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6· [True Ending]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제국력 652년· 3월의 이른 날·
최후의 전투가 끝나고 며칠 뒤·
크로스로드 서쪽·
“후····”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목을 가다듬었다·
오늘은 연설을 할 일이 많아서 어제부터 목 관리를 좀 하는 중이다· 세레나데가 아침부터 꿀차며 이것저것 타 주었다·
3년간 차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더니 아직도 목이 허전하다· 나는 옅은 화상이 드러나 있는 내 목을 손으로 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높다란 추모비가 두 개 세워진 이곳 무덤터에서는 장례식이 그리고 동시에 추모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스러져 간 이들을 위한 장례식·
그리고 지난 3년간 스러져 간 이들을 위한 추모식이었다·
그동안 세계수호전선에서 함께한 왕들이 각자의 예복을 갖춰 입고 참석했다· 그들 각자의 나라에서 각자의 양식으로 맞추어 제작한 조화 화환도 한데 실려 왔다·
크로스로드 서쪽 무덤터는 다양한 형태의 하얀 꽃들로 뒤덮였다· 언뜻 보면 마치 봄눈이 내린 것만 같았다·
아름답지만 서글픈 풍경이었다·
“애쉬!”
호수왕국에서도 아리엘이 직접 방문했다·
현재 나라의 혼란이 너무 극심해 그것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을 텐데 이번 행사에는 절대 빠질 수 없다며 다시금 크로스로드에 방문했다·
이번에는 국왕 대리로서 왕위계승권자인 제1왕녀로서·
검이 아니라 꽃을 쥐고서 이곳에 왔다·
“아리엘·”
“잘 지냈나?”
내게 인사하는 아리엘의 안색은 밝았다·
좀 어떠냐고 물었더니 아리엘은 당차게 하하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국가 체계는 무너지기 직전이고 국민들은 정신이 무너진 폐인 천지고 아바마마께서는 오백 년 전 사태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하야하셨어· 왕가에 대한 민심도 악화일로고· 정말이지 쉽지 않군!”
“···말이랑 표정이랑 매칭이 안 되는데?”
웃을 상황이 아니잖아· 왜 웃고 있는 거야·
하지만 내 지적에도 아리엘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지난 오백 년 그 어느 때보다도 희망적인 상황이야·”
“····”
“여전히 호수 밑바닥에 내려앉아 있지만 나의 나라는 의식을 되찾았고· 비록 폐인이 되었지만 나의 사람들은 살아 있어· 이 이상 희망적인 순간은 지난 오백 년간 단 한 번도 없었어·”
아리엘의 강인한 태도와 굳건한 미소를 보며··· 나도 그만 마주 미소하고 말았다·
“이제야 출발선에 선 거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지금보다 좋아질 일만 남았으니· 내가 어찌 기쁘지 않겠어?”
“네 말이 맞다 야·”
그 와중에 호수왕국도 조화 화환을 챙겨왔다· 나라가 호수 아래에 떨어져 있는 상황인데도 용케 꽃을 찾았네·
“그럼 나는·”
아리엘은 내게 목례한 다음 흰 꽃을 품에 가득 쥔 채 무덤터로 몸을 향했다·
“조의를 표하고 오겠다·”
늘어선 무덤터로 향하는 아리엘의 표정은 결연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호수왕국은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였다·
오백 년 전 마왕과 외신의 손에 놀아나 나라는 가라앉고 괴수를 토해내는 악몽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괴수들이 인세를 침략했다·
왕녀 아리엘 또한 오백 년 내내 괴수에 맞서 싸우며 인세를 지키려 애썼으나 최후의 결전에 이르러서는 그만 악몽에 잠식당해 외신들의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다·
그들로서는 타의에 의한 일이었고 억울하고 안타깝다 해도 인세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마냥 피해자로 대해주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
무엇보다 당장 이번 전투·
최후의 결전이었던 만큼 그리고 무한한 괴수들이 쳐들어왔던 만큼 인세 또한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다·
나는 새로이 만들어진 무덤들을 살폈다·
많은 병사들이 그리고 많은 영웅들이 전투 중 다치고 죽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를 충실하게 도와주었던 킹 포세이돈 또한 이번에 전사했다·
아리엘은 악몽의 주인이었던 자로서· 그리고 호수왕국을 대표하는 자로서·
이러한 상황에서 회피하거나 고개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길을 선택했다·
그녀는 조의를 표하기 위해 그리고 사과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
아리엘은 한껏 긴장한 얼굴로 무덤터로 들어섰다·
그녀를 알아본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적의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특히 인어족 사람들은 거의 원수 보듯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무명공·”
“아니 이제 아리엘 왕녀님이라 불러야 하나····”
“조의를 표하러 오셨습니까?”
