정이 죽어 있던 마법사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소· 이미 더 이상 마법은 없소· 앞으로의 세상에 그런 과거의 영광 따위 별 가치 없는 기록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상관없소·”
디어뮈딘은 다른 마법사들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법은 한때 우리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한때 이 세상 그 어떤 보석과 금은보화보다도 값진 것이었으니까·”
“···!”
“마법이 우리를 살게 했으니· 그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기록 속에라도 마법을 살려두는 것은 마법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누렸던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어느새 취기를 모두 떨쳐내고·
더 이상 마법의 빛은 없는데도 막대한 카리스마로 이 소광장을 휘어잡고서· 상아탑주 디어뮈딘은 꼿꼿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한 명의 마학도(魔學徒)로서· 나는 그 역사를 기록할 테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하겠습니다 디어뮈딘님!”
“우리 청마탑은 상아탑과 함께하겠습니다!”
“우리 적마탑도···!”
“전 세계에 파편화되어 흩어져 있는 모든 마법 기록들을 한데 모읍시다!”
“천 년 뒤에도 잊히지 않도록 철저하게 정리하고 기록해 보자고요!”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하던 이곳 소광장은 어느새 활기를 되찾고 상아탑 재단의 발족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토론의 장이 되었다·
마법이라는 마학이라는 학문에 일생을 매진한 학자들은 어느새 아이처럼 순수한 얼굴로 각자의 생각을 열정적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나와 쥬니어는 나란히 서서 허허 웃으며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상아탑 재단이라··· 쥬피터 재단과 좋은 협력을 할 수 있을 것 같군·”
“지난 인류의 역사에서 마법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니까요· 서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마법사들의 마법 역사 토론을 듣고 있자니 입이 근질근질해졌는지 몸을 들썩이던 쥬니어는 내게 얼른 인사해 보였다·
“그럼 저도! 쥬피터 재단의 첫 사관이자 한 명의 마법사였던 사람으로서··· 저 토론에 끼러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소광장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쥬니어의 뒤에 대고 나는 조용히 말했다·
“쥬니어·”
“네?”
돌아보는 그녀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고마워·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함께 고민해 줘서·”
“····”
“앞으로도 또··· 많은 일들을 함께 고민하자·”
그러자 쥬니어는 여우처럼 배시시 웃었다·
“그거 제가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요?”
그러고 쥬니어는 마법사들이 벌이는 토론의 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바쁘게 와인잔을 주고받으며 지난 천 년간 이어진 마법의 사람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학자들의 모습을· 나는 선명히 기억하고자 했다·
이 또한 잊혀서는 안 될 역사의 한 장면일 테니·
***
소광장을 벗어나 신전으로 향하는 길·
“저는 먼저 신전으로 가서 주군의 방문을 알리겠습니다·”
“그래· 부탁할게·”
신전의 바로 앞 골목길에서 루카스는 성큼성큼 달려서 먼저 신전으로 향했다·
가까워지는 신전의 입구를 보며 내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데····
-척·
“···?!”
갑자기·
전조 없이· 소리 없이·
무언가 차갑고 단단한 것이 내 뒷목에 닿았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채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자님·”
나의 저격수· 나의 방아쇠·
데미안의 목소리였다·
“데미안?”
“····”
저격수다운 완벽한 은신으로 루카스마저 속여 넘기고·
골목길의 그림자 속에 숨은 채 데미안은 나를 기다린 것이다·
이어진 짧은 침묵 뒤에·
“···3년 전에 저와 해주신 약속·”
고저 없는 목소리로 데미안이 속삭이듯 물었다·
“아직 기억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