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 [LAST STAGE] 모험의 끝
인세· 크로스로드·
세레나데는 동쪽 성벽 위에 서 있었다·
남쪽 성벽은 안전상의 문제로 접근을 허가받지 못했기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장소인 동쪽 성벽 첨탑에 서서 전장 전체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 최후의 전투에서 세계수호전선은 승리했다·
괴수대침공을 무사히 막아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사람들이 웃고 울며 서로를 껴안았다· 살아남았음을 기뻐하며 사람들은 서로의 체온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 기쁜 풍경 앞에서도 세레나데는 마냥 즐겁지 못했다·
‘낭군님····’
아직 애쉬가 돌아오지 못했기에·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등으로 맞으며 푸른 머리칼을 바람에 흐트러뜨리며 세레나데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부디··· 무사하게만····’
그때였다·
번쩍-!
크로스로드 동쪽 평원 쪽에서 빛이 번뜩였다· 놀란 세레나데는 그쪽을 보았다·
동쪽 평원에 심어진 가시나무 에버블랙··
이미 생기를 잃고 거의 다 죽어가던 에버블랙의 줄기 정중앙에 마법 게이트가 형성되었고 이윽고 그 게이트를 비집듯 헤쳐나오며- 비공함 라 만차가 등장했다·
저 비공함을 타고 출진했던 애쉬가 귀환했으리라- 그렇게 믿고 자신도 모르게 세레나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그녀가 다급하게 동쪽 성벽 아래로 내려가기도 전에 비공함으로부터 벼락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세레나데!”
황제 트라하였다·
비공함 뱃머리에 서 있던 황제가 성벽 위의 세레나데를 알아보고 거칠게 사자후를 토했다·
“즉시 사람들을 불러 모아라!”
“네?”
“귀환 중에 사고가 나서 애쉬가 돌아오지 못했다!”
순간 세레나데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뒤늦게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그녀를 휘감았다· 하지만 이어진 황제의 말이 그녀의 정신을 바로잡았다·
“그 녀석은 돌아올 것이다!”
“···!”
“그 녀석이라면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이 통로를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해야 한다!”
인세에 귀환하자마자 라 만차는 운행을 정지했다·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기세 그대로 거대한 비공함이 지면에 처박혔다· 그 비공함에서 거의 구르듯이 황제와 글로리 나이츠 5인이 뛰어내렸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라! 통로가 닫히는 걸 막아야 한다! 어서-!”
황제도 글로리 나이츠도 모두가 성치 못한 몸인데도·
벌써 닫히기 시작한 게이트에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게이트를 열어젖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모습을 다 살피지도 못하고 세레나데는 남쪽 성벽 방향으로 달렸다·
다리가 부서져도 상관없다· 폐가 찢어져도 상관없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빨리 빨리···!
세레나데는 숨도 쉬지 않고 필사적으로 내달려 남쪽 성벽에 다다랐다·
그리고 여전히 승전의 기쁨에 울고 웃는 남쪽 성벽 앞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들어주세요! 황태자 전하를···!”
황태자의 이름이 나오자 놀라서 돌아보는 사람들을 향해 세레나데는 전에 없이 간절하게 외쳤다·
“우리의 그 사람을 구해야 해요···!”
***
쿵 쿠구구궁····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
“····”
영계의 밑바닥 어딘가·
나무조각과 흙더미 속에 파묻힌 채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어디까지 추락한 거지?
···아니 어디까지 추락했든 상관없나?
