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 [True Ending] 첫 소원 (2)
새벽이 지나고 이제 막 아침이 오는 시간·
나와 에이더는 함께 크로스로드 동쪽 성벽을 올랐다·
“영주님이 이뤄낸 업적이 위대한 이유는 스스로도 잘 아시겠지만····”
에이더의 목소리는 많이 작아져 있어서 나는 평소보다 더 귀를 기울여야 했다·
“쉽지 않은 길로 계속해서 나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자꾸 위대하다 대단하다 이러니까 막상 듣는 입장에선 좀 부끄러운걸·
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계속 치켜 세워줘도 뭐 없어·”
“후후·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거랍니다아·”
“나는 그냥 휘청거리면서 바로 앞에 놓인 길을 걸었을 뿐이야·”
“하지만 계속해서 하늘의 별을 보고 계셨지요·”
성벽 위에 올라선 에이더가 속삭였다·
“그렇기에 이곳에 다다르신 겁니다·”
“····”
우리는 동편을 보고 섰다·
떠오른 해가 하늘을 환히 밝혀왔다·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괴수가 없는 악몽이 없는 그리고 우리를 장난감 취급하는 존재가 없는 첫 하루가··· 이제 막·
“쉬운 길은 항상 눈앞에 있었습니다· 갈등하지 않고 고뇌하지 않고 그저 눈앞의 적과 싸워 죽이며 길을 열 수도 있었지요·”
“····”
“하지만 당신께서는 어려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갈등하고 고뇌하고 대화를 시도하셨습니다·”
해를 마주하고 서서 두 눈을 감은 채· 에이더는 숨을 들이켰다·
“당신께서 적이 태어난 것이 잘못이라고 그래서 죽여야 할 상대라고 편하게 결정했다면·”
나는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당신께서 깊은 골을 사이에 둔 상대와 처음부터 대화하기를 포기했다면· 상대의 추악함까지 사랑하려 노력하지 않았다면 적이라 할지라도 그 아픔을 가엾게 여기지 못했다면·”
에이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당신께서 ‘미워하지 않을 용기’를 포기했다면··· 이 세계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을 겁니다·”
마치 게임의 스탭롤에 앞서·
플레이어가 달성한 업적을 하나씩 되짚어 주듯이·
나의 디렉터는 내가 걸어온 길을 읊어주었다·
“당신이 번민하고 고뇌한 그 시간들 그 모든 비효율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아프고 힘들었던 날들이 이 세계를 진엔딩으로··· 아니·”
에이더는 손을 들어 우리의 뒤편을····
크로스로드를 가리켰다·
“‘오늘’로 이끌었습니다·”
나는 뒤로 돌아서서 우리의 앞에 세워져 있는 도시를 둘러보았다·
이른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바로 어제 최후의 결전을 치러낸 나의 도시는· 지금 평화로운 고요에 잠겨 있다·
밤이 새도록 울고 웃은 나의 사람들 모두가 아직 달콤한 아침잠에 잠겨 있는 시간·
내가 그토록 도달하고 싶었던 ‘내일’이··· 드디어 ‘오늘’이 되었다·
“축하합니다 플레이어·”
에이더는 천천히 예를 갖추어 내게 깊게 인사해 보였다·
“그대의 위대한 업적에 경의를 표합니다·”
“····”
“자 이제··· 약속한 소원을 들어드릴 시간이네요·”
그리고 에이더는 자신의 몸에서 회색 입자를 모아 눈부신 빛으로 연성해 냈다·
마력과는 별개의 시스템 관리자로서 이계에 접속하는 능력· 그것의 일부가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말을 전하셔야지요?”
