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 [True Ending] 첫 소원
검은 호수·
한때 악의와 악몽으로 오염된 검은 물로 가득 차 있던 이곳 호수는 지금·
쏴아아아아!
모조리 증발했다·
이계의 통로가 닫히고 영계가 소멸하며 동시에 검은 호수를 메우고 있던 모든 저주가 사라졌다·
모든 오염된 호숫물이 증발하고 바닥까지 바짝 말라붙자 비로소 그 아래 가라앉은 고대 왕국이 세상에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영생의 저주로 박제되었던 이 나라 사람들의 시간 또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헉?!”
“이 이게 무슨····”
“대체 얼마나 오래··· 악몽에 잠겨 있었던 거지···?”
마왕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호수왕국의 국민 대부분은 영생의 저주에 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수 아래 지옥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마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악몽 속에 자신을 맡기고 침몰했다·
아주 길고 긴 꿈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낯선 현실의 공기 앞에서 당황했다· 그리고 완전히 변해버린 세상을 보고 경악했다·
“모든 건물이 폐허가 되었잖아···!”
“어째서 왕국이 통째로 호수 바닥까지 떨어진 거지?!”
“마 마법이 발동하지 않아! 대기에 마력이 없어!”
“아티팩트도 모조리 먹통이야! 이게 대체···?!”
고대의 마법왕국이었던 호수왕국은 현대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마법 수준이 높았고·
반대로 말해서 마법에 대한 의존이 극심했다·
호수왕국 사람들은 대기에서 사라진 마력과 멈춘 채 작동하지 않는 자신들의 이끼 낀 문명 앞에서 충격에 빠졌다·
마치 신선 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듯·
지옥에서 보낸 오백 년의 단절 이후 완전히 변해버린 세상과의 조우에서· 호수왕국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대로 끔찍한 혼란이 왕국 전체를 휩쓸 뻔했으나····
“진정하라!”
냉정한 이성을 유지하는 지도자가 남아 있었다·
“왕명이다! 모두 진정하라! 질서를 유지해!”
어릿광대 가면을 벗는 남자·
크라운- 아니 왕자 크리스티앙이었다·
악몽에서 깨자마자 다시금 혼절한 국왕을 대신해 그가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왕가에는 아직 권위가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크리스티앙은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나이트크롤러 부대를 대동한 채 왕국 내부의 혼란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그는 왕명을 앞세워 국민들이 질서를 되찾도록 인솔했다·
악몽에서 해방된 조국을 수습하는 것은 수없는 세월 동안 꿈꿔온 일이었기에·
크리스티앙과 나이트크롤러 부대는 바쁘게 도시를 오가며 사람들을 이끌었다·
“물과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왕자님·”
“왕가 창고에 건량과 정수를 비축해 두었다· 곧 배급을 시작할 테니 도시의 주요 관공서에 방을 붙이도록· 본래 공무를 보던 인력들도 소집해·”
“아직 날씨가 추운데 곧 밤이 올 겁니다· 이대로면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을 겁니다·”
“썩은 목재 건물을 모두 뜯어내 장작으로 사용한다· 모든 광장과 소광장에 불을 지펴·”
바쁘게 지시를 내리던 크라운은 멀리 보이는 위쪽의 땅을 가리켰다·
왕국 자체가 호수 밑바닥에 내려앉은 상황이라 지상까지는 까마득했다·
“그리고 호수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길을 내야 한다· 작업은 내일 아침부터고 몸을 쓸 수 있는 자는 모두 투입한다· 징집하도록·”
듣고 있던 고위 관료 중 하나가 더듬거렸다·
“왕자님· 그런 일은 마법으로 하는 것이····”
“마법은 더 이상 없다!”
크리스티앙이 일갈했다·
“이제 세상 모든 일을 우리의 두 손으로 해내야 한다·”
“어 어째서 이런 일이··· 어째서 우리 호수왕국이····”
“우리의 찬란한 마법 문명이 어째서 이렇게····”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덜덜 떠는 귀족들에게 크리스티앙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
“마법이라는 불빛에 매료되어 오직 그것 하나에만 매달려 세계에 패악질을 부리고 사람을 가르고 차별해 온 이 나라의 죄가· 이제야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뒤이어 크리스티앙은 작게 읊조렸다·
“그리고··· 나의 죄이기도 하다·”
결국 마왕을 안으로 들이고 나라를 이렇게 파멸시킨 것은 틀림없는 자신의 죄였다·
“나 또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하지만 죗값을 치르는 것은 우선 나라의 사람들을 살린 뒤의 일이다·
“움직이자 나이트크롤러·”
지옥에서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쭉 따라온 이들을 이끌고 크리스티앙은 앞으로 걸었다·
“긴 밤은 끝났지만 우리는 앞으로 한동안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예!”
크리스티앙은 외성 구역으로 향했다·
패닉에 빠진 내성 구역의 국민들과 다르게 외성 구역의 비국민들은 빠르게 크리스티앙의 명령대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호수왕국 비국민들은 마법의 시대에도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기에·
당장의 생존을 위해 훨씬 억척스럽게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던 크리스티앙은 이윽고 발을 멈췄다· 누군가가 길의 앞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님!”
그들은 바로 검귀와 창귀 베이스캠프의 모험가들 그리고··· 밑바닥 마을 사람들이었다·
크리스티앙과 나이트크롤러만큼이나 긴 시간 동안 이 지옥에서 살아낸 자들·
그리고 새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된 자들·
“어떻게 좀 도와드릴까?”