‘끝이다·’
영계를 빠져나갈 유일한 수단을 놓쳤다·
게다가 이렇게 깊은 바닥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영계는 곧 완전히 붕괴하고 소멸할 것이다·
‘모든 전투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마음을 놓아버린 대가인가·’
어쩔 도리가 없는 사고이기도 했지만·
만약 내가 좀 더 철두철미했다면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대신 기능적으로 탈출에만 집중했다면 예방할 수 있는 사고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시 볼 수 없을 소중한 이들과 마지막으로 교감을 나누었고 불운한 인과가 중첩되어 이런 결과를 낳았다·
‘그래도 나 하나의 목숨이면 방심의 대가치고는 값싸다·’
나의 세계는 지켜냈고 나의 목적은 모두 달성했으니·
비록 그토록 닿고 싶었던 진엔딩을 내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내가 없다고 해도 나의 사람들이 대신 도달해 줄 테니까· 대신 나의 뜻을 이고 살아가 줄 테니까·
‘그러니까 마음 편히 최후를 맞을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두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한때를 보내고 있는데 흥을 깨는군·》
“···?”
멀잖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보자····
온몸이 너덜너덜하게 부서진 마왕· 그리고 평범한 영혼으로 변한 전(前) 여신께서· 나란히 백사장에 앉아 멸망하는 영계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기겁해서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뭐야!
“두 사람 여기서 뭐 해요?”
《그건 이쪽이 묻고 싶은데····》
마왕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고 여신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곧 영계가 소멸할 텐데· 어쩌다 여기로 추락한 거니 애쉬?”
고즈넉한 최후를 준비 중이었다는 두 사람에게 나는 헛헛하게 웃으며 솔직하게 설명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실수했다고· 유일한 탈출 방법이었던 비공함을 놓쳐버렸다고·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여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여기 가만히 있는 거니?”
“예? 아니 그야 사실상 끝났으니까요····”
나는 쓰게 웃으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마지막에 마음을 놓아버리고 인세로 돌아갈 기회를 놓친 건 결국 제 실수니까요· 그러니까····”
“실수 한번 했다고 해서 모든 걸 포기할 거니?”
여신의 목소리는 조금 엄해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소중한 것을 잔뜩 잃었다고 해도 그토록 힘들고 그토록 지치고 그토록 아파도·”
“····”
“그래도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았잖니· 그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고·”
멍해진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여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네 삶은 끝나지 않았어· 그렇다면 싸워야지·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녀에게는 더 이상 어떤 신성도 없었으나· 알 수 없는 위엄이 남아 있었다·
여신이 읏차-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마왕 역시 부서진 몸을 힘겹게 일으켜 자리에 섰다·
다가온 두 사람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주저앉은 채였다·
나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걸요··· 이 밑바닥에서 어떻게 다시····”
“바보 같긴·”
여신이 빙그레 웃으며 하늘로 눈짓했다·
“네가 지금껏 베푼 선의가 너의 길이 되어줄 거야·”
“····”
“네가 마음을 다해 찾는다면 네 주위에는 언제나 너를 도울 사람이 있단다· 그 사람들의 선의도··· 조금은 믿어보렴·”
뒤이어 마왕이 말했다·
《네가 한 약속대로 최고의 무대였고 최고의 쇼였다·》
짧게 웃은 마왕이 하늘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니 그에 걸맞은 최고의 커튼콜을 보여줘야지 않겠나?》
“···!”
《네가 받아 마땅한 박수갈채가 저곳에 있다 플레이어· 실컷 누리러 가라···!》
뒤이어· 약속이라도 한듯이·
두 사람은 힘껏 나를 일으켰다·
여신에게도 마왕에게도 나를 하늘로 날려 보낼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쓰러진 나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마음이 있었다·
타앗-!
그대로 땅을 박차고 이를 악물고 나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내게 남은 마지막 용의 힘을 쥐어짜 날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폭포를 거슬러 오르듯 부서지는 세상을 헤치고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모험은 집에 돌아가야 완성되는 거야·”
뒤에서 여신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울렸다·
“네 모험을 완성하렴 애쉬···!”