“···에이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의 소원을 들어드릴 힘은 그리고 당신의 소원을 전달할 회선은 남겨두었습니다· 이 순간을 위해 딱 그만큼의 생명을 아껴두었거든요·”
나의 소원·
그것은 지구에 있는··· 고전덕후의 소원이기도 하다·
병원에서 혼수상태에 빠져 잠들어 있는 한 아이에게 응원의 말을 전하는 것·
정말 오래 기다려 온 일이다· 하지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그 소원을 이루면 너는····”
“비로소 저는 자유로워집니다아·”
에이더는 빙긋 웃었다· 나는 그 말뜻을 즉시 알아챘다·
역시·
이 소원을 이루고 나면 에이더는 죽는다·
“너무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세요· 어차피 이대로는 며칠 못 버티고 소멸할 겁니다아·”
“····”
“이대로 맥없이 스러질 바에야 남은 생명을 불태워서··· 당신의 말씀을 그 아이에게 전달하는 일이라도 하는 게 낫겠지요·”
에이더가 쿡쿡 웃었다·
“영주님의 소원이 작은 것이라 정말 다행입니다아· 이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컸다면 못 들어드릴 뻔했어요·”
“에이더·”
“저는 제 소원을 모두 이루었습니다·”
에이더의 회색 두 눈은 선명한 의지로 굳건했다·
“영주님께서··· 제 모든 소원을 이뤄주셨어요·”
“····”
“그러니 이제 제 차례입니다·”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자 영주님·”
에이더가 나를 바라보며 괜스레 다정하게 물었다·
“그 아이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나는 숨을 삼켰다·
나는·
나는····
《잠~깐잠깐잠깐!》
그때였다·
《그 생명 아껴둬! 넣어둬넣어둬! 더 좋은 방법이 나한테 있으니까!》
느닷없이 발랄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기겁해서 보자 우리가 선 동쪽 성벽 위의 허공이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작은 문이 열리고····
《얏-호!》
핑태양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우리 사이에 끼어든 이 핑크머리 태닝 양아치를 향해 나는 뜨악하게 외쳤다·
“살로메?!”
《짜잔~ 그렇습니다! 우주에서 가장 요염한 여자 살로메! 재등장~!》
“아니 진짜 살아 있었네!”
진심으로 놀라서 말하자 양손으로 만든 브이를 흔들던 살로메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그 말투는? 내가 죽기를 바라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당연히 살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래도 신기해서····”
그 난리통에서 어떻게 빠져나온 거래?
《음후후후· 그때 말했잖아? 이제 나는 ‘마음’만 있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니까? 설혹 그곳이 다른 세계라고 해도 말이지!》
살로메는 건방진 얼굴로 헤헹- 하고 콧대를 치켰다·
《근본적으로 나는 정신체이기도 해서 세계와 세계 사이를 통과할 때 코스트가 적게 들기도 하고? 그리고 너라는 확실한 마음의 좌표가 여기 있으니까· 이렇게 슝~ 건너뛰어 올 수 있었던 거지!》
직후 살로메는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헤엑 헤엑 그런데··· 이 세계는 이제 진짜 마력이 거의 없구나· 숨 막혀····》
“괜찮냐···?”
이제 우리 세계에서는 마법 기적 권능 같은 것들이 거의 다 사라졌다·
그 마법 기적 권능이 모조리 합쳐진 무언가인 살로메로서는 버티기 쉽지 않을 텐데·
《음~ 그래서 사실 이쪽 세계에서는 더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살로메는 머뭇거리며 손가락을 꼼질댔다·
《다른 세계로 떠나야 할 것 같거든···· 하지만 가기 전에 네 얼굴을 한번 보고 싶어서 이렇게 온 거야·》
“살로메····”
나는 숨을 삼켰다·
나를 돕고자 싸웠던 이 서큐버스는 다른 세계로 떠나기 전에 내게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하··· 아깝네 진짜· 아까워···· 놓고 가기 아까워····》
살로메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뭐냐! 무슨 뜻인데 그거!
눈썹을 치키며 느끼하게 웃은 살로메는 엄지와 검지로 브이를 만들더니 그 손을 자신의 턱 아래에 댔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세계로 떠나기로 했어!》
“···가보고 싶었던 세계?”
서 설마····
《아주 먼 세계지만 확실한 마음의 좌표를 확보한 곳이 있거든·》
“혹시 그 마음의 좌표라는 게····”
《후후 그렇다··· 애쉬! 그때 너의 과거를 훔쳐보고 얻어낸 좌표가 나에게 있지!》
나는 경악해서 입을 떡 벌렸다·
그렇다·
내 인격은 고전덕후의 복제·
다시 말해서 살로메 이 녀석은··· 고전덕후의 기억을 읽었고 고전덕후의 ‘마음’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녀석 지구로 갈 셈이다!
살로메는 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자신의 복장을 과시해 보였다·
《사실 그 세계로 가보려고 이렇게 옷차림도 미리 구현해 둔 거란다? 이것이 살로메의 선견지명!》
“미 미친····”
어째 재회할 때부터 꼬락서니가 이상하더라니 설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단 말인가···!