“같이 가시지요·”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리엘은 무명으로서 오랫동안 세계수호전선에 기여해 왔다· 그녀가 휘두르던 빛의 검을 그녀가 분쇄한 악몽의 군세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아리엘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분명히 더 많았다· 그러나····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는 그리고 호수왕국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아리엘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서 이번에 새로 생긴 무덤들을 하나씩 순회하며 그 앞에 꽃을 놓았다·
“····”
호수왕국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하다· 아마도 오랫동안 괴수를 토해낸 원흉으로서 미움을 받아야겠지·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또 동시에 세계와 기꺼이 함께하고자 한다면·
언제고 앙금은 사그라지고 사람들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다·
이곳 세계수호전선에서 서로 죽일 듯 싸워오던 모든 나라가 끝내는 한 방향을 보게 되었듯이·
나는 그리 믿는다·
***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고 이어진 관 행렬이 모두 각자의 자리에 놓이고 사제들이 관 위에 성수를 뿌리며 사자의 내세를 축복하고····
어느새 식순이 지나고 내 연설 차례가 다가왔다·
나는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섰다· 주위를 둘러보자 구름처럼 운집한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오늘이····”
그들과 하나씩 눈을 맞추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제가 이곳 크로스로드에서 주관하는 마지막 장례식 행사입니다·”
나는 옆으로 손을 뻗었다·
“다음부터는 크로스 가문의 장녀이자 차기 크로스로드 영주 에반젤린 크로스 변경백계승자가 장례식을 주관할 예정입니다·”
오늘 행사 대부분을 진행한 에반젤린이 멋스럽게 예를 표해 보였다·
녀석을 향해 슬며시 웃어 보인 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이런 대규모 장례식은 영영 열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랍니다·”
후····
나는 숨을 들이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맑고 차가운 봄의 하늘을 잠시 묵묵히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려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살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에서 언제나 흐릿하게 깔려 있던 공포감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안도와 평화다·
“전쟁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악몽은 끝났고 괴수는 더 이상 침공해 오지 않습니다·”
나는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앞으로는 살아남은 우리가 새로운 화합의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화합의 시대····
말한 내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사실 이곳에 모인 많은 분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어쩌면 전쟁의 시대보다 화합의 시대가 더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요·”
왕들이 서로 멋쩍은 시선을 교환했다·
싸워 죽이는 일은 쉬우나· 대화하고 이해하는 일은 어려운 까닭에·
이 세계는 그 긴 시간을 서로 미워하고 아파하며 보내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 전선에서 함께한 지난 3년을 잊지 않는다면·”
나는 거듭 반복해서 사람들과 시선을 맞췄다·
“우리가 어깨를 맞대고 세계를 지키고자 함께 싸웠던 그 시간을 잊지 않는다면·”
나는 빙그레 웃었다·
“이 화합의 시대를 함께 일궈가는 일 또한 제법 해볼 만한 도전이 될 겁니다·”
지난 3년을 떠올리는 사람들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3년 전에는 함께하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수많은 나라가 수많은 종족이 지금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나란히 서서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이곳에 묻힌 사자(死者)들이 바라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무덤터를 보았다·
“다른 어떤 이념이나 혹은 특정한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순수하게 세계를 지키고자 싸우고 스러졌던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바라는 일일 것입니다·”
새하얀 꽃들 속에 파묻혀 있는 무수한 무덤들을· 그리고 두 개의 추모비를·
그곳에 묻힌 나의 깃발 아래 죽은 사람들을·
나는 한참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제가 처음 이 도시에 와서 처음 장례식을 주관하며 했던 말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내가 묻자 그날을 기억하는 시민들과 병사들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나 또한 마주 미소하며 그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분명히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마침내 말을 고쳤다·
“여러분은 이제 이곳에서 죽지 않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살아갑니다·”
지난 3년간 함께한 사람들의 입술이 각자의 감정을 담고 꾹 다물렸다·
“이미 이곳에서 바람이 된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주었으니까·”
그들의 글썽이는 눈을 마주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를··· 또 우리의 시대를 평화로 지켜줄 테니까·”
숨을 들이켜고·
먼저 스러져 바람이 된 사람들을 생각하며·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한 장송시를····
나는 조용하게 낭송했다·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내 무덤 앞에 서서 울지 마세요·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나는 그곳에 있지 않고 잠들지 않았으니·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나는 불어오는 천 개의 바람이에요·
I am the diamond glints on snow
나는 눈밭 위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에요·
I am the sunlight on ripened grain;
나는 여물은 이삭 위를 비추는 햇빛이에요·
I am the gentle autumn’s rain·
나는 부드러운 가을 빗줄기에요·
When you awake in the morning hush
어느 조용한 아침 당신이 깨어났을 때
I am the swift uplifting rush
그 위를 빠르고 높게 맴도는
Of quiet birds in circling flight·
조용한 새가 나예요·
I am the soft stars that shine at night·
나는 밤에 빛나는 온화한 별이에요·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cry·
내 무덤 앞에 서서 울지 마세요·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나는 그곳에 있지 않고 잠들지 않았으니·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나는 천 개의 바람이 되었으니····
우수수····
때마침 바람이 불어왔다·
무덤터에 놓인 조화들이 한데 춘풍(春風)에 흔들리며 우리 쪽으로 하얀 꽃잎 무리를 휘날렸다·
봄눈처럼 쏟아지는 꽃잎 무리 속에서 나는 미소했다·
“부디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곳 전선에서 싸웠던 사람들의 얼굴을·”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먼저 스러져 바람이 된 이들의 얼굴을· 그리고 옆에서 함께 싸운 전우의 얼굴을·”
나 또한 눈을 감고 그들의 얼굴을 그들과 함께한 시간을 떠올렸다·
조용한 잠깐의 묵념 뒤에·
“그 얼굴을 그 3년을 잊지 않는다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 마주하고 기억해 낼 수 있다면·”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우리는 앞선 사람들의 바람대로 또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총칼 대신 대화로 서로를 위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고개를 들자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힘주어 다시 한번 선언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천천히 뒤돌아선 나는 깊게 허리를 숙이고 무덤터를 향해 예를 표했다·
“이 전쟁을 끝내준 앞서간 영웅들이여· 편히 잠들기를·”
진심을 담아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대들의 유지를 부디 우리가 잊지 않기를·”
내가 허리를 바로 세우는 것과 동시에
펑! 퍼버버벙···!
사자(死者)를 기리는 포성이 멀리 울려 퍼졌다·
내가 주관하는 마지막 장례식은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