나는 솟구쳐 올랐다·
무너지는 흙더미를 헤치고 쏟아지는 나무 조각을 부수고 휘몰아치는 파도를 꿰뚫고 필사적으로 날갯짓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힘에 부쳤다·
영계가 소멸하며 마력 또한 사라져가고 있었다· 내가 사용하는 용의 힘 또한 금세 출력이 떨어졌다·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내 발버둥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
눈을 크게 떴다·
반짝이는 별똥별들이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별똥별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종족신들이었다·
추락한 나를 구하고자 수많은 종족신들이 앞다투어 무너지는 세계 아래로 쏟아져 내린 것이다·
비록 모두 영계 소멸과 함께 저승으로 가는 것이 확정된 운명이라고는 해도·
나를 구하고자 이렇게 기꺼이····
《날게나 친구·》
나를 발견하고 나를 향해 떨어져 내린 그들이 하나씩 내 손을 잡았고
《한 번만 더!》
그대로 나를 위로 던져주었다·
《한 번만 더-!》
손에서 손으로 손에서 손으로····
한 번 더 나를 날게 했다·
완전히 내려앉고 소멸하는 영계의 대지를 뒤로하고 나는 계속해서 하늘로 솟구쳤다·
위로·
위로·
위로···!
끊임없이 날아오르는 내 앞에 이번에는 선대 회귀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서로 손을 잡은 채 하늘에 둥글게 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나를 향해 손을 내민 여인- 나를 낳아준 어머니 더스티아가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인세에서 이곳 영계로 진입할 때 에버블랙의 줄기 쪽에 게이트를 열었지?”
“···!”
“네 비공함이 인세로 빠져나갈 때도 같은 게이트를 사용한 모양이야· 그리고 지금 줄기 끝에 열린 그 문이 닫히지 않고 버티고 있어!”
타앗!
내 손을 잡아챈 어머니가 씩 웃었다·
“그 조그맣던 손이 이렇게나 커졌구나·”
“어머니···!”
“어서 가렴 세상이 너를 기다리잖니!”
한데 손을 잡고 늘어선 회귀자들이 빙글빙글 마치 시계처럼 회전하며 힘을 모았다·
어머니는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해도 괜찮아· 망가져도 괜찮아· 시간을 되돌리는 힘 같은 것 없어도 너는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어머니가 눈물지은 채 웃었다·
“살아가렴 계속해서···!”
마주 미소한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잡고 회전하던 회귀자들의 원이 일직선으로 펴지며 힘을 끝으로 전달했다· 그 끝에서 나는 타이밍에 맞추어 하늘로 튕겨 올랐다·
이제 아래가 모조리 무너지는 검은 가시나무에 나는 바짝 붙어 날았다· 그리고 에버블랙의 중턱에는 두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고뭉치 바보 녀석이····”
“형들 속을 얼마나 썩일 셈이냐?”
검과 지팡이를 에버블랙에 꽂아 넣고 기다리던 두 형 라르크와 페르난데스는 투덜거리며 각자의 무기에 힘을 불어넣었다·
“나의 눈사태를 주마·”
“나의 불씨도 주지·”
두 사람은 각자 눈바람 같은 검기를 쏟아내는 검과 불씨 같은 마력을 뿜어내는 지팡이를 내밀었다·
타앗!
나는 양손에 그것들을 낚아챘고 동시에·
짜악!
두 형이 힘차게 내 등을 후려쳤다·
짜릿한 통증과 함께 나는 더더욱 하늘로 치솟았다· 양손에 들린 검과 지팡이가 검기와 마력을 뿜어내며 추진력을 더했다·
“하늘에 도전하는 자에게 추락은 수치가 아니다· 당연히 겪어야 할 과정일 뿐·”
멀어지는 내 등 뒤로 두 형이 소리쳤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추락한다 해도··· 네게 다시 도전할 용기가 남아 있다면!”
그러면·
다시 날 수 있으리라·
두 형의 말을 가슴에 남기며 나는 위로 쏘아졌다·
이제 에버블랙의 상부·
어느새 까마득한 고도에 이르러 점점 주위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검과 지팡이 또한 더 이상 검기와 마력을 뿜어내지 못하고 서서히 멈췄다·
그때 선명한 온기가 나를 감쌌다·
주위를 살피자 어느새 내 주위를 호위하듯 감싸고 비행하는 네 마리 적룡이 보였다·
거대하던 용의 모습은 이미 없고 잘게 쪼개지고 부서진 채로·
궤적을 따라 길게 비늘을 흩뿌리며 마치 불꽃놀이처럼 하늘을 가르는 내 마음의 어머니들·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 이제 알지?》
초대 더스크 브링어가 장난스레 물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대답했다·
“사랑할게요!”