검귀와 창귀가 씩 웃으며 물었고 크리스티앙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를 고맙게 받지· 아리엘이 돌아올 때까지 최소한의 정리를 해두어야 할 테니··· 그대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사람들과 함께 바쁘게 수습 작업을 재개하다가 크리스티앙은 문득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호수왕국의 상공에는 검게 오염된 호숫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환하게 맑아 온 겨울 하늘이 시리도록 선명한 푸른빛으로 저 멀리 존재할 뿐·
“···아리엘·”
크리스티앙은 동생의 이름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어서 돌아와다오· 이 나라에는··· 네가 필요하니까·”
애쉬의 약속을 그리고 에이더의 집념을 믿기에·
악몽이 사라진 이 세상에서 여동생이 무사하리라고 믿으며····
***
긴 백색 속눈썹이 움찔거린다·
이윽고 천천히 눈꺼풀이 뜨이고 맑은 청록색 눈동자가 세상에 드러났다·
“아····”
아리엘이 눈을 떴다·
그녀가 곧 깨어날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의 병실에 와서 기다리던 나는 그녀에게 인사했다·
“정신이 들어 무명? 아니····”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고쳐 불렀다·
“아리엘·”
“···애 쉬···?”
멍한 눈으로 나를 보던 아리엘이 다음 순간 다급하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여기는···?!”
“크로스로드의 신전· 새벽이야·”
나는 내 몸에 감긴 붕대를 보여주었다·
“너 하루 종일 꼬박 잤어· 바로 어제 최종결전이 끝난 참이거든·”
“결전이 끝났다니? 그게 무슨····”
“그 모든 악몽이 끝났다는 이야기야·”
빙그레 웃은 나는 그녀에게 턱짓했다·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고 좀 푹 잔 느낌은 어때?”
“아····”
그제야 아리엘은 자신에게 깃들었던 그 모든 악몽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정말이다· 없어졌어· 그 모든 어둠과 저주가···!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
“그렇다면 나의 왕국도···!”
이윽고 아리엘은 내게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고맙다 애쉬· 나중에 제대로 자리를 마련하고 호수왕국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하겠지만··· 정말로 고맙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
아리엘은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은 채 그 커다란 호숫빛 두 눈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네가 나를··· 나의 왕국을 그리고 이 세상을 구했다· 정말로··· 고마워····”
“뭘· 우린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 당연한 일이지·”
아리엘은 한번 흐느끼기 시작하자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의 하얀 뺨을 따라 끊임없이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나는 조금 걱정되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기뻐서 우는 거니까····”
아리엘은 필사적으로 입가를 치켜 웃어 보이려 했지만 이윽고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붙잡고 괴로워했다·
“정말 기쁘다 정말 기쁜데· 그런데 무언가···· 아주 소중한 것을 잊어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
“어째서 이렇게 가슴 한켠이 아린 것일까··· 이렇게 기쁜 날에 어째서··· 이렇게 큰 상실을 느끼는 걸까····”
나는 침묵했다·
그런 내 옆에서 아리엘은 계속해서 구슬피 흐느꼈다·
“미안하다 애쉬· 잠시만···· 잠시만 울게 해다오····”
아리엘은 그렇게 한참을 오열했다·
나는 그녀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조용히 옆에 있어 주었다·
***
새벽이 지나고 이른 아침·
몸을 추스르자마자 아리엘은 떠났다·
호수왕국의 상황이 걱정되어 견디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지금부터 바로 말을 몰아 달려가도 사흘은 걸릴 거리니 나는 가장 좋은 말을 그녀에게 빌려주었다·
또한 나는 아리엘을 혼자 보내지 않고 크로스로드의 병사를 조금 붙여 함께 파견하기로 했다·
호수왕국의 현황을 살피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가 있다면 조속히 지원해 주기 위해서였다·
가뿐한 동작으로 안장 위에 몸을 올린 아리엘이 흐릿하게 웃었다·
“정말로 고맙다 애쉬· 고맙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할 만큼··· 너의 모든 선의와 배려에 감사한다·”
“별말씀을·”
“호수왕국의 상황을 수습하는 대로 세계수호전선에 공식적으로 감사를 표하러 돌아오겠다·”
뒤이어 아리엘은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악몽의 주인으로서 이 세계에 끼친 피해를 공식적으로 사죄하러 오겠다·”
“····”
“사죄로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다·”
아리엘은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되었을 때의 기억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악몽의 주인이 되었고 세계를 멸망시키려 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도울게· 최선을 다해서·”
우리는 서로를 보며 흐릿하게 미소했다·
“그럼 또 보자! 이랴!”
아리엘은 말을 몰고 질풍처럼 남쪽으로 내달렸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호수왕국 왕녀와 그 호위병력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걸로 정말 괜찮은 거야?”
그러자 가까운 건물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이더·”
“····”
나의 공범 디렉터였던 남자- 에이더는 힘겹게 웃어 보였다·
가슴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그의 온몸에서는 회색 입자가 흩날리고 있었다·
외신들의 시스템을 과부하시키고 불태웠고 그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아리엘의 영혼에 새겨진 상처를 치유했다·
그리고 이 긴 싸움의 끝에 그는 완전히 망가진 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하고 있었다·
“우리 세계를 유린하던 멸망유희를 파괴했고 일생 구하고 싶었던 단 한 사람을 구했습니다아·”
특유의 늘어지는 말투를 되찾은 디렉터놈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 이상 괜찮을 수가 없지요· 후후·”
“····”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아· 모두 각오한 대로의 일이니까요····”
에이더는 힘겹게 한쪽 다리를 절며 내 앞으로 와서 섰다·
“그보다는 영주님· 영주님께서 달성한 위대한 업적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에이더는 천천히 낡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영주님께서 오랫동안 품어오신 그 소원을··· 마침내 이룰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