그나저나 대체 고전덕후의 기억 속에서 어느 부분을 읽었길래 저런 모습을 선택한 걸까· 그쪽 세계에서도 조금··· 두려워할 거 같은데····
《서큐버스 엠프레스 살로메의 새로운 전설이 시작된다! 흐흐흐 기대하라구~?》
“대체 뭘 할 속셈인 거야···?”
살로메는 대답 대신 음흉하게 웃기만 했다·
나는 지구의 사람들에게 미리 속으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지구의 여러분· 좀 무서운 걸 강제로 수출하게 생겼어요····
《말이 길었는데 아무튼! 나는 지금부터 그 세계로 갈 거야·》
살로메는 손을 뻗어 허공에 크게 원을 그렸다·
《잠시 그 세계까지 정신체가 오갈 수 있는 통로를 연결할 건데··· 알다시피 내가 좀 대단한 여자라서 한 사람의 ‘마음’ 정도는 잠깐 데려가 줄 수 있거든·》
말뜻을 알아챈 내가 되물었다·
“내 의식을··· 그 세계에 잠시 데려다주겠다는 거야?”
살로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회색 분이랑 방법은 좀 다르지만 결과는 엇비슷하게 가능하다는 거지· 아주 짧은 시간이겠지만 네가 바라는 그 아이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 거야·》
살로메가 생긋 웃었다·
《무엇보다··· 나도 그 소원이 이뤄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거든!》
피식 웃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이라면 자격이 있지·
“부탁할게 살로메·”
《좋아 준비할게!》
살로메가 허공에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쪽을 지켜보던 에이더가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잠시만요 영주님···!”
내가 돌아보자 에이더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뭐가 안 되는데?”
“제가 당신께 약속했잖습니까 진엔딩에 도달하면 소원을 들어드리겠노라고···!”
에이더는 힘겹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영주님께서는 제게 약속을 지키셨어요· 그러니까 저도··· 당신께 갚아야 한다고요·”
“····”
“그 긴 시간 포기하지 않고 싸워온 당신께··· 보상을 드려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봐 에이더·”
나는 씩 웃어 보였다·
“나는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어·”
“네?”
“여기 있잖아·”
나는 도시 안쪽으로 손짓했다· 에이더가 눈을 크게 떴다·
아침 햇살이 드리운 평화로운 크로스로드의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이 이상 가는 보상이 어디에 있다는 거야?”
“····”
“세상을 구하고 싶다는 우리의 소원은 우리가 함께 싸워 얻어낸 거야· 네가 내게 무언가 더 보상할 필요가 없어·”
“하지 만····”
애초에 다른 누군가의 희생으로 나의 소원을 이룰 수는 없다·
나는 누군가를 살리고자 나의 소원을 이고 여기까지 온 것이니까·
그러니까 네 남은 목숨으로 내 소원을 이루는 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이 녀석아·
“····”
예기치 못하게 삶이 조금 연장된 탓일까·
에이더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그러면 저는··· 남겨진 이 생명으로 무엇을····”
내 손이 조심스럽게 에이더의 어깨를 두들겼다·
“남은 그 생명은··· 네 마지막 소원에 사용하는 게 어때?”
“네? 제 마지막 소원이요···?”
“그래·”
나는 빙그레 웃었다·
“생각해 봐·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
“진짜 마지막 소원을 스스로 찾아봐·”
긴 여정의 끝에서 나는 나의 공범 또한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가 최후의 목숨 정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를 바랐다·
“···마지막 소원····”
멍해진 에이더를 뒤로하고 나는 살로메의 앞에 섰다·
《그럼 애쉬! 꿈에 그리던 바로 그 순간이야!》
활짝 열린 마법의 문의 앞에 서서 살로메 또한 활짝 웃었다·
《너의 깃발을 짊어지고 마지막까지 걸어서 그 끝에서··· 직접· 너의 마음을 전할 때가 온 거야!》
어쩐지 긴장되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런 내게 살로메가 손을 내밀었다·
《자! 소원을 이루러 가자!》
“···응!”
나는 살로메의 손을 맞잡았다·
살로메가 악동처럼 미소하며 나를 홱 끌어당기자 새하얀 섬광과 함께 눈앞이 환해졌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