네 용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나는 한 번 더 외쳤다·
“사랑할게요 온 힘을 다해서···!”
내게 다가온 네 명의 적룡이 번갈아 내 이마에 키스했다·
그때마다 내 몸에 온기가 번지고 내 가슴 속의 꺼져가던 불꽃이 다시금 힘을 되찾으며 스스로를 불살랐다·
마지막으로 내게 다가온 2대 더스크 브링어- 대공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내 이마에 긴 키스를 남겼다·
그리고 해맑게 미소했다·
《너의 내일은 틀림없이 맑을 테니까···!》
더스크 브링어가 멀어졌다·
나를 위로 올려보내고 내 뒤에 남은 네 마리 용은 금세 시야 바깥으로 사라졌다·
대지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세계의 소멸은 어느새 상공까지 치솟아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에버블랙의 최상층부에서-
《여기야!》
서큐버스 퀸이 기다리고 있었다·
“살로메!”
《이쪽 이쪽! 나무 안으로!》
살로메가 확보해 둔 통로를 따라 에버블랙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의 내부는 넓은 공동처럼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공동의 저 먼 끝부분에··· 그동안 본 게이트와는 조금 다른 이질적인 마법의 문이 열려 있었다·
차원이동술식으로 열린 게이트였다· 그리고 붉은 단면처럼 공간을 가른 그 게이트까지의 길을 가시나무는 무너져 내리는 몸으로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영계와 현실의 통로는 폐쇄된 상황인데·
단 한 번 열리고 닫힐 저 게이트로 통하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이미 죽은 몸으로 나무는 필사적으로 버텨내는 중이었다·
《나는 굳이 작별 인사 더 안 할게·》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살로메는 내 등의 망토에 제 양산을 얽어놓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다시 만날 거고··· 뭣보다 좋은 몽마는 꿈에서 깰 시간도 잘 아는 법이거든·》
“살로메···!”
《내 걱정은 말고! 자아 어서! 날아가라 인기남!》
투학-!
살로메의 양산이 눈부신 핑크빛으로 반짝이며 앞으로 쏘아졌고 나는 뭘 어쩔 새도 없이 뒤따라 날아갔다·
《너를 기다리는···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한가득이니까!》
살로메는 악동처럼 웃으며 그런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힘내!》
순식간에 살로메와 멀어졌고 눈부신 섬광이 일대를 메웠다·
쿵! 쿠구구구궁-!
영계의 소멸이 가속하며 내 발 바로 아래까지 몰려왔다·
세계의 붕괴에 휘말려 뿌리 아래까지 온몸이 소멸했음에도 에버블랙은 최후의 최후까지 통로를 유지하려 애써주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내게 남은 마지막 모든 힘을 모아 쏘아져 올랐다· 무너지고 좁아지는 통로를 기어오르듯 날았다·
어느 순간 두 형이 준 무기도 네 용이 준 온기도 살로메가 준 양산도 모두 파괴되고 소멸하며 사라졌다·
용의 날개도 용의 심장도 머리 위에 왕관처럼 떠 있던 권능의 헤일로도 모두 사라졌다·
나는 평범한 사람의 몸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통로를 기어올랐다·
여전히 게이트는 멀다·
숨이 차고 눈앞이 흐리다· 너무도 힘들어서 지금 당장 포기하고 쓰러져 죽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나를 응원해 준 사람들이 나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 세상과 나 자신과 싸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
인세·
크로스로드 동쪽 평원· 에버블랙의 줄기·
“게이트를 유지해!”
“전부 달려들어-!”
“어떻게든 버텨야 해!”
세계수호전선의 모든 사람들이 나무에 열린 게이트에 매달려 문이 닫히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경천동지할 위력의 기적을 내뿜던 마법사들도 검으로 산을 가르고 방패로 용을 막던 기사들도 모두가 힘을 잃어버린 상태·
이제 모두가 평범한 인간일 뿐·
그런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서로를 붙잡고 버티는 것·
사람들은 닫히는 게이트 위에 손을 올리고 어떻게든 그 속도를 늦추고자 애를 썼다· 손으로 어깨로 등으로 이마로 온몸으로 게이트를 밀어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길을 유지해야 해···!”
마법의 문은 점점 좁아졌고 평범한 사람의 힘으로는 그 폐쇄를 막을 수 없다·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한데 뜻과 마음을 모아 필사적으로 저항한 까닭에·
본래 속도보다 확연히 느리게 게이트가 닫혀갔다· 하지만 느려졌을 뿐 폐쇄 자체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버텨-!”
사람들이 한데 비명을 지르며 버텼다·
그리고·
“앗!”
한때 천리안을 가졌던 청년이 통로 안을 보고 외쳤다·
“황자님이에요!”
“뭐?!”
모두가 안쪽을 보자 정말이었다·
힘겹게 통로를 기어오른 애쉬가 통로의 마지막 끝을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뒤를 눈부신 섬광과 파괴가 뒤따르고 있었다·
“전하!”
“이쪽으로 어서-!”
게이트가 한 차례 더 좁아졌다·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손아귀가 찢어져 가면서도 버텼다· 모두가 피를 토하듯 간절하게 외쳤다·
“조금만 더···!”
자신의 사람들을 발견한 애쉬의 두 눈에 활력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뒤편과 발아래 통로가 모조리 하얗게 소멸했다·
애쉬는 균형을 잃고 무너져 쓰러지려 했다·
그 순간
탁!
뻗어온 나무의 가지가 발판을 댔다·
그것은 오직 사람을 위해 살아온 나무의 마지막 의지였다·
“···!”
그 발판을 발끝으로 디디고 쏟아져 내리는 토사와 목편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애쉬는 통로의 끝에서 허공으로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러나- 멀다·
필사적으로 거리를 좁히고 뛰어올랐음에도 거리는 멀다· 마치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사이에 펼쳐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낭군님-!”
세레나데가 직접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주군-!”
뒤이어 루카스 또한 뛰어들었다·
“선배님!”
“황자님!”
“전하-!”
에반젤린이 데미안이 쥬니어가 그리고 모두가····
허공으로 몸을 던지고 동시에 서로를 붙잡으며 애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꽃처럼 피어나는 그 평범한 사람들의 손을 향해 애쉬는 필사적으로 마주 손을 뻗었고····
-탁·
본래라면 닿을 수 없을 까마득한 낭떠러지 저편에서 뻗은 서로의 손끝이-
틀림없이 서로를 붙잡았다·
***
“미안·”
나는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겨우 내뱉었다·
“조금 늦었네·”
이제는 완전히 닫힌 에버블랙의 줄기 아래·
흙과 피로 범벅이 된 채 우리는 모두 무사히 게이트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나를 끌어안고 흐느끼는 세레나데의 등을 쓸어내리다가 아차 하며 말을 바꿨다·
“아니 미안하다고 말할 때가 아니구나·”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고마워·”
그리고 나를 둘러싼 나를 기다려 준 모든 사람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다녀왔어·”
모두가 일제히 나에게 달려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를 부둥켜안았다· 모두의 손과 손이 엉키며 서로의 온기를 찾아 서로의 어깨와 등을 감쌌다·
다시는 나를 놓지 않으려는 듯 감싸오는 수많은 온기에 둘러싸인 채 나는 숨이 막혔지만 동시에 행복했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울었다·
또 나는 사람들과 함께 웃었다·
울고 웃으며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
정말 긴 모험이었다·
***
정말 멋진 모험이었다·